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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 라우, 〈에브리우먼〉: 극장, 죽음, 공동체REVIEW/Theater 2024. 6. 5. 19:00
밀로 라우, 〈에브리우먼〉[사진 제공=국립극장] ⓒArmin Smailovic(이하 상동). 〈에브리우먼〉은 무대에 홀로 현존하는, 배우 우르시나 라르디의 전적인 매개의 위치를 상정하며, 스크린의 영상을 병치시키되 이 역시 라르디의 신체를 경유하여 재생한다. 〈에브리우먼〉은 휴고 폰 호프만스탈의 『예더만』을 가져오되(“예더만”은 ‘모든’과 ‘사람’이 합성된 하나의 단어로서, ‘누구든지’, ‘모두 다’라는 이 단어에서 영어로 man에 해당하는 부분을 woman으로 바꾼 제목이 〈에브리우먼〉인 셈이다.), 헬가 베다우라는 시한부 선고를 맞은 현재적 인물을 겹쳐 놓음으로써 죽음이라는 알레고리를 도덕적인 교훈극이 아닌, 하나의 수행사적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고자 한다.
처음에 나오는 음악은 라르디가 카세트플레이어의 정지 버튼을 누르자 사라진다. 이는 라르디의 바깥에서의 제어가 아닌, 무대 내부에서의 재생이라는 점을 일러주는 부분이다. 베다우는 영상으로만 존재하는데, 그는 2023년 1월 세상을 떠났음이 마지막 영상 크레디트에서 명시되지만, 영상의 사용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라르디와는 다른 현존이 필요했다고 보이는 부분에서 타당해진다. 곧 라르디가 베다우의 무심한 실존을 가시화할 때 이곳과 저곳의 차원은 분리된다. 베다우를 지켜보는 공동체의 차원은 베다우가 그 공동체를 의식하지 못하는 차원에서 연장된다. 후자로부터 전자가 도출된다.
다른 한편, 클로즈업으로 부각된 인물을 비롯한, 영상에서의 통제된 스튜디오의 환경이 주는 공백의 밀도와 대기는, ‘저 같은 사람이 영원히 살아있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식의 라르디의 발화와 심미적으로 합성되기에 이른다. 〈에브리우먼〉은 이러한 영상의 효과가 진실인 직함, 그리고 진실인지의 여부 자체를 판단하게 하는 데 이르지 않는데, 물이 필요하다는 베다우의 말에 라르디가 무대 바깥으로 나가고 이내 영상에서 둘의 대화가 진행되지만, 그 대화가 끝나기 전에 어둠 속에서 라르디가 다시 무대에 돌아옴을 다소 흐릿하게나마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베다우가 이미 죽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영상이 무대 위의 현존과는 다른 현존을 감각적으로 재생할 수 있음을, 곧 이 무대로 다른 차원을 수렴시킨다는 전제 아래 영상을 사용한다는 합리적 명분이 갖춰졌기 때문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말을 키웠고, 경주에서 다리가 부러진 말의 눈빛을 보게 된 첫 번째 죽음의 서사에서 시작해서, 〈에브리우먼〉은 후반, 그 말이 자신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서사로 나아가는데, 후자에서는 전자의 그 죽음에 대한 연민에 자신의 죽음을 투영해 새롭게 재의미화하며 전유한다. 공연이 끝나기 직전의 커튼콜을 기다리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는 라르디의 말과 같이, 공동의 집중된 현전으로서 〈에브리우먼〉은 극장의 진리를 구성하고자 한다. 죽음이 마침내 모두가 바라는 밤, 모든 존재가 평등하게 발언하고 그것들이 들리게 되는 어떤 밤과 같이, 특별한 극장의 순간‘들’이, 죽음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순간을 앞지르며 새롭게 죽음의 의미로 향하게끔 우리를 재구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적인 눈이 멀었기’ 때문에 ‘전혀 다른 새로운 무엇’을 필요로 하고, 그건 배우가 아닌 실재하는 사람의 생이 될 것이다. 베르우의 존재는 곧 무대와 무대 바깥을, 연극과 삶을, 삶과 죽음을 잇는 매개가 된다. 베르우의 죽음은 연극을 초과하고, 그 초과됨은 연극을 영원한 실재의 순간을 각인하는 공간으로 전환한다. 〈에브리우먼〉은 누군가의 죽음을 동원하지만, 그건 여전히 알 수 없는 순간으로서 죽음이 자리함을 드러내는 한편, 그 죽음이 그를 모르는 수많은 사람의 공동 현존의 애도로 거듭나게 함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라르디는 처음에 어떻게 극장에서 행동할 수 있을지를 질문했던 것을 다시 발화하는 것이나 단지 옆에서 다른 옆으로 걸어가는 것(피터 브룩의 『빈 공간』을 환기하는)이 좋았다는 말과 같이, 〈에브리우먼〉은 극장에서 배우가 연기라기보다 수행하고 있음을, 그 수행이 동기화되고 있음을 주지시키고자 하는데, 가령 마지막에 스프링클러로 떨어지는 물의 극적 효과의 예비적 선취 이외에 어떤 의미도 없는 것 같은, 바닥에 고인 흥건한 물의 정체는 사실 그의 스텝을 조심스럽고도 분명한 자취로 남기는 것에 가장 큰 효과를 내고 있음 역시 이와 연동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나아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긍정하는 말과 같이 무대라는 공간을 죽음과 등치하는 한편, 죽음을 지켜보고 있는 신의 존재와 누군가 그 죽음을 응시하고 있는 그 주변의 인간 존재를 합성시킴으로써 〈에브리우먼〉은 무대의 공-현존이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는 동시에 그 죽음을 맞는 이의 존재가 그 주변 존재에게 자신을 열어젖힘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말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시 호출되며, 자신의 두개골과 내장을 처음에는 그의 죽음을 초라하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던 파리에게 (‘재’)수여하기에 이른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출연 및 제작진
극본: 밀로 라우 / 우르시나 라르디
연출: 밀로 라우
제작: 샤우뷔네 베를린
공동제작: 잘츠부르크 페스티벌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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