The Sce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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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서울변방연극제, <미니어처 공간 극장>(안무: 허윤경): 관객을 제1의 전제로 배치하기REVIEW/Dance 2019. 8. 4. 20:46
“머리 바로 위로원 모양의 물체가보이는 곳에 머물러주세요.” “공간 곳곳을 자신만의 방식으로살펴보거나 자유롭게 움직이면서공연을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원하시는 때에 위 지시문의 내용을 수행해주세요.”(공연 중간 허윤경 안무가의 지시로 다른 관객과 한 번의 교환을 통해 남은 두 번째이자 최종의 지시문)▲ 허윤경 안무, 공연 모습, ⓒ한민주 [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이하 상동)은 이른바 관객 각자에게 주어진 지시문을 통한 비선형적 수행이 구성하는 복잡계다. 이러한 개인에게 묻은 그러니까 일종의 비밀스런 스코어는 관객 자신이 원할 때 개입할 수 있음으로 지시된다는 점에서(쪽지의 접힌 면을 기준으로 위에는 지시문이 있고, 아래에는 그것을 알아서 그러니까 ‘자의적으로’ 결정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관객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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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프로젝트 안무, <여집합_강하게 사라지기>: 보기의 시선을 분할하다REVIEW/Dance 2019. 6. 28. 16:22
▲ 최강프로젝트(강진안, 최민선), ⓒBokco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는 한쪽의 무대와 다른 쪽 무대 한편의 영상 두 개가 교차되며 진행된다. 그리고 무대의 움직임을 찍는 카메라가 있는데, 카메라가 영상으로 즉각 매개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작업의 주요한 출발점이 된다. 즉 카메라는 현재의 무대 움직임을 단지 찍기 위해 존재하고, 이를 다음 막에서 영상으로 송출하고 다시 현재의 움직임을 찍는다. 카메라는 움직임에 부착/부가되는 또 다른 동시 움직임인데, 움직임에 따라 가지만 움직임을 그 즉시 반영해 내는 건 아니다. 오히려 카메라는 이후의 움직임을 선취하고 움직임은 이후 장면으로의 출현을 기다리며 찍히기 위해 존재하게 되는 식으로, 움직임은 굴절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영상에서는 편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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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인 안무, <0g>: 속도를 체현하기, 그리고 이후의 것은.REVIEW/Dance 2019. 6. 28. 16:13
▲ ⓒAiden Hwang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길게 줄을 돌리고 그보다 빠르게 달려 거기를 뛰어넘는 퍼포머들, 그리고 혼자 남아 그 줄을 돌리는 퍼포머. 전자가 바깥으로의 장력에서 시작된다면, 후자는 그 스스로가 칭칭 감기며 속도의 중심은 계속 변전된다. 두 장면에서 미치는/닿는 힘은 다시 음악의 출력으로 상승된다. 그러니까 는 현란한 몸 동작이 아닌 움직임의 속도, 그 속도가 어떤 힘의 작용 아래 구현되는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순전히 물리학적인 몸의 방정식에 가깝다. 반면 힘껏 달리다가 어느덧 바닥에 누운 사람들을 홀깃 뒤로 보며 가는 남자의 시선은, 이 작업을 일종의 내러티브를 내포한 작업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의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반사신경의 반응,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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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안무, <무용학시리즈 vol. 2.5: 트랜스포메이션>: 리듬 생산―비워지며 채워진 몸REVIEW/Dance 2019. 6. 28. 16:07
▲ ⓒ목진우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신재희, 이은경, 피터 암페, 이 셋은 몸을 튕기며 계속 큰 숨과 동시에 소리를 뱉어내며 움직인다. 이러한 개별 단위의 무한한 반복이 작품 전체를 이루며, 그 단위들의 집적이 하나의 시퀀스가 되는 것, 곧 다른 시퀀스로의 전환을 이루게 되는 것이 이 무한한 움직임의 소진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조금 중요해 보인다. 사실 이 전환의 순간은 계속 반복된 엇비슷한 자극에 따라 온전히 개별적인 것들의 차이로 인식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분명 온전히 개별적인 것들의 차이인 것이고, 이를 지켜내는 것이 이 작업을 ‘지겹도록 잘’ 보고 있는 것이겠다. 그것은 거의 하나가 끝없이 반복되는 형상이다. 동시에 끊임없이 미세하게 지각 변동을 일으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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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영 안무, <디너>: ‘일상의 시공간을 무대화하기’REVIEW/Dance 2019. 6. 28. 15:30
▲ ⓒ목진우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의 실험은 일상 자체로부터 움직임을 만든다는 것에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춤의 전형적 움직임 자체를 탈피하려는 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는 대신 이 일상이라는 조건으로부터 자연스런 움직임을 무대로 확장시키는 차원에서 보는 게 더 맞다. 3명의 무용수는 일렬로 넘어지는 도미노의 부속이 된다. 이재영 안무가는 예전 둘이 짝지어 그 둘이 농구공이 되는 식의 퍼포먼스식 무대(물론 공연 형태로 짜인 것이었다. (2011))를 한 적도 있는데, 그에 비해 유기적인 사물의 양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일상을 전유한 무대에서 그 속의 사물들로 도미노를 만들어 그 사이에서의 빈틈을 구르기나 등등으로 이어 채우는 식이다. 이 안에서는 온갖 잉여적 행위들을 안무로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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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topia : [고래]>: ‘유토피아는 어떻게 가시화될 수 있는가’REVIEW/Dance 2019. 6. 25. 12:42
IntroE-conscious Dance Project의 (신희무 안무/연출)는 크게 대별되는 두 개의 신(scene)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신에서 다음 신으로 넘어감은 바닷속에서 그 바깥으로의 이동, 그리고 개체에서 사회로, 의태적 움직임에서 집단적 몸짓으로의 변화를 상정한다. 무용수들은 공간에의 분포를 통해 형태를 만들고, 이어 공간 속에서 사회적 신념 체계를 이야기한다, 또는 공간을 하나의 사회로 상정한다. 이후, 그에 대해서는 주로 움직임이라는 몸의 매체적 쓰임에 대한 묘사에 기초하기로 하자. #1.▲ 신희무 안무/연출, E-conscious Dance Projectⓒ김덕원[사진 제공=E-conscious Dance Project](이하 상동)인트로에서 신수연의 모습은 고래를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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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왕성에서>: 책임질 수 없는 판타지!REVIEW/Theater 2019. 6. 20. 21:41
▲ (작,연출 박상현) 포스터 는 세월호 당시를 정리하고 죽은 자의 목소리를 재현하는 차원에서 징후적이다. 이제는 그것을 거리를 갖고 볼 수 있는 시점에 이른 것일까. 결론에 이르러 ‘명왕성’은 그 죽은 자들의 발신지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로부터 그들의 안부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애도 불가능성’이 소실되어 가는 작품은 그 자체로 비정치적이며 무지의 판타지를 구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문을 안긴다. 그러한 판타지를 통해 이 작업은 신파에 도달한다. 저 작업을 보며 울고 있는 당사자들을 부정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로 이 작업의 발신 방향이 즉물적으로 당사자성에 쉬이 기대고 있음으로 되돌이켜 그 의도를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곧 그러한 위로의 효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 방식과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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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에는 똥이 많다>: 뛰어난 공간(에의) 감각, 문학적 소실점, 그리고 현재에 안착하기REVIEW/Theater 2019. 6. 20. 21:27
공간, 형태, 세계관의 연장 ▲ 드레스 리허설 장면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를 구성하는 공간은 블랙박스의 형태를 비껴나서 작품의 세계의 면모를 구성한다. 또는 역설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공간에의 경험이 말과 캐릭터와 이야기를 파악하는 데 있지 않도록 무대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캐릭터와 말을 포함한 소리가 그 공간을 더듬어 나가는 것이 이 작업의 과정이 된다. 마지막에 이르러 주인공(화자)의 “거대한 오욕의 세계”는 물리적인 공간에서는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문학적 서술 방식을 띤 탓에, 그리고 중간 중간 구체적으로 주인공 내면의 목소리가 3인칭 시점으로 전환되는 탓에 현실은 그 바깥이 되고 내면은 파악되어야 할 중핵이 되는데(현실에 위치한 인물들은 바깥으로 전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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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리얼리티(의 마법)를 관찰하기REVIEW/Theater 2019. 6. 16. 13:12
▲ 제프 소벨,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은 무대 위에 하나의 집, 한 면이 전면에 드러나게 집을 짓는 과정 속에서 사람들의 속살을 마치 관음증처럼 드러낸다. 가령 옷 갈아입을 때나 화장실을 쓰거나 샤워를 하는 장면에서 누드는 빈번하게 출현한다. 이는 논리적으로 당연한 것인데, 이것이 그야말로 보통의 우리가 집에 있을 때 다른 사람의 이목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전제가 적용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계속 사라지고 나타나며 지속된다. 그러니까 건축과 해체, 이사가 크게 하나의 사이클을 그리기는 하지만 그 단편들은 삶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고저 없는 동일 차원으로 반복된다. 그러니까 이 과정의 서사가 인물들에게서(개별적인 목소리나 관계에서) 오기보다는 시간의 변화라는 큰 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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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또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동기화(봉합/간극), 그리고 또 다른 서사 가능성REVIEW/Theater 2019. 6. 16. 12:50
▲ 라꼬르도네리 [사진 제공=의정부음악극축제집행위원회](이하 상동) 는 제목과 같이 ‘백설공주’를 현대적으로 각색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이 작업은 우선 스크린에 현장 더빙과 연주가 더해진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음악극이라는 축제 자체의 장르적 명명 속에서 한층 미묘하게 접힌다. ‘음악-극’, 곧 음악으로도 연극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반면 그 둘을 더하는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장르의 예외적 개념이랄까. 현장의 소리를 듣기 위해 원래의 소리를 삭제한/음소거한 스크린을 본다는 것은, 그 스크린이 온전하거나 그 자체로 충만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스크린 속 인물의 입과 그 바깥의 소리를 일치시키려 애쓰는데, 이는 단순히 연습/훈련을 통한 뛰어난 퍼포머들의 동기화에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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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레 니나렐로(Daniele Ninarello)의 <쿠도쿠(KUDOKU)>: ‘움직임은 보는 것인가?’REVIEW/Dance 2019. 6. 16. 11:28
▲ 다니엘레 니나렐로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무대의 불이 켜지지 않고, 한동안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음악의 향연이 펼쳐진다. 사실 어떤 움직임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분명 음악이 주는 실재를 환영으로 치환한 결과를 가져온다. 움직임은 정위되지 않는 음악처럼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이와 같은 인트로에서 볼 수 있듯 는 붙잡을 수 없음의 차원에서 움직임을 제시/지시하는 작업이다(‘움직임은 하나의 단위가 아니라 파편이거나 그 파편들의 끝없는 흐름이다’). 조명이 밝아지고 어떤 형상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실제 사람의 몸이고 또한 움직임을 펼치지 않는 고정된 형태인데, 여기서 음악의 연주자 역시 일자라는 사실이 발견된다. 따라서 보이지 않음으로써 그러나 음악의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한 그런 보기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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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2.0>: <유도>의 대극장 버전!?REVIEW/Dance 2019. 6. 16. 11:19
▲ 박순호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박순호가 안무로 참여하고 새롭게 Rising Tide Dance Theatre로 팀을 구성하여 대극장으로 옮겨진 이번 작업은, 이전 중극장 정도의 규모에서 열렸던 박순호의 작업 (2014)와는 다른 구성과 형태를 지향한다. 애초 이 작업이 지향하던 바와 현재의 작업이 갖는 의미를 지난 작업과의 비교를 통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은 대극장용의 커다란 음악에 힘입어 반복된 구문들을 반복하여 정형화된 군무의 형태를 띤다. 그것은 현장에서 감식되는 음악 바깥의 틀, 곧 동기화될 수 없는 어떤 타격이 주는 이차적 음들을 생략하고, 이미 결론에 다다른 어떤 형태들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이 어떤 몰입이라는 것을 가정하는 스펙터클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타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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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ylum>: 스펙터클에의 간극을 구성하기REVIEW/Dance 2019. 6. 16. 11:14
▲ 라미 비에르 안무 , 키부츠현대무용단(Kibbutz Contemporary Dance Company) ⓒEyal Hirsch 조명을 쨍한 햇빛인 양 ‘쬐는’ 가운데 군집된 확성기를 단 사람이 소리 치는 첫 장면은 분명히 어떤 세계의 환유다. 분명 그것은 증폭되는 사운드와 함께 단연 부각되는 한 명의 지배자의 논리를 통해 명확해진다. 이는 장소 잃은 난민의 형상을 주조하고 재현하는 대신 그 군중과의 거리를 형성하는 지배자만큼의 안전한 거리에서 이들을 포획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들은 계속해서 사실 입체적인 세계를 재구성한다. 이는 어떤 처절한 현실이나 비판적 거리 두기가 아닌 끊임없는 공간의 변전 자체, 그리고 그 속에 포화된 개인들의 행렬을 통해 동시적으로 드러난다. 확성기는 배경 음악으로,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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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해링 <Deep Dish>: 이미지-스크린-사운드의 비동기성REVIEW/Dance 2019. 6. 16. 11:06
▲ 크리스 해링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극소를 잡는 카메라에 의해 사물들은 스크린에서 꽉 채워진 풍부한 세계를 구성한다. 실제로 미시적인 세계는 거대한 세계로 옮겨지는데, 이는 우주적 차원을 이룬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묘사 차원의 알레고리가 아니라 이 공연이 이를 알레고리로 제시하려는 의도 차원에서 드러나는 부분이다. 곧 행성들이 이루는 검은 그리고 적막한(아마 우리의 상상의 차원에서) 세계는 확대된 스크린에 의해 거대한 움직임-속도를 이루며, 현실 차원과 다른 세계를 지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유래, 아니 현실로부터 즉각적으로 추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것이 실재의 반영이라는 것과 매체에 의해 전이된 현실이라는 것이 양립하며 공연이 진행된다. 우리는 실재를 ‘거쳐’ 또 다른 실재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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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플레이스 #1> 정규연, 김성현, 정소희 안무 작업 리뷰REVIEW/Dance 2019. 6. 15. 16:24
정규연 안무, ▲ 정규연 안무 ⓒ조태민[사진 제공=모다페] 고깔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데, 이는 등고선의 형태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은 몸과 분리된 사물에서 나아가 사물들이 이룬 하나의 거대한 환경, 곧 자연의 상징물로 보이는데, 두 명의 무용수 사이에서는 의태 과정이 발생한다. 곧 한 명이 이를 쓰고 다른 한 명이 따라 쓴다. 이는 본다는 것, 그의 행위를 의식하고 내 몸에 입력하는 과정을 동반한다. 사실 이러한 공간에의 관계 맺음과 적응, (사물-몸의) 적용 과정은 공간의 반향에 대한 효과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이를 하나에 다 접어 한 번에 다 쓰고 가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이는 어떤 사물들을 가지고 노는 의미 없음의 견지에서 상상에서 비롯된 유희로도 보인다. 그러니까 여기서 프로그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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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애순 안무, <HereThere>: 개별적인 것들과 뒤섞임의 무늬REVIEW/Dance 2019. 6. 15. 16:06
▲ 안애순 안무 ⓒ조태민(이하 상동) 에서 우리가 보는 건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는 강강술래의 ‘전통적’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전통이라는 건 과거와 현재의 분리주의적 입장보다는 현재에 잔존하는 파편적인 과거를 상정할 때 유의미한 진단에 이를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그러한 형태는 현재에 있어 재탐문됨으로써 동시대적 위상을 갖는다. 이러한 현재는 그 자체로 다성부적인 존재들의 구성에 의거한다. 이것이 의 독특함의 한 차원을 구성한다. 하나의 원이 있고, 이는 하나의 방향으로 일정하게 돌며 피치를 올리기 시작한다―강강술래의 ‘전통적’ 형태. 하지만 다시 하나의 원이 있고, 그 원에서 한 명이 나와 다른 한 명을 향한다. 이것이 바로 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채워짐을 비움으로 바꾸는 움직임이 뒤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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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DP] <사이>, <Knock Knock> 리뷰REVIEW/Dance 2019. 4. 24. 17:46
LDP 무용단의 작업들을 조금 단순하게 결정화하자면 ‘움직임들의 향연’이랄까. 많은 무용수가 대극장에 동원되며 그들은 제각각의 움직임을 추구한다. 이들은 어떤 비슷한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되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춤을 춘다. 곧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느낌을 주지만 그 안에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듀엣이나 그룹으로 곧 확장되며 개별 움직임의 유려함들 역시 종합된다. 사실 이런 파편적인 움직임들은 순간적인 미적 표상이며 곧 사라짐이다. 이는 어떤 안무의 반복적 코드를 구성하는 단편이 아니다. 곧 끊임없는 움직임의 선형적인 나열에 가까우며, 움직임에 있어서 시간의 구조적 내러티브를 만드는 대신 어떤 스타일들이라는 느낌으로 수렴됨에 가깝다. 이는 어떤 주제 의식을 전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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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XXY, 〈여기에는 메데이아가 없습니다〉: 재현으로서의 표현REVIEW/Theater 2019. 3. 12. 15:14
▲ 프로젝트 XXY, 〈여기에는 메데이아가 없습니다〉 공연 사진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두 가지 재현이 있다. 타자의 재현과 연극의 재현. 우선 배우들은 타자를 유형화하고 다시 타자를 연기한다. 곧 타자는 이방인이거나 여자이거나 장애인이거나 하는 식의 제한된 도식으로 한정된다. 연극은 스테레오타입적 편견으로서 타자를 불러들이고 이를 연기함으로써 편견을 복제, 재생산한다. 재현 이전에 재현이 있다. 한편 이는 오디션이라는 형태를 통해 각 배우의 역량을 시험/실험하는 표현형이 된다는 점에서 창의적 지지대가 되며 재현은 이제 재현을 하는 이, 재현에 접근하는 이 자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변환된다. 연기를 통한 재현에의 접근은 경쟁과 평가의 규준에 따라 과도함을 향해 치닫고, 연극의 장식성은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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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애순 안무 <평행교차(Parallel Cross)>: 전유, 도상, 배치REVIEW/Dance 2019. 3. 12. 15:08
1.말의 감각▲ 안애순 안무 , 2018 창작산실 / ⓒ옥상훈 (이하 상동)‘동작과 동작을 잇는 것’, 다섯 명이 이를 수행하는 것, 단순히 말하면 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움직임은 무목적적인―그 자체가 목적인―동시에 미적인 기호나 코드로도 읽히지 않았다. 여기에 하나의 선언이 있다. 과연 드라마투르그 역할의 장혜진이 무대에 등장해 먼저 쓰인 춤을 동시에 다시 명명하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지만 여기서 말은 일단의 청각적 매체로 분류될 수 없고, 춤과도 엄연히 분리될 수 없다. 언어는 춤과 분리되는 매체가 아니라 춤을 규정하고 구성한다(이른바 ‘말은 감염의 매체이다!’). 움직임을 구분 동작으로 분쇄하고 어떤 구분 동작이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것으로서, 춤은 인식과 느낌의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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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정무용단 <매스? 게임!(MASS? GAME!)>: ‘포스트모던으로서의 혐의’REVIEW/Dance 2019. 3. 12. 14:56
▲ 장은정무용단 포스터거대한 높이로 쌓은 플라스틱 구조물 아래 제대로 제어되지 않는 신체의 대조는 작품 전반을 지배한다. 간간이 울리는 안정화(stabilizing)라는 경보는 강박적이고, 주체의 불완전한 포섭을 강제한다. 그러니까 이러한 신체는 매끄럽게 움직이지도 온전한 중심을 지지받지도 않는다. 사실상 이러한 가시적인 물리적 대비, 거대한 구조물과 신체의 부조응적인 조우가 드러내는, 시스템 아래 포획된 신체는, 중첩된 사운드 레이어로써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예컨대 일종의 신체를 육화하는 현과 그것을 뒤덮는 전자음악은 이런 두 층위를 간극으로서 드러낸다. 신체들은 일종의 게임의 룰을 따른 전자음악의 일정한 박자로 움직이고 라이브 리듬은 이것을 가르며 그 자체로 신체의 부분들로 자리한다. 한편 ‘가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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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하이타이>(작/연출: 김명환): 역사와 진실이 갖는 무게…REVIEW/Theater 2019. 3. 12. 14:46
▲ 작/연출: 김명환 공연 사진 [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 (이하 상동)(작/연출: 김명환)는 혼자 무대의 모든 시간을 채우는 일인극으로, 배우 김필은 프로야구 최초 응원단장으로 광주 해태 타이거즈의 호루라기 아저씨로 유명한 ‘임갑교’를 분하는데, 임갑교 분이 응원 관련한 생생한 일화를 포함해 아내와 아들이 죽음을 맞았던 굴곡의 역사를 연기한다. 실상 여러 역할과 신이 존재하는 일인극의 경우, 배우의 연기는 과도함과 소진을 낳게 되어 있다. 이는 무엇보다 에너지/신의 치밀한 분배와 계산에 따른 것인데, 배우가 느끼는 피로를 배우와 같이 느끼는 관객은 그 피로로부터 (벗어나) 어떤 지루함과 지겨움을 느낄 소지 역시 크다. 또는 그 한 명에 정박된 몸, 아니 무대의 제한적 다양함 속에서 배우에 대한 인정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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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라마비방씨어터 <언 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장치(로부터)의 서사REVIEW/Theater 2019. 3. 12. 14:33
▲ 디오라마비방씨어터(송주호 연출/무대디자인), (2019) 연극, 90분,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 (사진: 김진호) (이하 상동)극장 로비 공간은 주요한 무대가 된다. 아니 이것은 ‘거의’ 무대의 전체이다! 여기서 극장의 로비를 재현/수행하는 무대 공간이 실질적인 무대가 된다는 것은 전도된 발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질적인 무대는 끝끝내 비가시화되어 나타나지 않는 가설의 무대라는 것―이것은 곧 중대한 스포일러!―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무대는 저 바깥에서 펼쳐지고 이곳은 로비 공간으로서 극이 전반적으로 펼쳐지기 이전의 전 단계로 보게 만드는 것은, 사실 이 작업을 보며 겪는 크나큰 혼동이자 믿음이다. 곧 극장이 진짜/다시 열리기 전에 뭔가 밋밋한 것 같은 극의 지난 밀도는 이제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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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안무 <자조방방自照房房>, 의자-신체의 불문율적 세계와 예외적 순간REVIEW/Dance 2019. 3. 12. 14:21
▲ 김혜경 안무 공연 사진 ⓒ 윤석무 의자는 신체와 닿는 움직임의 첫 번째 평면이자 신체의 연장이다. 김혜경 안무가/퍼포머는 의자와의 관계 맺음을 통해 안무를 구성한다. 의자는 하나의 공간이자 신체가 된다. 곧 신체는 그 위에서 현존하며―때로는 그 위에서 노닐며―그것과 접착되어 지속된다. 의자는 네 발로 땅을 딛고 서 있으므로 두 발을 뗀 상태에서 균형을 잡고 있던 김혜경의 첫 번째 시작 장면은, 위태로운 의자의 균형과 그것을 유지하는, 곧 의자의 균형을 위태롭게 하며 의자의 동적 균형을 보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자와 신체가 가까워질 때 곧 의자로 신체의 균형이 쏠릴 때 의자와 신체는 모두 아래로 고꾸라질 위험에 처하며 동시에 신체와 의자는 하나의 신체를 이루게 된다. 반대로 의자와 신체가 멀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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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임 안무 <넛크러셔(NUTCRUSHER)>: ‘균열적인’REVIEW/Dance 2019. 3. 12. 13:59
▲ 허성임 안무 공연 사진 한껏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것. 이것이 거의 전부라 할 안무는 필시 소진을 향해 가고, 소진의 변증법이라 할 뻗음과 침묵의 영원으로 수렴해 간다. 세 퍼포머는 마치 크로마키 기법을 시현하기 위한 신체 전체를 감싼 의상에서 출발해 하나씩 그것을 벗고 나체화된다. 가린 의상과 더불어 이들은 시종일관 얼굴을 돌리고 있고 따라서 신체의 대상화는 역으로 전도되어 불편한 감각을 맺히게 한다―시선이 지배할 수 있는 건 시선을 돌린 얼굴과 신체 양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배할 수 있는 신체가 아닌,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자체 동력의 신체들이고, 이는 박자를 세는―주로 허성임이 중간에서 그 역할을 전반적으로 가져가는 듯 보인다―행위로써 이 움직임은 반복되어야 한다.이 박자는 이 안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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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시>, 분위기와 표면의 이질적 종합REVIEW/Music 2019. 3. 12. 13:52
▲ 국립창극단 신창극 시리즈 3 공연 사진 [사진 제공=국립극장] (이하 상동)하늘극장의 열어젖힌 구조를 는 고스란히 가져가는 편이다. 블랙박스를 지향하지 않은 무대는 대낮 같은 밝음에 각종 사물들과 인물들을 노출시키는 전략을 펼친다. 시적 대사, 가사라는 것이 제목을 표면적으로 보증해 주는 반면, 실질적으로 그 넷은 어떤 캐릭터를 정의하지 않고 그 내용을 신체적으로 전달해주는 데 그친다는 점에서 일종의 순수한 매체 자체에 가까우며, 이는 다시 네 배우/창자의 실제 인물에 대한 감상으로 수렴된다. 여기서 ‘시’는 그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규명하려는 내용이 아니라 네 명의 인물을 대등한 차원에서 분배/분리하는 측면에서의 텅 빈 형식에 가깝다. 따라서 관객이 정작 보는 것은 시적 대사가 만드는 서사가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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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하 <Philos> 연주회, ‘사색적 리듬의 흐름들’REVIEW/Music 2019. 3. 12. 13:40
▲ 박지하 정규 2집 음반 [Philos] 발매 쇼케이스 포스터[(1. 24.(목) 오후 8시, 장소: 벨로주 홍대(서교동 372-6)]처음 두 곡은 2015년 ‘박지하 : 자전적 소리의 기록’의 와 두 곡으로, 첫 번째 곡은 지속적으로 솟구치는 방향성을 가진 동적 이미지 배경이 박지하의 신체, 그리고 소리에 대비되며 결합하는데, 박지하의 숨이 뻗어나가며 공간이 구성되고, 소리는 그 자체로 공간에의 현존의 존재로 옮겨감을 보여준다. 두 번째 곡은 생황으로 연주되는 곡인데, 이를 부는 박지하의 신체가 흔들리며 소리가 증폭됨을 매우 가깝게 볼 수 있다(벨로주라는 콘서트장의 규모는 매우 작은 편이다).새 앨범 ‘Philos’의 세 번째 곡 은 바깥의 소리(노이즈 녹음 재생)가 연주가 중첩되는 방식으로, 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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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빈댄스 <Hidden Dimension>: 어떤 서사로의 출구 전략REVIEW/Dance 2019. 3. 12. 13:35
▲ 유빈댄스 포스터서사는 표면에 있는가 혹은 배면에 있는가. 질문을 바꾸어 본다면 서사는 움직임 이후에 있는가,아님 움직임 이전에 있는가. 서사는 시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진행 가이드일까. 아님 움직임을 읽어내는 움직임과 길항 작용을 하는 최소한의 장치일까. 안무가 이나현이 구축하는 즉물적인 몸의 양태는 동적 시간의 마디 속에 이뤄진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시간을 갖는다. 그런 반면 서사는 그 위에 쓰인 간결한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한 상징 코드들로부터 성립한다.따라서 이는 움직임들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는 대신 붕 떠서 몸의 충만을 결락으로 보충한다. 곧 이나현은 순간들이 이룬 하나의 덩어리로써 일정한 동시에 일반적인 극무용의 무대 시간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짜임, 곧 50분 이상의 길이, 메시지와 주제를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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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무용단 픽업스테이지 <쓰리 스트라빈스키>: ‘음악으로부터의’ 무게REVIEW/Dance 2019. 3. 12. 13:28
▲ 쓰리 스트라빈스키_김재덕 안무 연습 장면, ⓒAiden Hwang [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 (이하 상동)‘음악에 조응하기로서의 춤’, 세 명의 안무가의 작업은 반드시 이렇게 묶여져야 했을까―거기에 나이(세대) 역순으로. 이는 애초 이 기획 자체에서 음악이 모티브가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동일자로서 스트라빈스키에 대한 명명은 춤이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음악의 최종 구현의 형태로서 춤은 음악에 대한 춤의 강박적 조응을 전제한다. 마치 여기서 음악은 온전히 보존되어야 하는 듯하다―춤을 통한 변환이나 사라짐이 아닌. 춤은 음악(적)으로 번역된다.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이 보통의 프로시니엄 아치 전후가 아닌 무대 뒤쪽에 배치됨으로써 음악은 희미하게 공간을 침투하려는 가운데, 이는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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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ance2018] 테로 사리넨 무용단 <숨>: 착오적 매체 특정적 작업REVIEW/Dance 2019. 3. 12. 13:08
▲ 테로 사리넨 무용단 ⓒMikki Kunttu조명(테로 사리넨의 모든 작품의 조명 디자인과 비주얼을 담당해온 무대 및 조명 디자이너 미키 쿤투Mikki Kunttu), 연주(아코디언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킴모 포흐요넨Kimmo Pohjonen), 움직임(테로 사리넨Tero Saarinen)의 세 가지 매체가 교차하며 연합하는 형태의 공연이 보여주고자 한 최종적인 바는 상이한 요소들이 갖는 효과 측면으로 환원되기보다 신체 자체가 무대 전체로 연장, 증폭되는 형태에 초점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와중에 세계를 사라지게 하고 순간으로 나타나(게 하)는 오직 그 자체의 현존만을 나타내는 조명의 온오프를 물리적인 조건 아래 있는 어쩔 수 없는 예외적인 순간으로 본다면, 공연은 소리, 음악과 움직임, 무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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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담론의 작은 역사: 2013-2016Column 2019. 2. 12. 14:25
안대웅 이 에세이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벌어진 세대 담론을 살핀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평들이 이미 나왔지만, 나 또한 여기에 일정 부분 가담한 자로서 개인적으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럼에도 이 주제를 굳이 다시 꺼내든 것이 개인적인 이유만은 아니다. 세대 담론이 출몰하게 된 배경은 여전히 미술계에서 문제적이며, 이는 새로운 세대에 대한 주목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졌다고 본다. 이 글을 통해 살피고자 하는 것은 그 배경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과정을 살필 수는 없으므로 중요한 세 장면을 꼽았는데, 그것은 2013년 미술생산자모임의 토론회, 2014년 홍태림의 공장미술제 비판, 2015년의 ≪굿-즈≫와 신생공간이다. 앞으로 이 글은 세 장면의 연관 관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