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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 공간에의 서사를 세공하기 또는 넘어서기
    REVIEW/Theater 2023. 11. 7. 01:33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주인공 혜경 역의 류혜린 배우.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이하 〈잘못된 성장〉)는 “지방 소도시 국립대학 식물분자생물학 연구실”에 있는 관련 종사자들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히라타 오리자의 과학연극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 극사실주의의 외피를 입은 공과 사가 혼합된 제3의 공간에서 등장인물들은 전문적인 지식이 자연스레 뒤섞이는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 인간에 대한 성찰과 질문을 향해 나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잡초인 애기장대의 저항성 유전자 발현을 연구하며 박사 과정을 밟는 주인공 혜경(류혜린 배우)을 통해 〈잘못된 성장〉 역시 비인간 자체에 대한 연구, 곧 식물 주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는 전문 직종을 가진 존재들의 언어,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 정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전자와 후자는 구체성과 보편성의 차원으로 서로를 지지하며 반영한다. 전자가 독특함의 코드이자 표면의 코드라면, 후자는 일반적인 코드이자 심층 기호이다. 
    이러한 식물 개체군을 다루는 부분은 식물의 삶에 집중하기보다는 그에 빗대 인간의 삶을 투영하며 전문 분야의 특정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또한 실험이 성공하(고 그로 인해 세계가 변경되)지 않고 실패하(고 그 실패로 인한 세계의 변경 역시 이뤄지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잘못된 성장〉은 서사의 새로운 전형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으로 나아간다.

    한편, 실험의 강박적이고 강압적인 성격은 혜경에게 그의 지도교수인 응용생명과학부 교수 은주(이지현 배우)가 가하는 바고, 이는 은주의 실험 데이터 조작에 대한 의혹과 교차한다. 곧 실패한 가설은 실패하지 않은 것으로 처리되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된 실험의 실패가 강조되는 반면, 그 실험의 실패로부터 가설의 부적합성이라는 전제가 부상하기에 이른다. 이 강박에 대한 수수께끼가 “잘못된 성장의 사례”가 되어 가는 혜경의 서사보다 더 중핵에 자리한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사진 왼쪽부터) 인범 역의 이휘종 배우, 혜경 역의 류혜린 배우, 지연 역의 박인지 배우.

    한결같은 태도로 실험실을 지키고 배회하는 혜경의 모습이 식물 그 자체라면, 그가 산출하는 감정의 미묘한 변화는 쉽게 감지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블랙박스처럼 처리된다―마찬가지로 무언가 변화가 있을 것임에도 식물의 감정이나 그의 환경 적응에 대한 정보 역시 알기 어렵다. 그의 주변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모두 그보다 입체적이며 감정의 변화를 생동감 있게 드러낸다. 반면, 혜경의 역할이 상대방의 특징을 더 잘 드러내는지의 여부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그는 소통보다는 스스로의 역할과 표현하지 않는 감정의 정체 구간을 택하기 때문이다. 

    혜경의 폭발은 처음 정전의 상황, 곧 실험실이 일시적으로 무력화된 가운데, 식물학자를 꿈꾸는 인턴 인범(이휘종 배우)이 처음 등장하며 일으킨 작은 사고를 증폭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전기로부터 작동하는 실험실의 세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장면은 이 세계가 가진 인공성과 인간 문명의 전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인물들의 새로운 만남, 그리고 장소 특정적 나아가 장소 고착적인 연극의 표면을 새롭게 재세공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리고 혜경의 내재적인 폭발은 전기를 중단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아날로그적이고 직접적인데, 실험실의 식물 화분들을 갈아엎고 버린다는 지점에서 그러하다.
    그의 분노가 그가 언제나 상황을 인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필연적임에도, 곧 유일한 변화의 선택지를 조금 더 강조해서 보여주는 것임에도 그의 분노는 현실에 어떤 타격을 주기보다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극에서 망실되고 만다. 오히려 은주의 내밀한 삶의 고백으로 극의 엔트로피는 옮겨가며, 아무도 보지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분노의 폭발은 자기 환원적인 타격으로서, 애처롭고 답답하며 그 자신에 대한 멍에를 한 차례 더 확인시키는 것으로서 관객에게 체현된다. 

    혜경 역의 류혜린 배우.

    석사 과정을 밟으며 논문 통과를 향해 주력하며 자신이 보낸 이메일에 관한 은주의 응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예지(공예지 배우)는, 인범의 정전 시 ‘미숙한’ 대처, 곧 실험장비들을 손으로 잡아 “오염”되어 폐기해야 할 것을 만든 것을 인지시키는 과정에서 인턴보다 나은 지식의 우위를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인범은 처음부터 비전문가인 대부분의 관객의 입장에서 전문 지식 정보를 쉬이 알 수 있게 하는, 의도하지 않은 매개의 지점을 구성하는 하나의 입장이 된다. 그에게 불이 켜진 실험실은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인 동시에, 배우고 익혀야 할 무엇이 된다는 점에서, 그와 정전된 실험실과의 맞물림이 의미를 확보한다. 

    〈잘못된 성장〉은 혜경이 실험실에서 똑같은 실험 주기를 반복하며 결과 지표를 기다리지만, 끊임없이 실패하는 과정에서 어떤 자격을 취득하기 위한 통과의례를 겪는다는 점에서, 혜경의 성장 서사를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실은 가로막힌 성장에 대한 침울한 속내만으로 집약될 뿐이다. 곧 실험은 교수의 잘못된 설계에 따른 부단한 실패만을 겪고 있었으며, 중반에는 혜경 역시 그 사실을 추정하고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패는 예기된 것으로서, 어쩌면 혜경 스스로도 예견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참고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애초에 성장이란 없었으며 과학의 연속적인 언어 또한 없었다. 

    (사진 왼쪽부터) 은주 역의 이지현 배우, 혜경 역의 류혜린 배우.

    은주의 서사, 곧 아이의 죽음과 뜻밖의 빠른 복귀라는 임시 도피처로서의 실험실, 그리고 실험에 대한 강박은 출산 후 복귀한 포스트닥터 지연(박인지 배우)이 갖는 가정주부의 삶을 거의 유일하게 어쨌건 간에 도피할 수 있는 실험실에 대한 양가감정과 함께 전문 직종을 가진 여성의 첨예한 삶에 대한 고찰로도 확장 가능한 부분이다. 반면, 은주의 서사는 섬세하게 이해되기에는 급작스럽고 결과적으로 미스테리하거나 병리적인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보이고, 지연의 서사 역시 평소의 그의 이야기로서는 빠르게 터져 나오며 곧 해소된다. 

    〈잘못된 성장〉은 단일한 실험실이라는 공간의 폐쇄성과 제약성을 여러 인물의 다양한 양상을 통해 극복하려 하지만, 외부의 사회 환경을 그 속에서 입체적으로 연장해 들어오는 서사적 확장의 전략은 가져가지 못한 듯 보인다. 즉 첫 번째 정전을 통한 무의지적인 환경의 변화를 구성하기―인지적 새로움―는 두 번째 실험실에서의 의도가 개입된 사건을 통해 환경 변화를 줌에 의해 적극적으로 세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려고 함에도 이전 세계의 공고한 물리적 차원을 더 강렬하게 드러내는 바 크다. 지연이나 은주의 서사는 혜경의 서사 없음, 또는 존재 자체가 서사가 되는 것과는 다르게 현실의 드라마적인 부분이 매우 강함에도 이는 실험실이라는 공간에서 거세되어 있다가 돌연 출현하며 해소된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유미”라는 이름의 식물 블로그를 운영하는 도윤(황상경 배우)은 인범이 식물학 관련해서 만남을 열망해 온 인물이었고, 그렇게 실험실로 갓 진입하는 인물과 실험실 혹은 학교 내에서 (그것을 은폐하고) 식물학이라는 바깥을 연장한 인물은 처음 만나게 된다. 실험실은 곧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경계의 영역으로 규정된다. 이 둘은 그렇게 신선하게 이 실험실의 새로운 지식 영역이나 일상의 연장으로서의 인지적 영역으로 식물학을 번역하며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사진 왼쪽부터) 인범 역의 이휘종 배우, 예지 역의 공예지 배우.

    〈잘못된 성장〉은 논문의 형식을 전용한다. 곧 일종의 과학 실험 보고서 형식의 목차를 이루는 각각의 챕터들이 순차적으로 자막으로 나오고, 혜경의 삶이 그 양식을 통해 전유된다는 점은 일견 흥미롭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건조하게 그의 삶을 기술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강박적으로 비친다―그러한 서술 체계에 의해 인간의 생명력 역시 건조하게 감축될 수 있다는 점에서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그 실험 역시 성공한 실험의 결과를 보여주지도 않았지 않은가. 

    마지막으로, 〈잘못된 성장〉에서 실험실의 장비들과 정교하고 자잘한 것들이 채우는 무대 세트의 극사실성은 작동하는 전기, 곧 전원이 켜진 장치로 잘 드러나지만, 그것들이 내는 소음은 전적으로 그 기계로부터의 사운드가 아닌 일정한 외부 사운드의 삽입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완전히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극사실주의는 일종의 결여―결코 완벽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나 과잉의 양식―결여를 상쇄하려 어떤 것을 더 투입하거나 부재하는 것으로서 결여를 전제한다는 점에서―이다. 

    〈잘못된 성장〉은 과학의 언어와 공간을 전유하며 과학자의 서사를 구성한다. 더디고도 긴 과학 실험의 특징을 식물의 그것과 상응한 것으로 또한 구성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과학에 대한 언어는 미래적이거나 창의적인 세계를 열기보다는 닫힌 현실의 원환을 구성한다. 거기에는 인간을 억누르고 지워내는 권위의 언어가 전제되어 있고, 이러한 지점은 과학 서사에 대한 비판적 시선보다는 과학이라는 외양 아래 인본 위주의 환경을 정초하려 한다는 점에서 (곧 과학 서사로서) 〈잘못된 성장〉은 독특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일시: 2023년 9월 5일(화) ~ 9월 23일(토) 
    화수목금 8시/토일 3시 *월 쉼 (총 17회)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작·연출: 강현주
    출연: 공예지 류혜린 박인지 이지현 이휘종 황상경
    조연출: 나수경
    무대 디자인: 정승준
    소품 디자인: 권민희
    조명 디자인: 정유석
    음악: 옴브레
    음향 디자인: B.P
    영상 디자인: 정혜지
    의상 디자인: 오현희
    분장 디자인: 정지윤

    관람연령: 14세 이상
    러닝타임: 120분 (인터미션 없음)

    문의: 두산아트센터 02) 708-5001 doosanartcenter.com 

    접근성 안내
    수어통역: 5월 12일(금), 13일(토), 14일(일)
    한글자막 해설/음성소개/무대모형 터치투어/휠체어석/안내보행/문자소통(전 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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