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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용 안무,〈정글-감각과 반응〉: 스펙터클은 오늘날 가능할 수 있을까REVIEW/Dance 2023. 11. 6. 16:29
〈정글-감각과 반응〉은 무용수들의 꽉 찬 몸짓과 무대를 통해 과잉과 충만의 스펙터클을 향해 끝없이 나아간다. 비교적 밝은 무대 위에서 모든 무용수가 서 있고, 곧바로 음악과 함께 무대가 시작됨이 이를 선취한다. 붉은색 계열로 된 보색 대비의 천들이 얼키설키 누빈 원반 오브제가 무대 꼭대기에 달려 있고, 그 아래 붉은 조명이 “정글”의 분위기를 구성한다. 음악은 즉물적이고 직접적으로 신체를 강타한다. 브레이킹과 유연함이 뒤섞인 채 그 강도가 감축되지 않는 맹렬한 움직임은 강렬함의 정서와 동물적인 신체를 재현한다. 곧 〈정글-감각과 반응〉은 “정글”이라는 배경을 “감각”의 세기와 직접적인 ”반응“의 차원으로 구성한다. 이 외에 더 다른 수식과 묘사가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한 명이 그를 보는, 곧 관객과 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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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Dance 2023] ‘노화하는 몸’: 노화라는 옷 혹은 두께REVIEW/Dance 2023. 11. 6. 16:04
SIDance ‘노화하는 몸’은 비교적 나이가 많은 안무가들의 무대를 한데 모음으로써 노화하는 몸이라는 주제에 대해 즉물적인 재현의 관계를 만든다. 몸을 전면에 내세우는 무용이라는 장르에 있어 노화는 노장의 투혼이라는 어떤 수식어가 아닌 곧 주체의 생물학적인 감산이 아닌 다른 재현의 형식을 시도할 수 있을까. 이는 일종의 노화하는 몸을 아우라를 가진 주체로 치환하는 것이 아닌 다른 접근을 의미한다. 가령 제롬벨의 〈루츠 푀르스터〉(2010)의 경우, 피나 바우쉬의 부퍼탈 탄츠테아터에서 30년간 피나와 함께 활동했던 무용수 루츠 푀르스터를 무대의 일부가 아닌 전면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데, 사실상 움직임 자체를 충만하게 만드는 건 나아가 완성하는 건 허름한 무대와 그의 이야기다. 곧 움직임과 움직임 사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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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Lump of rice〉: 트랜스라는 파편들REVIEW/Dance 2023. 11. 6. 15:24
임은정의 〈Lump of rice〉는 서울남산국악당 극장이 아닌 야외 남산골한옥마을 마루에서 진행되었다. 세 명의 무용수는 의식을 지운/비운 상태로 누워 있고, 트랜스 상태를 예비한다. 임은정은 엄밀하게 동작을 구조화하기보다는 분위기의 구조를 구성하려 한다. 그 안에서 퍼포머의 역량은 제각각의 개성과 고유의 시간성을 띠고 드러나게 된다. ‘쌀더미’라는 뜻의 제목은 이런 뭉뚱그려진 몸이 파편적으로 차이의 몸으로 확산되어 갈 수 있음을 잠재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에 맞춰 영상 작업인 〈우리세계〉(임은정, 〈우리세계〉, 2023,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2분.)가 야외에서 상영되고 있었는데, 죽은 듯한 더미와 나지막한 움직임과 사운드를 광각의 배경 아래 얹힌다는 점에서, 그것은 다분히 숭고함과 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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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틀리스 무용단(Restless Dance Theatre), 〈노출된(Exposed)〉: 재현 불가능한 혹은 재현 너머의 현존REVIEW/Dance 2023. 11. 6. 15:00
테크닉은 신뢰와 직결된다. 자연스러움과 매끈함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으며 하나의 계열이라는 믿음이 그것에 따라붙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있는 레스틀리스 무용단의 〈노출된〉은 그러한 전제로부터 요동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몸짓 자체를 추종하거나 그 몸짓이 향하는 의미의 계열을 구성하기 위해 몰입하지만, 그 몸짓을 의심하지는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레스틀리스 무용단에서 움직임은 그런 차원에서 몸짓에 선행하는 것, 곧 몸 혹은 감정이 몸짓 앞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는 드러낸다(exposed). 따라서 극단적으로는 몸은 멈추거나 해서 강조되고 감정은 연기되는 데서 나아가 폭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몸은 몸짓에 선행하고 감정은 몸짓을 앞지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무용수가 옷을 걷어붙이고 맨몸을 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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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동 안무, 〈리듬의 측〉: 움직임이 곁에 머무는 방식REVIEW/Dance 2023. 9. 12. 00:35
〈리듬의 측〉은 하나의 평면에 속한 ‘사회’적 존재들을 가시화한다. 이는 개인을 초과하는 거대한 배경을, 이를 부분으로 축소하고 해체하는 개인의 주체적 역량을 동시에 지시한다. 이는 그 사회가 유기적인 질서와 통합된 풍경으로서 존재하거나 긴밀한 관계들의 연속으로 진행되는 곳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오히려 존재는 우연적이며 우연에 의해 존재가 탄생한다. 무작위성이라는 ‘원칙’은 질서와 규칙, 상승과 하강의 흐름이 부재함을 의미하며, 단지 움직임의 차이와 반복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환경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가장 평평하고 창발적인 장이 된다. 그렇다면 이는 동작에 대한 충실도를 요청하는가. 아님 그것이 하나의 환경이라는 명제를 내세우는가. 곧 형식으로 그치는가. 아니면 어떤 이념을 내포하는 것인가. 〈리듬의 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