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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자하, 〈롤링 앤 롤링 Lolling and Rolling〉: 한국 사회의 어떤 역사
    REVIEW/Theater 2023. 11. 15. 16:36


    구자하, 〈롤링 앤 롤링 Lolling and Rolling〉 2023 SPAF ⓒ Sang Hoon Ok(이하 상동).

    〈롤링 앤 롤링〉은 한국 사회에 자리한 영어 교육 강박이라는 무의식을 포착한다. 이는 직접적인 사회 비판이나 풍자로 부상하기보다는 사적 이야기의 맥락 아래 가라앉는다. 후자를 성립시키는 건 자못 비장하고 우울한 구자하의 퍼포머로서의 태도이다. 유럽에 갔을 때 첫 번째 자신의 영어 선생과의 격의 없는 친구와도 같은 관계는 구자하의 경험이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상 미시적이고 잉여적인 부분으로 보이며, 나아가 극의 주제로 보기는 어렵다고 보이지만, 실은 그것이 주는 안온함은 영어 강박을 앓는 한국인의 의식을 대체한다.

    곧 한국 사회라는 상징계를 벗어남으로 인해 얻는 어떤 인지의 영역은 한국인으로서 살아가는 것과의 차별화된 기호를 산출한다. 중요한 건 인지의 영역이 아닌, 비-한국 사회에 자리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구자하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된) 우월함, 또는 (영어를 그들보다 잘할 수는 없는) 열등함 모두는 적어도 한국 사회에 대해서는 우월함으로 자리한다는 사실을 구자하는 간과할 수 없다. 구자하는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접근하지만, 오히려 맥거핀으로 보이는 영어 선생이라는 존재가 극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구자하의 〈한국 연극의 역사〉에서 한국 연극의 비판이 아닌 할머니에 대한 애도로 극이 재점화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유아를 대상으로 혓바닥 아래를 절개하는 설소대 수술로써 서구인을 체화하려 했던 장면은 그 수술 장면의 지연과 수술 음향을 강화해 희화화되는 대신 끔찍한 것으로 처리된다. 이는 자극적인 장면으로 의도된 것일까. 질끈 눈이 감아지는 경험이 작가에게도 유효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곧 구자하 역시도 영어에 대한 강박, 서구인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자체로부터 적어도 그 기억과 경험의 차원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아닐까. 자신의 아버지가 키가 더 커서 또래라기보다 서구인의 기준에서 열등하지 않아야 함을 지향하고 있음을 내비친 어떤 에피소드에서처럼, 사회에 체화된 강박은 의식적인 거리 두기와는 별도로 무의식을 지배한다는 것을 〈롤링 앤 롤링〉은 보여주는 것 아닐까. 

    한국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던 그의 영어 선생이 전해준 김광규 시인의 「영산」이라는 시는 그것의 대리물에 가깝다. 이 시를 구자하는 한국어로 읽고, 이는 번역이 되지 않는다. 영어와 한국어를 뒤섞어 쓴 구자하의 전략에 따라, 그것은 한국어가 가진 순수한 음가와 그것에 이입하는 퍼포머의 목소리, 나아가 감정의 흐름으로서 가치가 실리게 된다. 〈롤링 앤 롤링〉의 제목은 물론 “Lolling”과 “Rolling”이 모두 한국어로 “롤링”으로 표기된다는 점에서 착안했다. 이것은 영어로 표기할 때만 온전하다. 

    그럼에도 온전한 언어 구사자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이와의 대화가 온전하게 성립했고, 그리고 그와의 관계로 소급되어가는 극에서 “Lolling”과 “Rolling”에 대한 구분의 이상이 실천되지 않는 지점은 그 두 다름이 하나인 둘로 혼동되는 지점이면서 동시에 그 소통이라는 중간이 그 둘 사이에 있음을, 그 둘을 가로지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곧 A와 B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기보다 A와 B로 구분되는 지점이 무력화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한국어 제목은 온전한 언어 표기에 대한 강박보다는 다른 언어로 건너오며 발생하는 오차와 시차에 대한 온전한 긍정에 가까울 것이다. 

    영어 선생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그것으로 또한 연장된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일본어에 대한 강박을 구자하는 세대보다 훨씬 격렬하고 뼈아프게 직접 경험해야 했다. 그 트라우마는 우리의 것이 되고, 구자하는 결과적으로 강박증을 가진 한국인의 초상이 아니라, 그 강박증이 끼친 트라우마적 각인이 어떻게 무의식의 지층에 머물러 있는지를 찾아가면서 그것들을 이어가며 하나의 역사적 전이 지대를 만든다. 그런 지점에서 구성되는 근현대사는, 할머니 세대가 학교에서 일본어를 제대로 잘 사용하지 못했을 때 얻는 벌점과 그로 인해 결국은 말하지 못하는 이와 명명되지 못하는 이로서 학교에서 사라진 존재가 되었던 경험에서처럼, 강한 존재에 대한 어설프고 비릿한 욕망의 변증법이 아닌, 일종의 방어기제로서 작동하는 우리들의 비천하고 나약한 욕구의 수식으로 갈음되지 않는가. 

    〈롤링 앤 롤링〉은 영어 공부를 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추천받은 턴테이블, 곧 방금 들었던 문장을 소급해서 듣기 쉬운 장비는 공연을 구성하는 중요한 발화체로 작용한다. 구자하는 발화하는 이이면서 극의 흐름과 말의 무게와 심급, 정서를 조직화하는 수단으로 음악을 구성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말은 음악의 한 부분이 되며, 음악은 말을 용해시킨다. 그리하여 음악에서 말이 부상한다. 음악과 이미지, 말의 합성은 한 명의 유기체에 의해 구현되는 듯 보인다. 이러한 방식은 한 명의 우월한 창작자의 전형을 제시하는 것이나 거꾸로 프로덕션 개념으로 진행되는 연극의 비유기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연극의 말이 음악의 일종일 수 있음을, 이미지는 말/음악과의 어떤 관계를 실험하는 구조 속에서 새롭게 인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도 의미한다. 일종의 vjing 공연이지만, 〈롤링 앤 롤링〉은 결국 발화자의 말이 중심이 되는 연극이다. 극적 효과가 아닌, 내용을 재현하고 분위기를 저울질하는 것, 그 이상은 없다―물론 그 이상이 필요하지도 않다.

    렉처 퍼포먼스의 형식, 곧 1인의 발화, 지식과 정보의 조합을 통한 인지적 고양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적인 그것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구자하의 작업은 실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마티아 3부작’ 모두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교훈극이 아닌, 교훈극의 귀결에서 샛길로 빠져나와 자신을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거기에는 친밀한 이와의 관계가 전제되며, 그에 관한 감정선은 절대적인 경계로 작용한다. 곧 그 자신은 그것을 넘어설 수 없으며, 객관적인 거리 두기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라는 외피 너머 구자하의 무의식과 어떻게 자신이 만날까에 대해 구자하는 나아간다. 그것 역시 한국 사회의 어떤 역사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롤링 앤 롤링 Lolling and Rolling
    공연 일정: 10.14.SAT. 7pm / 10.15.SUN. 3pm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접근성:(전 회차) 안내보행, 한국어, 영어 자막 
    장르: 다원 ●●●●●, 연극 ●●●●, 영상 ●●●●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중학생 이상) 

    소요시간: 45분

    제작진
    콥셉트·텍스트·연출·음악·영상·퍼포먼스·리서치: 구자하
    시노그라피·영상 오퍼레이션: 정은경
    드라마투르기: 드리스 두이비
    제작 자문: 폴 헤이바트
    기술: 코닐 코센스, 얀 베르크만스, 바트 허이브레흐트, 쿤 구센스
    제작 관리: 빔 클랩도르프
    제작: 오피스나인오피스(네덜란드)
    제작책임: 캄포(벨기에)
    공동제작: 쿤스텐페스티벌(벨기에)
    제작지원: 다스 시어터(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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