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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숲우화-짐승의 세계〉: 연극을 만들어 나가는 힘의 요체란
    REVIEW/Theater 2023. 9. 12. 00:24

    〈이숲우화-짐승의 세계〉ⓒ보통현상(이하 상동). ‘여우와 두루미’에서 배우 김솔.

    〈이숲우화-짐승의 세계〉(이하 〈이숲우화〉)는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이 말해주듯 ‘이솝우화’의 여러 서사를 언어 유희적 농담으로써 전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이솝이란 남자’. 뒤이어 ‘여우와 두루미’,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배짱이’, ‘달에 간 까마귀’로 이어지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마지막 막에 이르러서야 파생 서사의 일단락을 짓는다. 곧 서사의 유희로써 유희적인 서사를 갈음하는 실험이든 유희이든 그 형식은 서사의 내용을 명확하게 만들기보다는 서사를 이렇게 간단하게 작동시킬 수 있다는 차원을 보여준다. 곧 서사와 유희 사이에 무수한 서사‘들’이 자리한다. 반면, ‘달에 간 까마귀’는 앞선 작업들을 일종의 예열 작업으로 두면서 사이의 서사로서 위치하는 게 아닌, 서사 자체의 동력을 가시화한다. 

    엄밀히 이 서사는 극장에 널브러진 사물들, 그것의 정위되지 않음 그리고 벌거벗겨짐에서 온다. 이숲우화‘들’ 사이의 시간은 서사가 잠가지고 기다려지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닫히지 않는다. 사물들은 조종되고 재위치되고, 그 사물들 사이에 여분의 행위자로서 배우들이 존재한다. 여기서 하는 말들은 명확하게 들리지 않지만, 현재의 시간이 비어져 있음, 비움을 향한 시간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분명히 극으로부터 독립된 채 현재의 시간을 연기한다. 그리고 이 시간은 극의 시간이 아닌, 극장의 시간이 극의 시간을 초과하며 잠식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이 ‘달에 간 까마귀’에서 구현된다. 곧 ‘소품’으로 풀려나온 사물들은 극의 질서에서 안착된다. 

    ‘개미와 배짱이’에서 배우 이자경.

    희곡을 쓴 김단추는 처음에 진행자의 시간을 배정함으로써 이 작업이 서사의 완성이 아니라 완성되지 않은 채 서사를 겉도는 서사적 조각들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동시에 열리고 닫히는 막의 경계가 있고, 막이 되는 여분의 시간이 극의 시간일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공교롭게도 그 여분의 시간에 자리하는 존재가 김단추의 전신인 김솔이다. 결과적으로 김솔은 배우 김솔을 만들기 위해 김단추를 만들어 내고, 김단추는 김솔을 배우로 내세우기 위해 존재한다. 존재의 유착이 존재를 다른 존재들로 길러낸다. 김단추와 김솔 사이에는 옴브레의 전신인 김헌기가 김솔과 연출로서 존재한다. 하지만 김헌기는 음악을 위해 옴브레를 소환하지는 않는다. 

    ‘달에 간 까마귀’는 사실상 연극을 연기하는 작업이다. 겹-존재 혹은 이중적인 자아로부터 출발하는 극은 역할과 나의 관계를 조명하는 데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온전한 연극의 완성보다는 연극에 대한 진실을 누설하는 데 초점이 있다. 연극 현장이 품고 있는 연극의 이데아는 짧은 순간으로 삽입되며, 이는 사실적인 시간과의 대비 속에서 발현된다. 그것은 일상의 일부를 이룬다. 곧 연극이 아닌 것이지만 연극을 향하고 있음, 연극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연극을 수행함의 형식은 〈이숲우화〉가 연극의 주위를 서성이면서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숲우화〉는 일종의 연극-되기의 지난하고 고단한 시간을 구성하면서 연극 자체를 이야기한다. 

    ‘여우와 두루미’에서 (사진 왼쪽부터) 김솔지, 김솔 배우.

    〈이숲우화〉는 연극을 매개하면서 연극이 된다. 가령 김솔은 작가 이솝을 연기한다. 그리고 매개한다. 곧 김솔은 이솝인 것이 아니라 이솝을 자처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이솝이라는 역할에 다가가는 김솔이라는 배우가 존재하게 됨에 가깝다. 이는 신비한 현상인데, 이솝이라는 이름이 언어의 유희로부터 우연히 작동하고 있음은 이솝의 캐릭터로서의 토대 없음을 드러내는 동시에 이솝을 생성하는 김솔의 허우적거림과 맞닿기 때문이다. 곧 이솝이라는 가공의 인물의 작위성은 이솝의 말에 대응하는 김솔의 연기의 그것이기도 하다. 

    이솝과의 명확한 거리는 김솔의 연기가 갖는 어떤 우스꽝스러움, 허름한 행색, 붕 떠 있는 목소리 등으로 인해 주어진다. 다른 한편, 이솝과의 거리는 이솝이라는 캐릭터의 현실 안착의 실패에 상응한다. 이는 원본에서 벗어나기로서 〈이숲우화〉가 가진 불안정한/유연한 서사 차원에서 유래한다. 이솝이 이후 나오는 네 개의 이야기를 쓴 저자라면, 연출과 배우 두 명이 출연하는 ‘달에 간 까마귀’는 〈이숲우화〉의 순수한 내용을 이루다. 

    ‘개미와 배짱이’에서 (사진 왼쪽부터) 김솔지, 이보미 배우.

    〈이숲우화〉의 특이한 점은 막과 막 사이의 시간을 고스란히 둔다는 것인데, 소품을 옮기거나 무대를 정비하는 시간이 현장의 감각을 고스란히 수여한다. ‘달에 간 까마귀’는 바로 그 지점에서, 연극 외적인 시간으로서 연극이라는 실재를 재현한다. 연출은 막무가내로 까마귀들의 대화로 연극을 만들려고 하고, 까마귀의 울음이라는 ‘하나의’ 기표―그 차이들 자체도 우리는 감별할 수 없다.―, 곧 메타-언어 외에는 그 기의가 드러날 수 없음에 대한 젊은 배우(이보미 배우)의 항의는 연출(김솔지 배우)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연출은 배우의 말에 직접 대응하기보다는 자신의 특별한 영감으로 고양시킨다. 그의 예술가로서의 자아는 비대하고, 그 바깥의 말들은 모두 그에 흡수되며 무력화된다. 

    연출의 지시가 부조리하다는 사실은 사실 웃음으로 승화되는데, 그의 폭력적이고 일방향적인 언행은 그의 의식 속에서는 인지되지 않는 것이며, 그 바깥에서만 풍자를 이루기 때문이다. 선배 배우(이자경 배우)는 그 둘의 사이를 중재하고자 하며, 곧 악의 축을 고정시키며 거리를 두기보다는 어떻게든 극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 곧 관계 지향적인 작업의 완성이 연극임을 규정하면서 연극의 이면, 곧 무수한 시행착오의 과정이 매끈한 연극의 표면으로 드러날 것임을 드러낸다. 그의 중재자로서의 좌표는 연극을 오래 수행했다는 데 있고, 연출과 배우의 역할을 경험적으로 잘 안다는 데 있다.

    ‘달에 간 까마귀’에서 (사진 왼쪽부터) 이보미, 이자경, 김솔지 배우.

    한 편의 소극은 여전히 연극이 비대한 작가-연출가의 의식과 그것이 명문화-지시되는 과정에 대한 배우의 적응 훈련으로 이어지는 일방향적인 차원의 과정이 전제되는 연극이라는 보편적 진실에서 유래하는 것일 수 있고, 그런 차원에서 〈이숲우화〉 역시 재미를 넘어 여전히 오래된 어떤 부조리함의 익숙함이 세밀한 문화지적 보고처럼 감각되는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달에 간 까마귀’는 상당히 리얼하게 재미있는 작업이라고 할 것이다. 

    ‘달에 간 까마귀’는 연극을 한땀 한땀 수공예적 노동으로 만드는 것임을 드러내며, 그 안에서 발생하는 비의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의 과정 자체가 사실 즉물적인 상상력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연극의 (올바른) 이념을 내용으로 하는 (보통의 연극과는 다른) 연극이 아니며, 연극을 만드는 것 자체가 연극의 형식이며 그 자체가 연극(의 이념)을 보여주고 있는 연극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자못 진지하지 않고 또 현장 자체와 연극이 뒤섞인 까닭에 적잖이 축축하고 눅진하다. 곧 진지하지 않음으로써 진지하다. 그것은 정확히 현장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이숲우화-짐승의 세계

    공연 일시: 2023.08.09(수)~20일(일) 평일 8시 | 토,일 3시
    공연 장소: 산울림 소극장

    작: 김단추
    연출: 김헌기×김솔
    출연: 이자경×김솔×김솔지×이보미
    조명/시노그래피: 정유석
    음악: 이한빛
    그래픽: 보통현상
    기획: 이보람
    진행: 손유라

    주최/주관: 소극장 산울림
    제작: 창작집단 우주도깨비×보통현상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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