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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변방연극제: 연극을 파훼하기
    REVIEW/Theater 2023. 8. 18. 11:37


    변방연극제는 “취약하고 오염되고 더러운 것들의 축제”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웠다. 이는 “변방”에 대한 새로운 정의이면서 연극제 안의 작품들의 다양한 코드로 분화하게 된다. 오염과 더러움이 같은 의미라면, 취약함은 조금 다른 양태의 단어라 하겠다. 전자가 세상의 시선으로부터의 부정적 규정을 뜻한다면, 후자는 어떤 부분의 구조적인 결여나 미비함 따위를 지시하지만 전자에 비해 그 자체가 절대적인 부정이 되지는 않는다. 이는 말 그대로 하나의 유기체적인 전체의 구조가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일컫기 때문이다. 내적인 차원에서는 후자가 연약함과 맞닿는다면, 전자는 그런 부정적인 규정에 대한 저항으로 전복될 수 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이번의 변방연극제는 세상의 원칙을 파훼하는 형식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다양성과 자유로움 등을 지향하는 태도와도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 “것들”은 ‘존재가 되지 못한 존재들’이며, 그 존재들이 타자인 것이 아니라, 주체인 축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사)햇살사회복지회, 〈오프 리밋 off-limit​〉ⓒ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총 12작업 중, 조기현의 〈무출산무령화사회〉, 변화의 월담의 〈변방스포츠: 예술, 과학, 운동의 경계에서 만나는 날 것의몸〉, 김자한의 〈그치? 별로지?〉, JAT Project의 〈어떻게 내가 삐걱거리지 않을 수 있겠어〉, 임의그룹의 〈-아니, 아니에요! -왜요?〉 이상 다섯 작업을 봤고, 축제 중반에 이르러 접속하게 된 셈이다. 연극제 이전에 관람했던 극단 동의 〈들.뜬〉까지 하면 절반 정도의 작업을 겨우 봤다고 할 것이다. 
    사실 종합적인 차원으로 이렇게 작품을 묶는 건 생각보다 작품 하나 하나가 크게 깊은 인상을 주지 않았다는 것과도 연관되지만, 더 큰 차원에서는 연극제가 새로운 테제를 말하는 작품의 발굴과 동시에 작품의 새로운 곧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발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될 것 같다―곧 여기서는 그러한 언어 자체에 대한 신념이랄까가 중요해진다. 연극제가 어떤 기완성된 완성도 높은 작품의 유치가 아니라 새로운 방향성을 갖는 작품들의 과정을 구성하는 어떤 플랫폼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본다면, 이는 수용 가능한 부분이다. 

    조기현, 〈무출산무령화사회〉ⓒ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이하 상동).

    조기현의 〈무출산무령화사회〉는 형식 실험에 국한되지 않고 구조적인 차원의 전개를 쌓아간다는 점에서, 그리고 서사의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시험한다는 점에서, 본 작업 중에는 가장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업이다. 〈무출산무령화사회〉는 간단히 노년층의 인구가 청년층의 수혈을 받아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있게 되자 사회에서 증발해 버린 현실을 다룬다. “진행 인구”로 지시된 조기현은 시청각 프레젠테이션과 함께 렉처 형태로 근현대사의 출산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면서 이러한 현실에 관한 사회 구조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와 노년층 인구의 확대라는 경제 인구의 축소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캐치프레이즈가 코로나19의 백신을 전 국민에게 공급한 정부 방침과 같이 국민 전반을 대상으로 실효성 있게 이뤄지는 상황에서, 조기현은 이러한 허구적 실재를 잇는 관련 지식의 계보를 구성하는데, 이는 지나치게 합리적이어서 정부의 언어로 귀착되거나 현실의 다른 목소리를 차단함으로써 과거의 지식에 고착되며 지금의 현실에서 공회전한다는 인상을 준다―그는 도대체 여기서, 해당 사태에 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 것인가. 

    조기현의 그 렉처 자체가 사실상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데, 이는 무엇보다 그의 렉처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크게 벗어나는 상상력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당도한 현실 자체가 너무나도 핍진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래(현실)로부터의 출구 없음은 다른 미래에 대한 상상력 자체를 폐쇄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어떤 회생 방안은 없을까―그리고 그가 어떤 정확한 지식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고 하는 강연자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형식주의에 함몰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공고한 현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상상력이 되기에 그의 입지는 고착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여기서 조기현은 일종의 사회적 증상이자 무의식이다. 이러한 프레임을 우리의 목소리로, 우리의 문제로 바꾸는 것은 그의 동료로 등장하는 “연극 인구”로 지시된 남선희 배우의 몫에 있다. 

    남선희는 조기현이 ‘할머니 가설’을 이야기할 때 극장을 이탈하는데, 이것은 둘의 갈등이라는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자, 나아가 과정상의 갈등을 반영, 재현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부러진 대퇴부로부터 오래전 인류 역시 누군가의 치유와 돌봄 행위가 일어났을 것을 추정하며 그 자리에 인자한 할머니의 역할을 놓고, 그러한 역할이 공동체의 양육을 온전히 유지시킨다는 이야기는, 여성을 신비한 존재로 격상하면서 동시에 양육의 책임을 다시 은퇴한 여성의 몫으로 돌리는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믿음과 분노가 엇갈리는 지점이 극에 균열을 내는 셈이다. 

    ‘출산과 노령이 없는 사회’는 우리의 죽음이 인류의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감각을 준다. 곧 지금대로라면, 국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해야 하는 건 국가가 아닌 우리의 몫일까. 이런 부정적인 전망에 대한 선제적 대응 역시 정부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후반에는 젊음을 되찾은 부모가 또래의 자녀와 만나는 장면이 등장한다. 경제 인구로 다시 돌아가기에는 어렵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다. 곧 과거의 기억까지 사라진 건 아닌 것이다. 다소 허무한 결론에 의해 미래로의 진단과 새로운 정책의 실패가 여실해진다. 


    사실 극의 역할로서의 비중과 전체 작업의 연출로서의 지위가 혼동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극 안에서는 대등한 입장이지 않은 부분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아티스트명으로서 조기현이라는 이름은 남선희라는 이름의 축소된 비중을 즉자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했다. 동시에 남선희라는 축소된 지점의 잉여를 그 스스로 회수할 수 없음의 한계를 노정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 차원에서 이번 변방연극제의 특이점은 새로운 창작자의 유입이다. 또는 새로운 이름의 탄생이다. 이는 전문적인 공연자가 아닌 이들이 공연의 주체가 되었다는 부분에서도 연유하는 부분이다. 그 결과는 조기현을 비롯한 여러 창작자가 공연의 문법을 택하면서도 그것에서 미끄러지거나 차이를 발생시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는 그들은 텅 빈 형식 자체를 선택하거나 공연 외적인 시간을 구성하며 참여도를 키우기도 했다. 

    김혜원(이구미), 〈변방농장 '공중제B'〉ⓒ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여기에는 ‘다른’ 장소에 대한 선택도 크게 좌우했는데, 사실상 전반전의 변방연극제는 극장을 벗어나, 서울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엿보였으며, 탈극장, 탈서울은 그 장소 자체에 합목적성을 둠으로써 이동의 시간까지를 공연으로 흡수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보인다. 가령 기지촌여성평화박물관에서 열린 〈오프 리밋 off-limit〉은 “과거 미군 ‘위안부’였던 여성노인들과 반나절을 함께 보”내며 타자의 시간이 공연의 형식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부러 진행되었으며, 〈변방농장 '공중제B'〉는 고양 찬우물농장 내 텃밭 ‘마요문명’에서 “함께 모여 밭을 돌아보고 작물을 직접 수확하여 샌드위치를 만들어먹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사실 각각 공연의 주최자인 (사)햇살사회복지회나 김혜원(이구미)은 본래적으로 공연자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변화의 월담, 〈변방스포츠: 예술, 과학, 운동의 경계에서 만나는 날 것의 몸〉ⓒ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변화의 월담 역시 마찬가지인데, 〈변방스포츠: 예술, 과학, 운동의 경계에서 만나는 날 것의 몸〉은 인류의 스포츠를 경쟁의 목적이 아닌, 자신을 연장하는 수단, 상대방과 교감하는 매개로 가정한다. 짝을 지어 간단한 구기 종목의 기본적인 몸풀기 동작 정도를 하는 게 절반 정도라면, 다른 절반은 두 팀으로 나눠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축제, 퇴장이 끝이 아니라 다른 역할로 전이되는 기이한 상상력의 피구를 시현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잠깐 서로가 메모한 글을 무작위로 골라 읽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형식은 일종의 워크숍 형태로 진행되는 작업으로서, 굳이 공연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그것이 공연이 아니라는 구분 지으려는 것 역시 아니다. 그럼에도 이는 공연이라는 형식 자체를 확장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연극제라는 프레임 안에 재위치되었을 뿐이다, 기꺼운 합성됨을 통해. 

    우선, 코드화된 스포츠를 재전유하는 프로그램의 관객 참여는 퍼포머로서 전위적 몸짓을 체현한다, 의도치 않게. 훈련되거나 연습되지 않은 그 몸들은 즉각적인 효과를 그 스스로에게 전가한다, 자율적으로. 따라서 무언가를 지켜보는 관객의 자리는 전복된다. 워크숍의 가이드는 있지만, 행위의 주체는 관객이다. 아니 참여자다. 결국 이 워크숍/공연은 스포츠의 정신을 ‘변방’에서 찾고, 그것이 더러움을 상기시키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의 전복적인 상상력을 꿈꾸고 있다. 신체를 유연하게 다룰 수 있는 곧 그 경계를 파악하는 인체 생리학적 “과학”, 커뮤니케이션과 집단 지성의 놀이―피구는 규칙을 재정의하고 인지하고 습득하고 적용하는 과정을 겪는다.―로서 “운동”, 그리고 일종의 짧은 렉처로써 스포츠에 대한 철학적 정의의 차원으로부터 비롯된 스포츠의 재탄생과 참여, 마지막에 개인적 글쓰기로 체험을 승화시키는 작용에서 발생하는 문학으로서 “예술”은 엄밀하게는 그 각자의 경계까지를 지정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스포츠에 대한 급진적 정의를 수여하기에 이른다. 

    김자한, 〈그치? 별로지?〉ⓒ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김자한의 〈그치? 별로지?〉는 감독 김자한의 자전적 이야기를 주로 이야기로 풀어내고 재현을 더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관객과 매순간 함께 호흡하며 진행하는 일종의 스탠드업 코미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기저에 강력하게 흐르는 건 유머이다. 성공한 감독으로서 인터뷰를 한다는 가상의 전제로 시작하며 시네필로서 자신보다 많이 영화를 보고 아는 친구에 대한 동경이 김자한의 삶 전면을 지배하게 된다. 
    〈그치? 별로지?〉의 힘은 예술의 원동력이 자율적인 주체의 표현 욕망을 위한 것이라는 예술의 한 명제를 부정한다는 데있다. 이는 곧 외설적인 반경을 구성하는데, 경쟁 상대 혹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욕망이 예술가의 심리적 중핵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은 사실 김자한의 발화가 그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점에서도 자의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치? 별로지?〉는 예술에 관한 내용이 예술을 대체하고 있음에서 예술로 편입된다, 예술의 형식을 앞세우는 대신에. 결과적으로, 정말 재미있던 공연이었는데, 이는 개인이 공연자인 것과 배우가 퍼포머인 것 또는 작가-배우가 되는 것과의 괴리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차원에서 〈그치? 별로지?〉는 삶에서 건너오는 연극이라는 형식을 다시 이상적인 꿈으로 부상시킨다, 연극의 틀을 지시하면서.
     

    JAT Project, 〈어떻게 내가 삐걱거리지 않을 수 있겠어〉ⓒ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JAT Project의 〈어떻게 내가 삐걱거리지 않을 수 있겠어〉는 포그머신으로 공간 전체를 연기로 가득 채워 희뿌연 배경 아래 공간 중앙에서 바깥으로 시선의 방향을 두고 관객들이 교차하고 뒤섞이도록 의자들을 배치해 둔 가운데, 배우들이 뒷모습으로 창가 쪽에서 주로 둘씩 대화를 하는 걸 지켜보는 구조로 진행된다. 이 공연의 형식은 그것과의 거리이다. 명확해지지 않는 발화와 시각의 한결같음. 발화는 치솟지 않는 구조, 일상, 창문 너머의 사물과 연관을 맺는다, 또는 맺어야 한다. 발화의 컨텍스트가 정확하지 않은 역할 또는 파악될 수 없는 역할 간의 관계에서의 사적인 부분으로 환원되어야 하고, 나아가 그러한 사적인 차원을 뛰어넘어 객관적 시각을 구성하며 전적인 동의를 얻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사는 망각을 부른다. 절대적인 공연의 형식만이 남는다―오히려 떠도는 이야기들을 토대로 만든 〈들.뜬〉이 그 형식에서 기어이 서사의 힘을 획득한다면.

    임의그룹, 〈아니, 아니에요! - 왜요?〉ⓒ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임의그룹의 〈아니, 아니에요! - 왜요?〉는 설치로부터 퍼포먼스를 연장한다. 발화 대신에 타자로 스크린의 자막을 띄운다. 그리고 둘은 자신들이 퍼포머가 아님을 주지시킨다. 이를테면 시각장의 한 사물로서 위치한다는 것인가. 그렇게 관심을 분산시키면서 몸짓을 순전한 행위로 전치시키고자 한다. 전체적인 시각장의 구조를 매개하는 일원이 된다. “사랑”과“정의”와 같이 무언가 나타났다 사라지는 단어들은 온전히 포착되지 않으며 시각 질서의 균열을 일으킴으로써 온전히 단어의 함의가 각인될 수 없음을 또는 주장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발화한다. 곧 의지 없음과 의미 없음이 교차하는 지점에 임의그룹의 퍼포먼스가 있다, 인구 감소의 현실을 맞는 무력한 주체의 자기 지시 같은 차원에서.
    〈무출산무령화사회〉가 그와 유사한, 공고한 현실을 쌓고 지탱하고 있다면, 임의그룹은 이를 자조하면서 부딪힌다. 가령 누워서 건조하게 노래하며 그 노래의 흥취를 애써 지워내면서 차라리 증폭 장치로서의 성대와 마이크의 유사성을 확인하며―일종의 장치로서의 몸―, 그 두 사이 자체를 가시화하는 것처럼―‘텅 빈 극장의 지시체들’. 곧 〈무출산무령화사회〉가 정책의 무의식이라면, 〈아니, 아니에요! - 왜요?〉는 그에 대한 젊음의 증상과도 같다. 

    원의 안과 밖, 〈정전의 밤〉ⓒ박혜정[사진 제공=서울변방연극제]

    2023 변방연극제는 새로운 창작자와 개념, 장소, 형식 등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오염의 키워드를 어느 정도 함입했는지는 의문이지만, 탈연극적 경향은 존재와 장소의 타자들로 나아가는 수행과 함께 탈연극적 주체의 참여를 통한 연극이라는 형식의 공고함을 비켜나는 것으로써 구현되었다. 곧 타자를 호출하기와 스스로의 타자성을 깨닫는 것이 만나는 지점이 모색되었다. ‘원의 안과 밖’의 〈정전의 밤〉이 “회차별 ‘동행자’”를 “모집”해 연극의 장면을 목격하는 관객의 자리를 수여하려 했던 것과 같이, “송전탑이 세워진 밤의 산길”에서 연극은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문학과 현실과 맞바꾸는 대신 참여와 경험, 함께의 미학으로 전환한다, “정전의 밤”이 가리키는 바가 분명함에도, 아마도 어떤 명확한 언어의 지시를 지움으로써. 

    변방연극제는 기존 극장의 관람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직접 걷고 이동하고 움직이고 행동하는 방식 자체가 중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이 극이 된 시대, 극보다 더 첨예하고 정치적인 환경, 더 많은 인지와 감각의 확장이 필요한 시대에 대해서, 변방연극제는 탈극장을 꿈꾸는 듯하다. 다양한 발화를 전면에 드러내는 작업들, ‘불온한 발표회’의 세 작업들같이 연극이라는 형식을 ‘굳이’ 유지하지 않으면서 배우와 퍼포머의 구분을 벗어나는 것―임의그룹이 그러한 정의 자체의 인공적 성격을 피하고자 했다면―으로써 퍼포먼스의 수행의 역량을 가져가고자 했다. 가령 이는 김자한의 자전적 서사와 극적인 지형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는 지점과도 연결된다. 
    이후에는 2023년의 시작을 자원으로, 이전 작업을 확장하는 유연한 방법도 가능할 것이고, 다시 2023년을 지양하는 방식으로 구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둘은 물론 다르지 않은 방식이다. 결과적으로, 변방연극제가 가진 기존의 무겁고도 어두운 어떤 두 코드가 맞물려 들어감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질서와 언어를 찾는 시도와 과정이 드러난다는 점에서는 긍정의 요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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