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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우옥 연출, 〈혁명의 춤〉: 구조는 완결되는 것인가
    REVIEW/Theater 2023. 9. 12. 00:09

    마이클 커비 작, 김우옥 연출, 〈혁명의 춤〉ⓒ최용석[사진 제공=더줌아트센터](이하 상동). 1장: 손전등과 파도 소리.

    〈혁명의 춤〉은 혁명의 이념을 혁명의 이미지로 대체한다. 여기서 혁명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이미지는 아니다. 짧은 대사들, “이쪽이야!”, “뭐지?”, “기다려!”, “들려?”, “그들 거야!”, “누가 오고 있어” 등, 위치를 지정하는 지시 대명사, 하나의 동사이거나 두세 개의 단어로 이뤄진 구문은, 상대방과의 관계를 맺으며, 각기 다른 여덟 개의 장면으로 반복된다. 이 여덟 개의 장면에서 엄밀히 혁명의 이미지를 수여하는 건 마지막 단계 직전에 이르러서이며, 그 전의 이미지들이 혁명을 위한 모종의 단계로 적용되는 것 역시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혁명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이미지가 아니다. 이러한 이미지를 둘러싸고 있는 건 긴장과 긴박함의 정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서는 그것을 그 자체로 두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곧 기의를 파악할 수 없음, 단편으로서의 기의에서 잠가지는 것으로 환원된다―“이야기나 서사가 없는”. 그것이 혁명을 간직하는, 혁명과 연결되는 정서라면, 사실 〈혁명의 춤〉에서 질문할 수 있는 건 그 같은 혁명의 이미지는 지금에는 너무 낡은 것이 아닐까. 최소한의 기의, 코드, 이미지에는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그것을 함의한다. 구조는 결코 자체적인 피드백 고리로만 순환되지 않는다. 

    8장: 손전등과 사이렌 소리. 그리고 바리케이드.

    바리케이드를 비롯하여 온갖 방호물을 갖고 전진하는, 첫 번째 드디어 모든 배우들이 등장해서, 불이 켜지자 전형적인 혁명의 깃발을 올리고 있는 집체를 구성한 장면은, 적어도 혁명의 이미지다. 다만 거기까지이다. 그러니까 〈혁명의 춤〉은 ‘혁명이라는 기표’를 말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만을 말하기 위해 “혁명”이라는 기의를 전개시키지 않는다면, 왜 기의를 지우는 기표로서의 제목을 내세우지 않은 것인가. “혁명의 춤”이 ‘혁명’을 온전히 지울 수 있는가. 그러니까 구조에의 꿈은 내용의 단서를 굳이 왜 드러내는 것일까. 

    “8개의 짧은 장면”으로 이뤄진 〈혁명의 춤〉에서 첫 번째 장면은 사실 모든 것을 예표하는 기호가 된다. 이는 모든 장면의 뼈대라는 점에서, 그 자체를 무언가가 덮이지 않은 최소한의 기호로서 이후 펼쳐질 것들의 피부를 제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메타 기호이다. 이 말은 공연이 끝나고 나서야 사후적으로 재조립된다. 곧 가능성은 사후적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서 식별할 대상을 찾는 남자는 군인이나 정찰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쪽”은 어떤 증거를 찾은 후에 그와 같은 무리에게 소리치는 말이고, “그들 거”라는 말은 이쪽의 무리와 대별되고 갈등하는 존재의 가능성을 상정한다. 이들은 끊임없는 이동의 과정 아래 있으며, 경계를 점유하고 있다. 곧 적의 위치와 나 사이에서의 좌표가 현재 새롭게 구성됨을 의미한다. 

    6장: 가로등과 카메라 플래시 그리고 음악.

    그런데 이 적은 결국 혁명에서 완성되기보다 그 혁명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한다는 점에서 뒤이은 혁명에 비추어 보면, 그들보다 센 사회 세력의 이미지만이라기보다는 그 반대의 차원에서의 이미지를 포함한다. 오히려 혁명 세력을 소탕하고 감시하는 이미지일 수 있다. 분절과 파편적 단위라는 하나의 원칙. 곧 파편적 단위들의 분절이라는 구조는 파편들의 종합을 하나의 서사로 갈음하지 않는다. 따라서 혹시나 단위들이 혁명의 이미지를 쌓아 올리려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실패하는 셈이다. 아니 그보다 어긋나는 셈이다. 혁명의 이미지는 서사를 배제하는 단위들의 배분이 종착에는 급히 서사를 노출하며 자신의 원칙에서 예외로서 발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기어코 서사 없음으로부터 새어 나오는 서사가 된다. 따라서 혁명의 이미지는 쌓아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간에 도래한다. 

    ‘적’은 전쟁의 국면을 상정한다. 배우들의 몸짓은 각이 잡혀 있으며, 그러한 각은 최소한의 가장 예리한 수행을 시각화하기 위함이다. 반면, 그 각은 전쟁을 대비한 군인의 몸짓을 체현한다. 이는 그럼에도 고유의 몸짓이 아닌데, 일관된 행위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가진 행위이기 때문이다―군인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서가 아닌, 절제된 어떤 똑같이 할 수 있는 이미지를 반복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결과적으로 군인의 이미지를 구현한다는 게 맞다. 그 자체의 심미성은 그 딱딱하고 질서 잡힌 움직임 자체에 그치지 않고 그것들이 갖는 공통됨―그것들이 모두 같다는 점―에서 나온다. 그것의 목적은 똑같은 행위를 매번 똑같이 구현하는 것에 있다. 따라서 이것이 여러 현실로 묻어올 때 과잉된 제스처로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것은 군인의 기호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지 군인으로서의 혼동을 부르는 것일까. 하지만 최소한의 기표들은 분명 서사를 요청하고 서사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만약 동시대의 혁명을 논한다면, 어떤 이미지일까. 그것은 직선과 적과 방호와 어둠과 긴장과 전쟁의 이미지에 닿아 있을까. 왜 그것은 지나간 것에 대한 재현으로 보일까. 재현의 질서를 갖지 않는 데 실험의 목적이 있다고 하여도. 결국, 최소한의 기의를 담지하는 〈혁명의 춤〉은 예술의 이름을 스스로에게 수여하며, 완전함의 구호로써 시대를 거스를 수 있다고 단정한다. 반면 구조 자체는 실상 닫힌 것이 아니라 열린 틈새를 갖고 있는 것 아닐까. 그것은 결코 완전히 자족적이지 않고 시대를 기술하거나 닮아 있으며 결국 시대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조주의의 실험은 연극의 최소 단위를 드러낸다기보다는, 그것이 온전한 단위로 그칠 수 있다기보다는 일말의 단서가 서사의 완성을 향하고 있다는 것, 의미와 메시지는 결국 그 가운데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3장: 삼각대 등불과 전쟁소리.

    〈혁명의 춤〉은 파편적인, 최소의 구조적 단위로써 극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드문 작업이다. 무용 작업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여전히 가능하지만, 연극에서는 시도되기 힘들다. 반복을 통한 추상적 세계를 구축하는 부조리극, 가령 〈고도를 기다리며〉가 이런 전통의 계열을 잇는다고 할까, 오늘날에도 상연되는 작업 중에서. 대사가 가진 기의를 내세우는 대신에, 의미를 ‘함축’하는 기표로 바꾸는 작업, 곧 배우와 표면의 등가 작업을 논리적이고 의심 없이 구축하는 형식은 차라리 연극의 어떤 정신을 추앙하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것은 ‘굳이’ 그 지난 형식 자체를 힘주어 말한다는 점에서 시대착오적이면서도 연극의 교과서적인 이념이 여기 앞에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준다. 그리고 시대의 차이보다도 지난 작업과의 차이로부터 이 작업을 독해할 다른 경로가 창출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3년 8월 17일(목) - 8월 27일 (일) 8월 21일 (월) 쉼, 평일 20:00 토, 일 15:00
    공연 장소: 더줌아트센터

    작: 마이클 커비
    번역/연출: 김우옥
    출연진: 차희, 배윤범, 성열석, 라준, 정보나, 이다아야, 허지원, 안연주, 심연화, 정이수, 김강민, 서원, 김이헌
    무대감독: 이율
    기술감독: 박기남
    조연출: 오미영
    의상 디자인: 박소영
    조명 디자인: 공연화
    조명 어시스턴트: 김아연
    음악/사운드 디자인: 카입
    음향 디자인: 김성욱
    무대/소품 디자인: 유태희
    무대/소품 어시스턴트: 황주희
    사진/영상 촬영: 최용석
    오퍼레이터: 진다은
    PD: 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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