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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신은 공연예술에서 시각예술까지 동시대 현장의 다양한 예술에 관해 리뷰/비평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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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이온(김상훈 연출),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 재현으로부터 미끄러지는 주체들
    REVIEW/Theater 2025. 3. 12. 00:11

    음이온(김상훈 연출),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사진 제공=음이온](이하 상동).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이하 〈서대문구〉)은 제목과 같이, 전면에 내세운 특정 관객층을 대리한다는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는 타자의 시점과 욕망을 향한 매개의 윤리를 전제한다. 이러한 ‘대리’는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자 결과이면서, 일종의 연극을 하는 것의 명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작자의 욕망은 창작자의 도덕에 온전히 혹은 완전히 잠식될 수 있는가. 여기서 타자를 향한 도덕은 자신의 내재적 윤리에 부합할 수 있는가. 〈서대문구〉는 이러한 대리자의 지위로서 어떤 것을 성취하려 하는가. 아니 성취할 수 있을까.

    100초 단위의 재현 질서의 토대가 되는 50개의 설문 아카이브는 불특정한 고유한 개인들의 욕망에 대한 목록과 특정 집단의 공통된 지점이 산출되는 지역 문화적 인류지 사이에 자리한다. 파편적인 50개의 장은 균일한 시간의 전제를 통해 동등한 위상으로 다뤄진다. 이는 일종의 ‘나열’로서, 어떤 변증법적인 종합이나 유기적인 서사의 흐름을 구성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은 각 개체의 분별을 가능한 것으로 둔다. 

    그럼에도 이는 사전적으로가 아닌 사후적으로 “서대문구민”이라는 정체성으로 묶이게 되는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고유한 개체들을 특정 지역의 집단으로 정체화하며 공통의 지점을 추출하는 것은 가능한가, 또는 그 반대의 차원에서, 괄호를 풀고 특정 개인의 욕망이 지닌 고유성을 분절적으로 다시 새겨넣을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이 투사되는 곳, 욕망이 장면으로 응결되는 곳. 그곳을 향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장면이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이고, 연극의 질서는 그 장면과 결부되는, 바라보는 이에 대한 주체의 전이이다. 그럼에도 그 재현의 차원에서, 서대문구민-음이온-관객의 삼각 구도가 묘연한 중심으로 모인다. 그리고 음이온-관객의 한 쌍이 서대문구민을 바라보는 것이 기본적인/일차적인 바라보기의 방향이라면, 그리고 그 응시의 방향이 뒤바뀌는 지점에 〈서대문구〉의 질문이 놓인다. 연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 그 누구란 어떠한 욕망과 함께 연극을 정초하는가.

    〈서대문구〉는 그것이 재현되고 있음을 명시하고 이따금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거나 나아가 동의를 구하기도 한다. “무대의 행위자들과 객석에서 보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는 장면”은 이 바라보는 이를 무대에 투여하며, ‘동의’와 ‘합의’의 차이에 골몰하고 직접 관객에게 질문을 하기도 하는데, 정의 내리지 않고 종료되는 이 질문 자체는 관객의 참여에 대한 정도를 상기시키며, 연극에 참여하는 관객의 범주를 재상정한다. 동의가 관객 개별을 향하며 각자에게 동의의 정도와 여부를 가늠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합의는 그 내용에 앞서 대상의 범위를 우선 지정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곧 그 안에 개별자들의 네트워크를 상상하게 만든다.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든 재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방향성에 따라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는 듯 보인다. 일종의 문제 해결의 능력이 중요해지는 가운데, 재현의 여러 방식들이라는 결과는 재현에 대한 탐구에 선행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정확한 프로토콜이나 방법론, 토대가 되는 재현의 방식을 상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는 욕망의 투사와 매개와 (가)실현의 메커니즘이 자리한다. 

    장면 “서대문에도 가싸운 텃밭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가까운’의 오기(誤記)를 아마도 그대로 수용한 가운데, 희망사항의 실현을 제도에 일임한다. 곧 민원 전화를 통해 서대문에 텃밭이 있는지 확인하는데, 여기서 “가싸운”이란 발음은 어느 정도 얼버무림을 통해 전가, 단락되는 희극적 상황으로 연장되며, 그 욕망이 어떠한 차원에서 발화된 것인지가 제삼자의 시선을 경유해 (사실상 실패하며) 새롭게 타진되어야 하는 결과를 명확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욕망은 모두 수용 가능한가. 또는 거기에는 어떤 필터가 없어도 되는가. 가령 “가슴 큰 여자가 보고 싶어요“라는 장면은 적절한 수사인가, 그것이 욕망의 순수한 발현이라는 점에서. 서대문구민의 말을 전적으로 전달, 매개하는 입장에서 검열의 잣대를 작동시키지 않는 것의 윤리에 입각해 그것은 고스란히 수용되어야 하는가. 여성 신체의 섹슈얼한 기호로 통용되는 문화적 환경 아래, 그 대표적인 신체적 특징의 순수한 지시와 외모에 대한 평가가 양립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인가. 

    표시되지 않지만, 표시되지 않음에도 남성 화자의 여성 대상을 향한 시선을 상정하는 이 같은 발화는 그 자체로 문제가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그러한 발화가 여성에 대한 불쾌감을 전연 불러일으키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대리 욕망의 최우선적 실천이라는 명목 아래 ‘나’의 자유로움은 어디까지 가능한 것인가. 이 ‘나’는 타자의 욕망을 발화하기 위한 매개를 떠맡는 존재이므로, 그것을 수용하며 원본의 의도를 최대한도로 구현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그에 부속되므로, 아니 그 욕망과 나의 욕망을 일치시키는 데 실패하는 존재이므로, 그로부터 미끄러지며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거기에 나타나는 건 어떤 머뭇거림, 당혹, 낭패감 같은 것이다. 

    음이온은 ‘가슴 큰 여자’를 한 번은 남성인 김중엽 배우가 다른 한 번은 여성인 전혜인 배우가 맡아 두 차례 보여준다. 전자는 후자의 재현에 대한 충격 효과를 미리 방어하는 막처럼 작용하는데, 가짜 가슴과 가짜 여자가 진짜 가슴과 진짜 여자를 대체함으로써 그렇다. 이어진 장면에서 전혜인은 한 손을 옷 속에 집어넣어 박동하는 심장으로 앞선 재현을 대신하는데, 이는 일종의 유희로써 재현의 강박에서 미끄러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여성의 여성 되기를 게임의 법칙을 따라 수행하는, 더 정확히는 그 게임―무언가를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재현하는 방식을 발화하는 것―의 법칙을 설명하는 게임 안내자의 역할을 수행―‘이것은 이렇게 옮겨질 수 있습니다!’―하는 가운데, 여성은 중성화(?)―이는 전혜인의 ‘의연함’으로부터 다시 한번 상기되는 김중엽의 ‘당혹감’의 형상 안에서 사후적으로 반복되며 완성된다.―에 대한 연기, 더 정확히는 여성 특정성보다 중성 특정적인 배우를 지향하며(이는 여자로서 배우와 배우로서 여자를 구분하는 것과도 같다. 가령 ‘여자를 연기하는 여자 배우는 여자 역을 맡은 여자[/남자]일 뿐이다.’) 내용의 의미는 전형에 대한 예시로 전화된다. 

     

    어떤 재현들은 우스꽝스럽거나 스테레오타입을 적극 활용한다. 가령 “행복한 가정의 모습” 장면이 그러한데, 이는 챗지피티(ChatGPT)가 작성한 대본을 따른 것으로, 이는 전형에 접근하기 위한 의미 구문이 되며, 상투적인 면모를 의도적으로 극대화시킴으로써, 양식적 연기임을 드러냄으로써 얇은 피막으로서 형상의 의미를 전화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가정이 연출되는 것이고, 연기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선취될 수 있는 것이라는 부정의 진리를 산출하는 데까지 이르지도 않는다. 그것은 연기를 위한 연기, 연기를 하고 있음을 들킬 수밖에 없는 재현자의 지위가 갖는 당혹스러움을 성급히 회수하는 것에 가깝다. 

    사실상 재현은 재현의 핍진성을 강조하기보다는 대체로 무미건조하며, 의미로 전화시키는 대신에 사이와 여백을 포함시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으로 끝난다. 그것은 각 장면의 제목을 하나의 문학적 표현으로 재승화시키는 전략인 동시에 재현과 원본 사이의 간격을 온전히 지켜내는 전략이다. 
    첫 번째 장면, “서대문구 관내에 사는 1인 청년(가구)의 삶”과 이어진 두 번째 장면, “깨진 마음을 주워 담는다.”는 신체로 그 여백이 응결되는데, 휴대전화기를 만지작거리는 구체적 행위에서 조금씩 몸을 뒤적거리는 배우들의 모습으로 옮겨가며 벌어지는 공간과 신체의 틈으로부터 어떤 고독과 외로움, 소외 등의 기류가 하나의 정동으로 발현된다. 두 번째 장면에서 쓰러지는 신체는 깨진 마음의 메타포가 되는데, 그것을 일으켜 세우는 행위로 주워 담음의 메타포를 대신한다. 
    신체는 고립되는 대신에, 또 다른 신체를 유도하고 요청함으로써 신체에 엉겨 붙는 정서 혹은 정동은 타자성을 드러내고 또 타자를 향한 윤리의 제스처로 변화한다. 고스란히 놓인 타자성의 신체가 있‘었’고, 이후 그것이 극적으로 전개되면서 보존하려는 바깥의 신체의 주의로 이어지면서 타자성은 체현되는 것으로 전화한다. 이는 여섯 번째 장면, “지나가는 사람이 손바닥을 펼친다. 그렇게 오래 서 있는다. 안아준다?”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직접 펼쳐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수용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인 맥락이 상기됨으로써 조금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하는 재현 역시 있다. “연세대 시위 장면을 면밀히 재현” 장면은 스펙터클한 시위의 규모와 외연을 뒤로하고, ‘면밀히’에 방점을 찍는다. 그로 인한 재현은 연극이 지닌 초라함과 환유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작용을 절충한 방식의 일부다. 반면 시위라는 단어가 증폭하는 역사적 기억, 현장의 정동은 그 추상성과 메타포의 견지에서 일정 정도 발현된다. 
    깃발을 접는 두 사람은 시위를 함축하는 깃발의 정리를 통해 시위 현장의 방어자의 자리에서 적극적 행위자의 자리를 저편으로 추방한다, 또는 비가시화하며 지시한다. 말미에 모기의 출현과 그 모기를 잡는 데 실패하는 순간은 둘―의경과 시위자―의 위상차를 드러내는 한편 시위의 중단이 아닌 종료의 차원으로써 서사의 일정한 지속의 성격을 보존한다. 시위는 우스꽝스러워지지만 조금 더 성스러운 것으로 남는 것이다―곧 성스러움 앞에 처한 재현의 초라한 지위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수렴하는 것이다. 

    〈서대문구〉는 결과적으로 공동체의 영역을 향하게 된다. 누군가의 욕망을 지역화할 수 있는가. 아니 지역의 욕망을 지역의 것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아니 욕망은 지역화된 표면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에 따라 지역화된 욕망 또는 지역을 비집고 들어가는 어떤 욕망을 사이에 두고, 재현의 의무를 지닌 위임자들과 불특정한 지역의 존재자들이 손잡을 수밖에 없는 곳이 극장임이 드러난다. 〈서대문구〉는 재현을 따르기로 한 주체와 재현 양식을 지켜보는 이의 공모를 구성한다.
    “마을공동체의 연결” 장면은 관객 모두의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데, 이에 따라 손바닥을 들어서 보여주며, 손뼉을 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일련의 동작이 뒤따르게 된다. 관객은 마을공동체를 대리하며 재현하는 주체가 되며, 대상화의 거리를 일시적으로, 강제로 소거해야 하는 몫을 부여받게 된다. 사실상 욕망은 재현의 무대를 상정한 가운데, 곧 상연의 드라마를 상상적으로나마 선취하면서 발화되는 것이기도 한데, “무대의 행위자들과 객석에서 보는 이들이 모두 동의하는 장면”과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이미 관객이 공모의 주체로 상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의”는 그 개념의 함의를 전제하기 위한 논의의 지점으로 관객을 파고든다. 곧 동의에 대한 동의를 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모두 동의하는 장면의 내용을 연출하는 대신에, 동의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과정의 무모함과 지난함을 통해, 모두가 동의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개념을 설정하는 차원에서 유사한 단어가 끼어드는데, “합의”는 동의와 어떤 차이를 갖는가. 합의는 무언가 동의보다 더 진전된, 개입의 정도가 더 적극적으로 반영된 결과까지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최종적으로 “모두 동의”함을 나타내는 차원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이는 한 명 한 명에게 구하는 동의의 어려움을 통해 불가능성을 고정화하는 기호의 심급으로 자리 잡게 된다.

    〈서대문구〉는 지역성의 반영에 대한 의제를 도출하는 제도의 조건을 재현의 알레고리로 매개하는 과정을 통과해 나가는 특이한 연극성의 출현이다. 연극은 일종의 업자의 행위이면서 그 업자의 직무가 연극에 대한 고민과 사유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가운데, 연극이라는 매체를 투과하며 지시해 낸다. 모든 장면은 파편화된 개별로 남고 또 종합의 포획을 벗어난다. 그것은 표현 방식의 차원에서 유사성과 차이를 오히려 보여주는 것처럼도 보이며, 그로부터 연극과 실재의 차이를 도출해 내며 (연극의 한 방편으로서) 재현에서 재현을 포함하는 연극의 의미 차원으로 상향되는 것처럼도 보인다.

    장면들은 파편화된 개체라는 점에서, 또 어떤 연극‘들’의 한 분화라는 점에서 또 다른 종합의 선취를 잠재한다. 그럼에도 욕망은 잔여로 남는 것과 같이 장면은 여백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주체의 그림자는 희미해지고도 뚜렷해진다. 다른 주체들―우선 연극을 추동했던 이와 연극으로 반영하는 이, 곧 두 개의 주체들―이 뒤섞이며 드러난다. 그 과정은 단순하지 않고, 또 간략하고 함축적인 가운데, 잠재된 영토로 인도한다. 그 파편들은 제각각 힘이 있고 동시에 불투명하며 그렇게 투박하게 놓여 있는 것으로 영속적으로 잔존한다. 〈서대문구〉는 종결되기보다 종료될 뿐이다, 매 장면이 60초 타이머 룰에 따르는 것처럼.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서대문구민들이 바라는 장면
    공연 일시: 2024.11.27.수.-11.30.토. 평일 20:00 / 토 16:00
    공연 장소: 신촌문화발전소 공연장
    원안: 서대문구민들
    연출: 김상훈
    드라마투르그: 성재규
    출연: 김경헌, 김중엽, 전혜인, 하영미
    조명: 서가영 
    사운드: 이현석
    무대감독: 이라임
    영상 기록: 전강채
    사진 기록: 하준호
    그래픽: 박서영
    하우스: 이세림
    조명 오퍼: 박승훤
    음향 오퍼: 김내리
    제작: 음이온 ummeeeonn

    음이온 ummeeeonn 소개

    극장과 연극을 인터페이스로 인식한다. 특히 극장은 물질 운동을 사건으로 변환하며, 이 사건은 관객의 위치·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감각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하나의 운동을 다양한 사건(들)로 분화하는 관객들로부터 연극이 생성되는 작업을 진행한다. 그래서 연극은 언제나 새로운 대화(들)과 공동체를 위한 연습이(라고 믿는)다.

    최근에는 시간과 사건을 물질적 구성에서 바라보며 사변적 미래의 가능성을 길어내는 연극적 미래주의 혹은 씨어터 퓨처리즘에 대한 질문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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