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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크 비그루 Franck Vigroux, 〈플레시 Flesh〉: 분투하는 어떤 몸들 또는 매체들
    REVIEW/Theater 2023. 11. 15. 16:03

    프랑크 비그루, 〈플레시〉ⓒquentin chevrier[사진 제공=2023 SPAF](이하 상동).

    〈플레시〉는 극장에서의 시지각적 환경을 창출하기 위한 조건을 구성한다. 이를 통해 이미지로 덮이고 사운드에 휘감기는 경험이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예술의 언어일 수 있음을 주장한다. 프로젝션을 통한 이미지는 촘촘하게 극장 전면을 가득 채우고, 마침내 그것이 걷히고 무대가 드러났을 때 이 공간이 큐브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관객은 사운드라는 존재가 무대의 빈 곳에 달라붙기보다는 포화된 상태로 공간을 만든다고 인지하게 된다. 이러한 부분은 과잉된 집적의 경제를 통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한다면, 관객은 양적인 증폭의 흐름에 어떤 종류의 이음매를 모두 지우는 것만으로 얻어지는 결과를 단지 수용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니까 입체 서라운드 시스템의 극장용 버전으로서 존재하는 작업의 특징이 가장 우선하는 것이라면, 이 작업은 충분히 동시대에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인터랙티브한 경험을 창출하는 데 있어 기술과 예술의 관계는 공평한 협력의 양상을 전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반면, 기술의 쓰임에 관한 향방을 의문에 부치고, 기술적 역량의 차원에서 예술의 부족분을 전시하는 행위, 곧 일관된 하나의 기술을 밀어붙이는 어떤 작업의 경우, 그 둘의 관계는 대등한 층위가 아니거나 애초에 둘로 분리되지 않는 차원이었다. 〈플레시〉에 대한 의문은 이 작품이 갖는 스타일과 증폭되는 감각과의 관계 너머 어떤 다른 관점으로 이 작품을 바라볼 수 있느냐에 있다. 

    현실의 영상 투사로 시작되어 고가도로에서 지나다니는 약간 사선으로 기울어진 자동차-그래픽이 갖는 입체적인 공간성,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거나 아래에서 위로 솟구치는 물의 영상이 지닌 물질성, 명멸하는 스크린이 주는 흥분과 거기서 연장된 직사각 도형이 정면으로 깜빡이며 현현할 때의 이물감과 어지러움, 허공에 매달린 자동차 엔진의 기이한 육체성과 거기서 떨어지는 배설물이 가진 끈끈한 점도, 머리와 몸이 뒤집힌 것 같은 퍼 소재의 외투를 걸치고 머리를 얼굴까지 늘어뜨린 퍼포머 둘의 유령-괴물성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최소한의 의상만 입고 잠든 것처럼 웅크려서 매우 더딘 동작을 하는 무용수들이 공간 전체로 수렴하는 현상까지 모든 것은 낯설고 이색적인 감각의 파장을 만들기 위해 분투한다. 

    자동차 사고를 경험한 프랑크 비그루가 유사 소재인 제임스 G. 발라드의 『크래시』 등을 차용했지만, 서사가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전달되지는 않으며, 단지 시청각적 정서만이 부상한다. 여기서 이미지는 신체를 초과하며 투과하려 한다, 조망되고 연계되기보다는. 명확하게 식별되는 자동차의 등장 이후 사고의 지점은 확인되지 않고 유기되고 연기되며 다른 경험의 양상으로 확장되어 간다. 파편적 경험들은 선후 관계를 규정하지 않고 침범하고 도래한다. 웅크린 두 무용수들은 시각적 잔상이 소거된 후 이전의 막대한 시각 침투 현상과 대비되어 노출된다. 

    협업은 시각, 움직임, 설치 각각의 영역을 독립적인 존재로 두는 것에 합의한 것으로 보이며, 스펙터클한 양적 투여를 통한 감각의 극대화와 국소적인 감각의 마취를 통한 감각의 확장은 어쩌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감각을 결국 모두 극대화한다. 여기서 신비감을 알리는 존재의 현현이 그것이 풀리지 않는 상황에서 마무리된다는 차원은 무용이 서사의 중심이 아닌 일부분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시지각과 시청각과의 분별 속에서 대립되는 또는 상반되는 매체로서 신비화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현실적인 원인이라면, 후자는 매체 철학적인 원인이다. 그에 따라 존재의 서사는 더 연장되지 않고 마감되며, 미스터리로 남는다. 이는 물론 사고의 경험이 가진 강도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신비이다. 

    〈플레시〉는 섬광의 빛과 이미지―플래시(flash)―가 아닌, 살과 몸의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웠다. 진동하고 명멸하는 육체와 연접하는 기호학으로서 이미지-사운드-몸은 각각의 영역을 독립적으로 구성하면서 결부된다. 경험은 언어로 해소되지 않고 감각으로 확장될 뿐이며, 따라서 기승전결에 대한 서사의 기대는 에너지의 폭발과 잠잠해짐의 분기로 크게 수렴한다.

    공간에 투사되며 입히는 거대한 이미지의 물결은 일종의 신체라고 할 수 있을까. 샤막이 걷히고 빈 화이트 큐브가 드러날 때 이미지 투사는 공간을 매끈하게 지워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입체적 환영성과 별개로 그 거대함을 주조하던 존재인 사운드는 마찬가지로 몸을 확장시킨다, 그 더딤과 작음을 한계로 규정짓지 않고서. 결과적으로 몸은 음악의 영토 안에서 또 백색 공간의 매끈함 아래에서 하나의 가능성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은 몸에서 연유하는가, 아니면 음악적 효과에 따른 것일까. 여기서 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하면, 그 몸이 새롭다면 순전히 음악적 분위기에 의한 것일까. 아님 순전한 몸의 가능성을 음악이 되비추고 있는 것일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일시: 10.7.SAT 7:00pm, 10.8.SUN 3pm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장르: 기술 ●●●, 무용 ●●●, 사운드 ●●●●, 영상 ●●●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 (중학생 이상)
    소요시간: 60분
    초연: 2018.11, 아치펠 극장 (프랑스 페르피냥)
    접근성: (전 회차) 안내 보행

    콘셉트·음악: 프랑크 비그루 Franck Vigroux
    영상: 커트 데셀러
    안무가: 미리암 구르핑크
    출연자: 하루카 미야모토, 아마딘 바주
    드라마트루기: 미셸 시모노
    추가 영상: 올리비에라트시
    조명: 페린카도
    기술 콘셉트: 카를로스 두아르테
    의상 디자이너: 아틀리에 다윈
    제작: 오트흐쿠어드 컴퍼니

    후원 및 지원기관
    제작: Cie d’autres cordes*
    배급: 씨어터 드 님
    공동제작: Theatre l'Empreinte Brive/Tulle, Cesare CNCM Reims, La Muse en circuit CNCM, Alfortville, 페스티벌 Aujourd'hui Musiques de l'Archipel, SN de Perpignan 지원 biennale Nemo/Arcadi Ile-de-France, ADAMI, DICREAM and SPEDIDAM
    레지던시: Espace des Anges Mende, Humain trop humain CDN Montpellier, 페스티벌 오주르휘, Musiques de l'Archipel, SN de Perpignan, Anis Gras Arcueil, Theatre l'Empreinte Brive/Tulle.
    *지원: 지역 위원회·DRAC Occitanie, 협력 아티스트: MAC de Crét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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