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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음기관, 《기존의 인형들》: 인형이라는 물질로부터…REVIEW/Theater 2025. 3. 4. 22:39
▲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사진, 배선희 배우[사진 제공=조음기관] 《기존의 인형들》은 인형이라는 사물 혹은 대상으로부터 되먹임되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문을 전제한다. 작년 낭독 쇼케이스에 이어 이번에 본 공연으로 오른 ‘인형의 텍스트’라는 부제로 열린, 세 번째 ‘기존의 인형들’은 그동안 세 명의 작업자들과 함께해 왔으며, 제목이 가리키는 것처럼 ‘기존’의 인형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각의 출발점을 예비한다. 인형의 텍스트는 또한 인형으로부터의 텍스트이기도 한데, 이 두 사이에서, 세 개의 극작이 이루어졌다. 이는 인형의 존재론을 쓰는 일로 이어진다.
인형의 존재론은 곧 언어와 서사의 형상을 새롭게 정초하는 하나의 단초로(〈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 로봇(인형)과 인간(만)의 의사소통의 관계가 상정되는 시기에 대한 상상으로(〈범람〉), 시신의 직접적 환유로서 내가 맞이하게 될 죽음의 모습으로(〈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인형은 연장되고, 인형으로부터 서사가 탄생한다. 그리하여 서사는 언어는 정의되고 재구성되고 새로운 신화를 향해 나아간다.
안정민 극작, 〈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 메타 서사론▲ 〈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 (사진 왼쪽부터) 박서현, 정윤진 배우. [사진 제공=조음기관] 〈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이하 〈바늘구멍 속에서〉)는 반복되는 음악을 구성하는 치실 연주를, 곧 신체와 연결되는 그 환유적 감각을 인형의 분절된 신체 단위를 잇는 하나의 끈에 대한 공통의 메타포로 기입한다, 또는 체현한다. 인형의 신체는 인간의 신체로 옮아가며, 인간의 신체는 인형의 신체로 재구성된다. 인간의 “잔여물”이거나 “복사본”으로서 인형은 인간의 구성 요건을 사유하기 위한 매개물이 된다.
“연극”이 아니라고 정의하는, 연극임을 부인하고 “관객”이 아니라 “목격자”인 관객과 접면하는 이 연극은, 인형이 존재로 주어지는 현재의 장면을, 불가해한 현 상황을 인간의 연극이 아닌, (인간으로만 구성된) 관객의 그것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정의해야 함을 힘주어 이야기한다. 서사의 허구성은 그럴수록 더 절대적으로 커지는데, 인형의 분절된 신체들은 서사의 평탄함과 유기성의 틈을 상상하게 한다. 반면, 불완전한 서사, 다공성의 서사, 결말이 없는 서사는 서사는 ‘용납’될 수 있는가.
인형과 상대항의 기호로서 매끄러운 인간의 신체는 구멍 뚫린 신체의 서사를 무형의 존재의 죽음을 담은 하나의 서사로 갈음해 낸다. 장자의 혼돈을 다룬 편의 후반 인용이 그것인데, 구멍을 가진 인간의 정의로부터 인간을 분해―침을 분비하고 또 배설하는 존재―하고 해체하는 것에서 나아가, 인간만의 자의식이 가진 작위성과 그 반대편에서 인간에 의해 규정되지 않아야 하는 이형적 타자의 절대적 존재론 안에 인형을 겹쳐 놓음으로써, 신체는 이동하거나 변이된다.(사진 왼쪽부터) 정윤진, 박서현 배우. 〈바늘구멍 속에서〉에는 제목에서처럼 두 명의 인간 존재(박서현, 정윤진)가 등장하는데, 거울처럼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존재로 상정되는 둘은 먼저 등장한, 그래서 인형을 마주하게 되는 존재와 그 행위를 관찰하는 존재의 차이를 서사에 대한 각자의 정의 짓기의 차이로 연장해 가는데, 처음 둘이 인형을 처음 마주하게 된 자와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을 (사실) 의식하고 있는 자의 차이는 비교적 뚜렷하다.
존재론적으로 분기되는 둘의 교차적 직조로부터 전자를 인간(의 의식에 갇힌) 존재로, 후자를 인형의 목소리를 대리하거나 인형의 목소리 자체이거나 한 존재로 상정해 낼 수 있다. 이는 다시 서사에 대한 두 대립된 견해가 얽혀들어 가면서부터 한 명 또는 두 명―이는 무엇보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의 서사에 대한 탐문이 인간의 결여된, 존재에 대한 인식과 엮이기 시작한다. 이는 한편으로 반복되는 치실 연주에서처럼 인간의 분해 요소의 환유적 성질과 촉각적 접촉의 감각으로 서사의 내용과 매체를 규정하고자 한다.
〈바늘구멍 속에서〉는 결국 인형의 신체를 매개로 해 인간의 서사를 재정의하고 인간의 신체를 재분절하고자 한다. 인형의 존재론, 그것은 인간의 인식론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으며―인간을 보고 있는 공간 안의 비가시적인 누군가의 응시의 시선 역시 언급은 되지만, 정신분석적 작용으로 확장되지는 않는다.―, 또 인형과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신체적 자각과 재인식으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는 다시 말해 두 존재의 인식적, 신체적 연결이 있으며, 따라서 “조금 맛볼래?!”라는 후자의 존재의 대사는 인형의 신체를 환유하며, 인간의 촉각 작용을 체현해 낸다.
〈범람〉: 인간을 범람하는 인형-로봇의 존재▲ 〈범람〉, 김별 배우. [사진 제공=조음기관](이하 상동). 〈범람〉은 로봇과 인간만이 남는 어떤 시간을 미래로 상정한다. 그것은 파국이자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사시사철 푸르른 환경’에서 나무들의 제멋대로의 광폭한 움직임이 지구를 뒤덮는다는, 곧 범람한다는, 예측할 수 없는 비인간의 절대적 타자성을 전제하는 가운데, 다른 축에서 로봇이 등장하며 인간의 말동무가 된다. 로봇이 인간에게 우호적이거나 순전히 보조적인 대상인지도 식물의 움직임들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도 정확히 제시되지는 않는다.
다만 기설치된 정육면체 큐브 공간은 비를 피해 들어온 누군가의 집이자 내밀한 둘만의 안식처가 된다는 것, 어떤 휴식의 불안정성, 불안정한 상황 속의 예외적 휴식이 일어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공간의 절대적인 연극성을 추동한다는 것이 중요한 상황이 된다. 따라서 마지막에 이 집의 문을 열고 나갈 때 흙이 쏟아져 들어와 나갈 수 없게 되는 상황은 적절하(게 이 공간의 임시적인 절대성, 절대적인 임시성을 완성시킨)다.
〈범람〉에서 로봇, 인형의 언어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는 건 꽤 중요한데, 배우(김별)는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로봇은 구식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는 유행가들의 방대한(?) 아카이브를 기초로 한다. 이는 음악을 분절하는 일종의 디제잉 기법의 활용으로 연장된다. 이는 다시 인간의 문장 단위를 이루기 위해 사용된다. 로봇의 내부에는 디제이의 라디오가 내장된 셈이고, 그것은 분절된 조각들의 연결이자 짧은 단어들로 조각된 문장을 더듬더듬 발음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무엇보다 인간의 언어를 미숙하게나마 구사함으로써 인간과 상호소통을 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 우호적 존재의 행위이며,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그러니 인간 이상도 이하도 일단은 상상할 수 없는 인간과 같은 존재, 어떤 인간의 그것이다. 그 밖에 로봇의 (다른) 언어는 없다. 그럼에도 지지직거리며 로봇이 생명을 다해 가는 순간, 고철덩어리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애잔함이 동반되는) 순간의 단말마 같은 신음은, 로봇의 언어에 있어 신체의 내재적인 차원을 순전하게, 그리고 다르게 상기시킨다.
곧 앞선 유행곡들의 편집된 로봇의 언어가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트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러면서도 로봇 신체의 부분에 종속되고 있음을, 곧 카세트테이프를 트는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와 같은 음향 기기 자체의 작동과 같이, (스피커를 내장하지만, 스피커 자체의 제한된 출력을 가진) 본체의 속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로봇에게는 머리가 없다. 이는 나무의 머리가 뿌리이며, 그래서 머리가 묻혀 있는 나무가 왜 광란하는지를 알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땅으로 파묻었던 행위의 결과이다. 로봇은 그렇다면 호기심을 가진 존재이며, 탐구라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사유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이는 동시에 로봇이 인간의 형상을 닮았음에도 그 뇌의 위치가 머리에 자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손가락이 입력 기관, 곧 귀이고, 심장이 출력 기관, 곧 입, 스피커이다. 그렇게 나무의 생각도, 로봇의 생각도 묘연해진다.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존재이지만, 왜 그러한지, 그 사유가 어떤 것인지 〈범람〉은 말해주지 않는다.
〈범람〉은 SF적 상상력으로 미래를 끌고 오며, 이는 기후 위기로 지칭되는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유추된 하나의 판본이다. 여기서 인간에게 인류세 이후 기후 변화와 함께 찾아온 파국의 미래는 로봇이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고 닮아 가는 또 다른 특이점을 전제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지구상에 단 하나의 (유일한) 관계로 갈음되는 하나의 좁은 영역, 곧 무대 위에 펼쳐지는 것으로 가정함으로써 〈범람〉은 다른 존재/종에게서 구원을 찾으려는(그것이 관계를 맺으려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인간의 노력과 의지, 그리고 허무함을 인간의 언어를 인지하고 사용하는 다른 존재의 가능성과 양립시킨다.
곧 〈범람〉은 로봇을 최후의 인간 존재로 가정하며, 그것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음으로부터 인형과 상응하는 존재가 된다. 단지 듣고 말할 수 있는 기능만 있는데, 이는 특수한 인형의 기능에서도 착안할 수 있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이는 어린 시절의 상상계적 세계에서 성립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닐까. 〈범람〉의 로봇은 로봇의 기능들을 소거하며 인형화한다―인형에 최소한의 기능만 덧붙여 로봇이라 설정한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가진다는 점에서 미래를 체현하고, 불완전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의사소통의 절실함을 극대화한다.
여기서 그 언어가 대화의 가운데서 특수하고 일시적으로 성립하는 언어이면서도 오로지 인간의 음성들로만 이뤄지며 (우리가 ‘이미’ 아는) 과거의 문화 자산에 기반을 둔 것이라는 점은 (미래의 외양을 띤 현재의 극이 지닌 물리적 역설에 기반을 둔 것인 동시에) 더 이상 문화가 업데이트되지 않는 인류의 시점을 현재 우리의 상태로부터 연장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곧 익숙한 노래들은 낯선 시점을 현재로 구성하며, 극 너머의 현재와 합치시키며 동시에 낯설게 만든다.
〈범람〉은 현재와 너무 가깝다. 그렇다면 로봇의 이 언어는 마지막 순간에 남는 인간의 노스탤지어를 구현하는 고장이 난 라디오의 희미한 언어들일까, 인간을 가장한 AI가 주는 유사-안락일까, 순전히 미지의 타자적 존재를 보여주는 것일까.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인형이라는 연극의 지지체▲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 배선희 배우. [사진 제공=조음기관](이하 상동).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이하 〈무덤을 딛고〉)는 무대 중앙에 놓인 인형‘과 함께’, 그것‘으로부터’, 그것‘에게로’ 가는 공연이다. 흡사 주인공 마르타(배선희)의 게니우스와도 같은, 그것은 그의 혼,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는 비인격적인 부분의 총체이다. 〈무덤을 딛고〉는 하나의 서사시이며, 그 서사시를 한 명의 이야기꾼이 발화하며, 그 이야기꾼은 자신의 삶을 그 이야기로써 체현한다―그것이 그 자신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진실이며, 그것이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현재성을 띤다.
이는 삶의 죽음을 향한 여정이라는 점에서, 삶을 초과하고 있는 명백한 죽음을 향한 삶의 모험이라는 점에서, 삶의 총체성을 전제하며,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무덤을 딛고〉는 저승을 향하고 거기서 죽은 다양한 존재들을 만나는 특별한 주인공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오디세이아와도 같은 신화적인 모티브를 전제한 하나의 소설이며, 그 이야기의 당사자가 이야기꾼으로 그 외부를 관객의 자리와 합치시킨다는 점에서 이야기가 된다.
이 신화는 마르타가 우리와 같은 차원에 있다는 착각 혹은 인지에 의해서만 이야기의 형식을 충족하며―실은 하나의 소설이 있고, 그 소설(이 자기의 것임)을 이야기하는 이가 있다.―, 저승에서 다양한 존재자들이 마르타를 초과하는 평범한 존재―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들이 나올 때, 그들이 일종의 관객의 자리를 암시함다는 점에서 또한 이야기가 된다. 곧 특별한 마르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삶을 재현하고 그 재현의 자리에 우리 역시 속하게 된다.
인형이 마르타의 죽음을 가리키기 전까지, 곧 (스스로) 자신의 죽음과 합치되기 전까지 인형은 마르타의 바깥, 현재의 너머, 영원성의 자장에 있었다. 그것은 죽은 자였고, 따라서 그것과의 사랑은 의문부호로 마르타에게 남았는데, 그를 만나기 위해서는 죽음의 세계로 마르타가 건너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은 자가 산 자의 사랑을 감각할 수 있는지, 그에 따라 산 자가 죽은 자의 사랑을 전해 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신에게 오고 있다는 그 존재의 목소리로부터 마르타의 여정은 시작한다. 아니 마르타라는 신화적 존재가 구성된다. 그것은 미래의 시제로부터 오며, 죽음들이 머무는 영원성의 공간으로부터 온다. 선취된 죽음을 받아들이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르타는 특별하며, 그 비범함은 신화의 시간에서는 평범한 것이다. 까마귀가 알려준 대로, 그 존재를 만나려면 지하세계로 가야 한다. 까마귀가 그 지하세계에 대한 메타포이자 실질적 구성원이라는 점이 지시되지 않는다는 점은 또한 이 이야기의 신화와의 닮음―신화로서의 이야기임―을 가정한다.그 존재, 라자로는 마르타에게 절대적 타자인 동시에 마르타의 선취된 죽음이다. 라자로는 마르타에게 영혼의 차원에서 건네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마르타의 게니우스―영혼이고 또 영혼의 반짝으로서 수호신―이며, 곧 마르타의 분신과 같은 마르타의 또 다른 모습이며, 실제적으로 마르타가 자신의 세계를 버리고 죽음의 세계에 진입한 후로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마르타와 다른 물리적 이름을 지닌다는 점에서 또한 마르타와 분리된 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형이라는 실질적 매개가 있다.
〈무덤을 딛고〉는 마지막 장면의 전라가 되는 배선희 배우가 인형 옆에 가로누우며 죽는다. 곧 라자로가 된다. 아니 라자로가 자신의 신체임을 증명한다. 물론, 옷을 벗는 행위는 급작스러우며 수행적인데, 이는 죽음으로 가는 의식인 동시에 인형과 같은 맨몸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행위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이야기 안에서가 아니라, 이야기의 바깥에서, 이야기가 끝난 지점에서 이 행위가 이뤄지는 건, 이뤄져야 하는 건 어떤 연유일까.
이야기로 순전히 속하지 않는 부분, 이 물리적인 인형의 신체를 떠도는 이야기의 결말로서, 곧 누빔점이 되는 인형의 자리에 이야기와 이야기를 하는 신체 역시 귀속되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는 무대로 돌아온다. 그 전에 현재의 풍경을 가장한 저 너머 세계―그러니 현재에서, 저 너머로, 그리고 다시 한번 더 꼬아져서 현재로 돌아오는 셈이다.―로 갔을 때 이후로. 자신에 대한 이야기꾼과 동등한 차원에서 현실을 증명하는 또 다른 신체로 〈무덤을 딛고〉는 돌아간다.
인형은 “무덤”이며, 뚜렷한 지지체―그것을 “딛고”―로 자리하고 있던 것이다. 곧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 이야기는 펼쳐지고 급하게 회수된다, 신체를 드러내는 퍼포먼스에 의해. 그리고 그 신체의 어렴풋한 자취는 이곳이 무대라는 기술의 차원에서라기보다 여전히 하나의 이야기의 환상성을 기각할 수 없는 〈무덤을 딛고〉의 은근한 언표 행위라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인형은 무엇보다(이야기꾼보다) 연극을 성립시키는 단 하나의 절대적 물질이다. 그것을 처리해야만 하는 곤궁, 그것을 이야기해야 하는 과제가 〈무덤을 딛고〉에 주어졌던바, 이 인형은 〈무덤을 딛고〉가 연극임을, 연극에서 출발하는 이야기이며 그렇게 다시 연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5.01.10 ~ 2025.01.19. 화, 목, 금요일 19:30 / 수, 토요일 15:00, 19:30 / 일요일 15:00
공연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관람등급: 만 19세(성인) 이상
관람시간: 160분(인터미션 20분)
접근성 제공: 한글자막해설, 터치투어, 위스퍼링 음성해설(공연 일부 장면)
인형으로부터 시작된 세 편의 단막극: (이지형)의 (인형)으로부터 (안정민), (신효진), (김연재)
#인형, #인간, #지속가능한, #죽음, #관절, #감탄사, #언어
‘불가능성의 가능성’
인형의 불가능성
단막극A : 이야기하기의 불가능성
단막극B : 공존하기의 불가능성
단막극C : 관계맺기의 불가능성
a. 〈한 명 또는 두 명의 인간은 바늘구멍 속에서 바늘을 이야기한다.〉 안정민 作
작품소개:
하나의 단단한 이야기가 삶을 구원해줄 거라는 믿음은 허무하다. 세계는 이야기의 구원이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나는 구원을 꿈꾸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 어쩌면 완전히 반대일지도? 나는 파괴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세상은 파괴를 원한다. 구원을 위해 만들어진 믿음직해보이는 이야기에는 근본적으로 진실 따위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잘 정제된 선형적 이야기는 작고 울퉁불퉁한 목소리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규정한다. 표면이 매끄러운 그 이야기는 폭력이다. 불쑥불쑥 태어나는 어린 이야기들의 혀를 잘라낸다. 자신이야말로 구원의 가능성을 품고 있기에,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다. 다른 것이 아닌 자신을 읽으라 종용한다. 이야기의 칼날을 휘두른다. 나는 헛된 희망과 그 대가인 폭력으로부터 풀려나고 싶었다. 세계의 조각들을 그저 무수히 조각나도록 두고 싶다, 인형처럼. 인형은 세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인형은 구원을 찾지 않는다. 인형은 세상을 그저 그런 세계로 바라본다. 세상은 인형에게 거짓말할 수 없다. 나는 인형만이 볼 수 있는 조각난 세계를 아주 짧게라도, 밀리밀리 초라도 체험하고 싶었다.
시놉시스:
하나의 단단한 이야기를 써내는 인간이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구원하길 꿈꾸고 욕망한다. 그가 인형을 만났다. 인간은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그리고 인형을 완전한 세계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고자 한다. 그런데 그가 인형을 만나는 순간, 그는 조각난다. 거울에 비친 그의 그림자, 반사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반사체는, 이야기를 쓰려는 인간에게 조각난 세계, 비듬과 각질의 세계에 대한 아름다움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
b. 〈범람〉 신효진 作
작품소개:
세상에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면 그것은 필시 인간이 외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그 인간을 닮은 것에게는 외로움이 없을까요? '마음'이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말에서 '마음'을 느끼는 건 외로운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곰돌이 인형의 녹음된 'I LOVE YOU' 사운드에서도 우리는 사랑을 느끼지 않나요?
시놉시스:
식물로 뒤엎인 근미래, 한 인간과 한 로봇이 도망을 다니다가 오두막에 도착한다. 고장난 로봇은 과거 저장된 몇 개의 음악을 가지고서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다. 한 인간과 한 로봇은 끝을 피해 이곳에 다다랐지만,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
c. 〈한쪽 발은 무덤을 딛고 나는 서 있네〉 김연재 作
작품소개:
나에게 주어진 인형은 과거 어느 공연에서 시체로 등장한 이력이 있다. 인형이 맡은 역할은 제주 4.3 사건의 이름 없는 유해였다. 죽음을 위해 태어난 인형. 겉이 코팅되지 않은 그것은 점차 마모되며 존재를 분실해가고 있었다. 인형을 바닥에 누이고 온몸에 입을 맞추었다. 손과 입이 검어졌다. 나는 납작 엎드려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생의 한가운데서 누출되는 죽음을 어떻게 만질 것인가. 배선희가 여기에 답할 것이다.
시놉시스:
늙은 마르타는 목소리를 듣는다.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에게만 들려왔던 목소리. 죽음을 하루 앞둔 밤, 마르타는 목소리를 찾아 지하세계로 여정을 떠난다.
연출/안무 의도
인형작업자 ‘이지형’입니다.
인형을 생각하다보면 결국 인간과 비교를 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말 한마디, 눈짓 한 번이 인형에게는 왜 그리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인형이든 큰 인형이든 인간에게 당연한 것들이 인형에게는 매 순간 한계처럼 다가옵니다. 이런 불가능성을 가진 인형이 작가에게, 작가의 글이 다시 인형 작업을 하는 연출에게 돌아왔습니다.
독립된 세 편의 단막극이 모여 하나의 공연으로 엮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본 공연을 시작했습니다. 인형이 작가에게, 연출에게, 배우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전달되는 구조 안에 각각의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될까요. 어떠한 방식이든 (인형의-,)불가능성에서 단막극별(이야기의-. 공존하기의-.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찾는 과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개선된 인형, 분해와 재조립이 가능한 인형,
인간(배우)처럼 재현과 현존을 오가는 인형,
지속 가능한 인형
기획 의도
기존의 인형들은 인형작업자가 마주하고 있는 한계에서 출발합니다.
어떻게 하면 인형이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어떠한 가능성을 꿈꿔볼 수 있는지를 실험하기 위해 뻔한 인형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인형을 만드는 사람이 어떠한 텍스트보다 먼저 움직여봅니다. 그동안 다양한 형태의 무대에서 사용되었던 인형의 특징들을 해체하고 조합하여 놀이를 시작합니다. 어떻게 쓰일지 모르는 인형을 개선합니다.
올해로 네 번째를 맞이하는 〈기존의 인형들〉 프로젝트는 세 명의 작가들과 ‘인형의 텍스트’를 주제로 세 편의 희곡을 지난해 ‘창작의 과정’을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들에게 ‘글의 시작점’에 인형을 건네줌으로써, 인형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그동안 〈기존의 인형들〉을 통해 무대에 선 보였던 9개의 장면 속에 인형들이 무명의 퍼포머로 바라봐졌다면, 이번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에서의 인형은 작가들이 생성한 하나의 ‘인물’로 각각의 희곡에 기록되었습니다.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연출/구성: 이지형
-작가: 안정민, 신효진, 김연재
-배우: 박서현, 정윤진, 김별, 배선희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문수빈
-드라마투르그: 김지혜
-액팅코치_단막극 a, b: 황혜란
-조연출: 김조이혜수, 정나금
-컴퍼니매니저: 김민주
-티켓매니저: 조아라
-무대감독: 김동영
-무대디자인: 신승렬
-조명디자인: 김효민
-음향: 지미세르
-영상감독: 황호규
-그래픽디자인: 정김소리
-기록영상: 최강희
-접근성 스태프: 박하늘
-한국어 자막해설 오퍼레이터: 이우람
-무대조감독: 김대희
-조명 오퍼레이터: 정성연
-조명팀장: 김형표
-조명크루: 손태민, 최예원, 이경국, 이상혁
-무대제작: 애픽(APIC)
단체 소개
〈조음기관(이지형) 인형 작업에 관한 선언문〉
1. 인간 중심의 공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2. 인형의 본질은 온전한 죽음을 의미한다.
3. 오브제와 인형은 배우와 동일한 등장인물, 즉 배우이다.
4. ‘연극의 전환수’, ‘인형의 조종자’의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5. 하나의 배우 자체가 독립적인 공연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독립적인 여러 개의 공연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한다.
6. 관객은 동일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가 다른 개체이다.
7. 인간이 내린 인형의 정의가 아닌, 인형 자체로 독립적인 정의에 대해 탐구한다.
8. 인형 자체의 한계(구조적, 태생적)를 인정하고 무대에서의 새로운 접근법을 탐구한다.
2018 기존의 인형들 (적극, 여신동, 애르배 르라흐두)
2021 기존의 인형들: Post Puppetry (이경성, 여신동, 김보라)
2022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조건들 (남긍호, 양종욱, 입과손 스튜디오)
2023 기존의 인형들: 인형의 텍스트 (안정민, 신효진, 김연재)_낭독쇼케이스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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