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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장현과친구들, 〈GRAVITY〉: 변경된 세계 위의 부유하는 물질로서의 몸REVIEW/Dance 2025. 3. 5. 00:05
▲ 류장현과친구들, 〈GRAVITY〉[사진 제공 :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상동). 〈GRAVITY〉는 중력이라는 지구의 기본적인 물리적 힘의 자장을 주제로 가져가는데, 그것은 물리적이고 자연(과학)적 진리이자 지구 전체에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하나의 힘으로 적용되며 일상에서 의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력 자체를 지시한다고 할 때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지구 바깥의 영역, 힘, 곧 중력이 닿지 않거나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지점을, 그리고 거꾸로 중력과 관계 맺고 있는 지구상의 여러 존재를 가시화할 필요가 있다.
이는 〈GRAVITY〉에서, 각각 물리적 차원에서―‘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힘이다!’―, 그리고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보이지 않지만 하나의 영향권 아래 존재들이 종속된다.’‘, 중력이 서사로 연장되어 감을 의미한다. 중력을 상정하기 위해서는 비중력적인 조건, 중력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존재들의 매개가 필요한 것이다. 전자에 있어 공중을 부유하는 물질, 진공처럼 뜨는 사물을 통해 물리적 영역의 다른 조건을 신비하거나 놀라운 것으로 가시화된다면, 후자는 그 영향받음을 하나의 실존적 영역으로 갈음하고자 하는 가운데 드러난다.
결과적으로, 〈GRAVITY〉의 주안점이 중력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중력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리고 중력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것 역시 중력에 대한 사고가 반영되는 것이라면, 중력은 하나의 사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춤은 중력을 하나의 메타포로 구성하는 것, 하나의 서사로 전개해 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역으로 중력은 하나의 서사를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의 메타포가 될 것이다. 예컨대 “모든 것을 연결하고 제자리에 붙들어 주는 힘의 상호작용”으로서 중력을 “춤의 작용 거리를 확장”하는 메소드로 연장하는 것이다. 또한 중력은 “삶의 무게”(류장현)라는 하나의 메타포로 갈음되며 매개된다.
직접적으로 몸은 그리고 춤은 중력의 영향을 받는 인자이며, 중력을 그로써 나타내는 매개가 된다. 이는 나아가 중력이라는 메타포가 구성하는 (다른) 세계를 접근하고 접촉할 수 있게 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몸은 그리고 춤은 자율적이다. 이는 타율적으로 자리하는 몸을 연기하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연극적인 형상으로 나타날까. 그렇지 않은데, 거기에는 사운드라는 절대적인 구성 요소의 전제가 있다. 불가능성을 띤 가시화의 작용은 곧 사운드를 통해 드러난다.사운드는 바람과 철물을 그야말로 오가며 그 어떤 것도 명확한 분별의 개별 요소로 구성하지 않는다. 사운드는 폭력적이고 절대적인 영역으로 그야말로 분사되고, 몸은 그것의 영향권 아래, 스쳐 지나가는 파편들이 된다. 결과적으로, 사운드라는 형상을 입고 중력은 세계를 분산시키며 몸은 급진적으로 접히고 펼쳐지는 식으로 가동된다. 중력은 ‘직접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춤은 선적인 것과 탄성적인 것의 배합이다. 또한 힘의 급격한 변환에 따른 또 다른 움직임을 합성하는 것이다.
선적인 것은 주로 팔과 스텝의 유려한 펼침으로 드러난다면, 탄성적인 것은 둔탁한 몸의 중심과 그 힘으로 드러난다. 선적인 것이 주가 될 때 몸은 힘의 유동성, 주체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매체인 반면, 탄성적인 움직임에서는 몸은 힘이 정체됨을 보여주는데, 스텝을 기준으로 그 중심에 붙잡히는, 팔을 동반한 상체 움직임은 이제 휘청거리거나 힘을 뺀 무기력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 둘은 ‘급격하게’ 접합되어 있다. 이원 분리적인 몸, 선적인 것이 그리는 화려한 반경과 그것은 언뜻 아래로의 힘에 몸을 빼앗겨 버린, 아래로 흡착되는 신체라는 전제를 가시화하는 것 같다. 곧 더 나아감, 그리고 덜 나아가게 됨의 두 가지 형상은 모두 어떤 힘, 가시화되는 중력이라는 힘―어쩌면 그것의 부재함―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발레나 무술과 같은 유려함, 힙합이나 토속적인 리듬 같은 신체 가동의 움직임이 종잡을 수 없이 합성되어 지나간다. 이는 시간축의 가속을 또한 의미하는데, 사운드는 무대로 방사되는 가운데, 세계는 안정화될 수 없는―그 사운드 아래 사물들이 식별될 수 없이 마구 들추어지고 다시 변경되는 것처럼―, 가속되는 엔트로피의 영역으로 남는다. 이는 거꾸로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 모든 것들이 지구로부터 부상하는, 그리하여 마구 뒤엉키고 부딪히는 영역을 상상하게 만든다.
〈GRAVITY〉는 초반, 사운드와 몸을 동기화시키지 않음으로써 사운드의 실재적 영향력을 확인시키고, 몸은 그것에 조응하고자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론 궁극적으로 동기화는 (고정된 재생 값인) 사운드에 맞추는 몸에 달려 있기보다 그 둘을 함께 듣고 보는 관객의 몫이다. 이 둘의 간격이 보여주는 건 세계가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곧 상징계적 질서는 분열되어 있다. 선과 탄성의 합성된 춤은 마찬가지로 그 둘의 간격을 가속의 범위 아래 봉합한다. 그로 인해 불안정한 춤은 사운드의 효과에 의해 도무지 ‘포획’되지 않는다.사운드가 해체하는 실재의 사물들은 파편으로 잠깐 머물고 사라지는 몸들로 적용된다. 몸들이 해체되는 순간을 멈추는 순간, 곧 하나의 무리로 종합되는 순간은 음악이 자신의 중심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음악은 실재의 파열음 속에 안정화 기제로서 일정한 흐름과 단위를 지정하는 음들을 내재적인 것으로 도출해 낸다. 이에 따라 몸들은 둘씩 짝짓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럼에도 실재의 사운드는 파편화 작용을 여전히 지속시키는데, 이들이 하나의 집단을 구성하는 건 더 큰 외부의 힘이 가시화되는 순간에 이르러서다.
성화를 들고나오는 몸, 성화가 조금씩 연기로 바뀌고 나타나는 어둠 속 UFO 형상, 이처럼 강력한 외부의 힘을 매개하는 것은 회전판 위의 정지된 신체들인데, 힘은 이처럼 앞선 파편화된 인자들의 고립에서 집단의 신비주의적 의식의 고취로 연장된다. 그렇다면 중력의 매개에서 중력이라는 메타포, 곧 중력 자체가 매개하는 건 어떤 세계인 것일까. 이는 세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그 세계 내 의식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다.
사운드와 음악이 멈추는 구간, 세계가 잠재워지는 순간, 마침내 몸은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접촉이 가능해진다. 이는 바닥에 닿는 소리를 만들고, 그전까지 몸은 세계에 안착되지 못했음을, 부유하는 존재들이었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로써 몸은 공기 빠진 풍선 같은 것이 되는데, 어떤 무게가 거기에 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중력이 바람, 공기와 그 바깥의 사물과의 충돌, 결합, 간격으로 드러나는 처음의 사운드를 상기했을 때, 마찬가지로 몸은 부풀려짐과 바람이 빠짐 사이의 어떤 것으로 자리한다.
짐볼 크기의 풍선을 배에 품고 나오는 여자들, 그리고 몸 이곳저곳 울퉁불퉁 튀어나온 풍선들로 변용된 남자들이라는 순차적인 진행은, 자연스러운 성과 돌연변이적 신체를 가진 성의 변이를 비교해서 보여준다―자연의 기호와 비-자연의 기호. 사라졌던 여자들은 한 명씩 등장해 남자의 튀어나온 부위를 만지고 이후 자신의 치마폭으로 한 명씩 남자를 품어내는데, 이로부터 향락이 여자들의 목소리에서 발현된다.짐볼 크기의 헬륨풍선은 그 자체의 독자적 생명력을, 춤을 시현하는데, 이는 무대에서 SF적 이미지를 창출한다. 풍선의 춤은 중력을 가볍게 거스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다분히 만화적이며, 그 경로를 지정하거나 예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그로부터 ‘쪼그라든’ 인간이 튀어나오며/탄생하는 것 역시 예측 불가능하며 만화적이다. 또한 그 형태 차원에서 역시 그러한데, 바로 그것이 긴 타원형으로 쪼그라들며 팔과 다리와 같은 변형된 기관들의 전이를 일시적으로나마 구성하는 부분이다. 이는 사후적으로 앞선 변형된 신체를 해석할 수 있는 단서를 준다. 이는 중력이 일정하게 작용하지 않을 때, 다르게 작용할 때 신체의 다른 확장 혹은 수축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독자적인 경로와 형태, 움직임은 결과적으로 하나의 춤의 명제를 낳는다. 중력이라는 것의 전제를 제거할 때의 춤, 나아가 인간적이지 않은 어떤 춤, 그것은 극단적으로 원시적인 무엇이거나 미래적인 무엇이다. 결국 〈GRAVITY〉는 시간을 지정하지 않음으로써, 어떤 세계의 상을 만들어낸다. 기괴함이 주는 익숙함과 놀라움은 재현적인 반면, 불안정한 서사로 환원된다는 점이야말로 진정 기괴한 것이다.
〈GRAVITY〉는 서사를 만드는 대신에, 서사가 실패하는 지점, 서사가 탈락하는 구멍을 만든다.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을 파편화시키거나 부유하는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주체와 사물을 분기시키고 확정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애초 사운드에서 사물들의 아귀다툼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이, 중요한 건 그 사물들이 무엇인지, 사물들이 어떤 발화를 하는지가 아니라, 곧 어떤 컨텍스트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충돌하면서 이지러지는 세계의 파악할 수 없음, 불가해함 자체에 소속되는 것이다.
마구 움직이는 바람 빠지는 풍선의 형상과 같이, 멜로디를 구성하며 드라마를, 심리를 생산하는 피아노 연주가 도입되지만, 피아노 연주는 끝에서 뭉개진다. 곧 음악의 선율이 아닌, 일종의 사물(과도 같은 매질)로서 사운드가 자리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세계 내의 변경이 아닌, 세계 자체의 변경은 일종의 상상계적 영역이며, 만화와도 같은 느낌, 유머를 선사한다. 〈GRAVITY〉는 막상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웃음보다는 기괴함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핍진한 무엇이면서, 그럼에도 기괴한데, 그것이 여전히 현실을 시험하기 때문이다.〈GRAVITY〉의 서사는 결국 보이지 않는 힘을 어긋나는 세계, 변형된 신체, 사물의 독자적 움직임 등을 통해 발산하며 일상과 현실을 비틀어 낸다. 후반부에서, 세계는 전면부로 옮겨오며 끈적거림을 통해 또는 공이라는 하나의 중심 기호를 통해 하나로 연결된 것으로 그려진다. 곧 세계는 드러나고 그 안의 것들은 그 세계에 내속한다. 먼저 스모그의 발생과 몸들의 엮임은 몸과 땀으로 연장된다. 몸들은 더없이 가까워졌으며―그들 관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일종의 사물처럼 광폭한 세계로부터 튕겨 나가던 시작을 비롯해, 주로 무대 안쪽에서 저 먼 세계의 이미지를 구상하던 것에서 비로소 현실을, 관객을 직시하며 세계 내 감각으로 연장된다.
다음으로, 무대 뒤편의 장막이 열리고 나서 등장한 풍선은 팔루스적 기호로 자리하고, 몸들을 매개하며 현실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다. 짐볼처럼 보이는 풍선-공은 중앙부에 떠 있고, 그 뒤로 도열한 몸들은 한 명씩 그 띄움을 유지하며 바통을 넘긴다. 흔한 마임처럼 보이는 이 사물과 동작의 결착으로 발생하는 환상의 영역은, 결국 한 명만 남게 되고, 풍선이 온전히 떠 있는 광경에 이를 때 비틀린다. 이러한 환상을 유지하기 위한 몸들의 복무는 실제 그 환상이 실재임을 은폐하기 위한 것으로, 이중의 속임이 있는 것이다.중력을 벗어나는 사물의 영역은 인간의 몸과 대별되는 독자적인 몸짓을 제시한다. 이 환상 바깥에는 실재의 몸이 있다. 환상을 유지시키는 건 몸의 매개인 반면, 이 몸은 기존의 몸과 다른 것이라고, 새로운 것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건 그 환상의 영역이다. 거기에는 앞선 여러 사물들이 자리한다. 실재의 사물로서 사운드, 곧 배경음으로 녹아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형상화하고 지배하는 사운드, 세계의 경계를 지시하는 스모그, 연기, 어둠, 회전하는 세계, 그리고 여러 크기의 공들, 풍선의 자율적 움직임, 세계는 그렇게 몸의 바깥에 있고, 몸을 그 세계 내로 편입시킨다.
그로부터 세계의 지층이 달라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몸들이 있다. 그것은 그 외부의 사물들에 조응하지만, 실은 비틀리고 뒤틀리며, 가속하고 늘어지며, 엉겨 붙고 흩어지며 놓이는 독자적인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 세계의 변경을 표하는 몸은 존재의 차이, 주체의 해석 이전에 자리하는, ‘특정한’ 세계에 좌우되는 어떤 사물들이다.
그럼에도 어떤 연결들, 관계들, 의식들은 그 세계에 대한 해석, 그리고 그 속에 자리 잡는 존재의 정체를 희미하게나마 드러내려는 듯 보인다. 반면, 그 몸에 닿는 사물들의 감각과 함께 그 사물들을 비추어내는 몸은 세계 내의 존재가 아닌, 그 세계 자체에 닿아 있는 존재, 그 세계 자체를 현시한다. 따라서 세계는 무대에 불포화되고, 잔여로 계속 축적된다―이는 서사의 유기성, 서사를 보는 의식의 흐름을 모두 기각한다.〈GRAVITY〉는 그 잔여의 것들을 표현하는 어떤 사물로서 몸을 보여준다. 그 잔여는 의미적으로 특별하며 이미지적으로 특이하다. 그 산출의 힘은 당연히 ‘중력’과 같은 어떤 특정한 힘을 전제한다. 맨 처음에, 어둠 속에 드러나는, 앞으로 쏘이는 작은 점 같은 크기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하강하며 등장하는 빛의 시퀀스에서, 그 빛 역시 하나의 사물로 볼 수 있다. 그 역순으로 다시 극은 닫히는데, 빛은 세계의 탄생을 그리고 소멸을 표시한다. 결국, 증폭과 수축의 지속적인 변이의 흐름을 표현하는 구는 작품의 중심 오브제로 자리하며, 〈GRAVITY〉가 우주적 상상력의 서사를 완성한다. 곧 중력은 중력 바깥의 시간과 장에 의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작고도 명확한 구는 또한 사물의 움직임이고, 이후 사물의 움직임을 가장하는 몸의 움직임으로 이어지는데, 곧 가장 작은 원 또는 공에서 점점 커지며 신체와 결착되고 또 다른 신체가 되어 버리는 이 구(=공)의 다양한 변이 가운데, 〈GRAVITY〉의 중심 움직임―비록 그것이 처음 휘발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차원이고 중간에 잠깐 연장되고 단락됨으로써 주요한 것이 아닌 것처럼 휘발되지만―을 상기하면, 결국 그 선적인 것과 탄성적인 것의 이 ‘새로운’ 움직임은 각각 공의 제멋대로의 경로, 그리고 공이 가진 탄력의 한 부분이 아니겠는가.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참고로, 이 글은 작업의 문제의식에 대한 접근으로부터 움직임에 초점을 맞춰 접근한 글로, 함께 참조할 수 있는, 《몸지》 3월호의 원고가 작업에 대한 가치 판단과 가치 판단의 재고 차원에서의 관점을 강조하며, 조금 더 명료하게 쓰인 데 반해, 조금 더 상세한 묘사와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5.02.07 ~ 2025.02.09. 금~토요일 19:30 / 일요일 16:00
공연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관람등급: 만 13세(중학생) 이상
관람 시간: 80분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안무·연출: 류장현
출연: 공지수, 기자욱, 김민서, 김태현, 박정휘, 백진혁, 오진민, 이수연, 이진우, 장보경, 최태현, 홍은채
프로듀서: 김난수
드라마투르그: 염혜원
조명 디자이너: 강지혜
의상 디자이너: 배경술, 박예진
무대감독: 김인성
음향감독: 김경남
소품 디자인: 옥주
특수 소품 디자인: 임재헌
기획: 코르코르디움
공연소개
당신의 만남과 운명은 중력의 영향 아래 있다
[작품 소개]
중력은 별과 행성을 만들고 모든 생명을 인도한다. 우주의 모든 조각을 붙들어 매고 연결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중력은 두 물체가 주고받는 것에서 비롯한다. 하나의 물체는 힘을 만들 수 없다. 〈GRAVITY〉 는 모든 것을 연결하고 제자리에 붙들어 주는 힘의 상호작용으로 춤의 작용 거리를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서 ‘몸으로 체화하는 감각’으로의 전환. 여기서 발생하는 미세한 떨림과 울림을 통해 움직임의 시작과 끝은 삶의 모든 순간에 존재하는 힘의 궤적을 그린다. 이미 오래전부터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들이 우아한 춤을 추며 돌고 있듯이.
안무 노트:
삶의 무게는 보이진 않지만 존재한다. 그 무게는 생명을 포기하게도 하며, 또 다른 생명을 잉태하게도 한다. 이 무게를 감당하는 동안 우정, 사랑, 인연이라 지구에서 불리는 에너지 덩어리를 껴안고 오늘도 억겁의 시간을 달랜다.
존재의 원자를 만나기 위한 몸의 여행은 감당해야 할 무게와 선택해야 할 행위의 대가 사이에 걸린, 점과 점을 잇는 무수한 선들로 가득한 그곳으로 향한다. 그 어떤 것도 홀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우리는 연결되어있다.
기획 의도:
〈GRAVITY〉 는 ‘중력(Gravity)’이라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힘을 탐구하며 탄생했다. 중력은 모든 존재를 서로 연결하고 움직임의 근본적인 동력을 제공한다. 창작 과정에서 중력을 단순한 물리적 개념이 아닌 감정적, 철학적 차원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인간이 중력과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균형, 저항, 추락, 상승의 움직임이 주요 모티브가 되었다.
춤추는 무대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움직임과 빛이 대화하는 살아 있는 생태계며, 극장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춤의 이야기가 태어나는 자궁과 닮아있다. 그곳을 중력과 감정의 역학이 만들어낸 시적 장으로 전달하고자 한다.
단체 소개:
류장현과 친구들은 ‘몸 짓는 사람’ 류장현을 중심으로 구성된 창의적이고 실험적인 현대무용 단체로, “시대의 마지막 동굴 속 양자 에너지의 향연”이라는 철학 하에, “모든 존재는 무한한 잠재성을 지닌 다양체이다.”라는 생각을 춤을 통해 실천하고자 한다.728x90반응형'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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