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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극단(김광보 연출),〈벚꽃 동산〉: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서
    REVIEW/Theater 2023. 8. 7. 01:11

    국립극단(김광보 연출), 〈벚꽃 동산〉 공연 사진[사진 제공=국립극단](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바랴 역 정슬기,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역 백지원, 피르스 역 박상종, 아냐 역 이다혜, 가예프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 역 강신구, 시메오노프 피시치크 보리스 보리소비치 역 곽은태, 로파힌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역 이승주 배우.

     


    사실주의 연극으로 알려진 체호프의 작업 중 〈벚꽃 동산〉이 갖는 현재의 함의는 무엇일까. 물론 이는 의미에 대한 맹신이 아니라 고전이라 불리는 것의 관성적 도입에 대한 우려와 회의의 반문이다. 그것이 갖는 사실성은 표현의 층위와 함께 컨텍스트의 차원에서도 유효한가. 일종의 사실주의라는 지지난 기표를 어떻게 재인지할 것인가. 무엇보다 김광보 연출의 〈벚꽃 동산〉은 원작을 무대 위의 시점 속에서 재편하며 인물들이 가진 역량을 새롭게 구성해 낸다. 
     
    러시아 혁명 이후의 시대 상황에서, 혁명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서로를 마주하고 있지 않은 듯 보인다. 시대정신은 응결된 양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벚꽃 동산〉이 혼란과 격변의 불안정함을 투사하고 있다면, 오히려 이는 새로운 시대와의 조응에서가 아니라 그 반대의 차원에서 기인한다. 일상은 평범하고 견고하다. 라네프스카야 역시 가장 직접적으로 혁명의 효과와의 연관이 있을 뿐 그 언어와 조응하고 있지 않다. 
    트로피모프(윤성원 배우)는 혁명의 언어를 전유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계속해서 와인을 권하는 로파힌과의 만남에서 트로피모프는 이를 곧 상징적으로 자본주의의 이기를 거부하며 대신 농노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이는 그를 지식인으로 만들어 주기는 하지만 현실에서 그 자리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데―지식인으로서의 어떤 방어에 다름아니다.―, 아냐와 평범하게 이 공간에 머물며 여전히 대학생으로 어떤 전개도 가져가지 못하는 점에서 그 역시 무력한 존재이다. 
     

    (사진 왼쪽부터) 트로피모프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역 윤성원, 아냐 역 이다혜, 피르스 역 박상종, 바랴 역 정슬기,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역 백지원, 부랑인 역 박진호, 로파힌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역 이승주 배우.

    벚꽃 동산의 지주인 라네프스카야(백지원 배우)는 몰락한 귀족으로서 무대를 스치듯 지나간다. 그는 좀처럼 이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특히 부량인(박진호 배우)이 혁명을 이야기할 때,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현재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의 모습이다. 여기서 그는 마치 표피적으로 ‘시찰’하고 자리를 뜨는 관료처럼 보이는데, 우선 둘의 대비는 신분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한편, 주인공인 라네프스카야에 비해 매우 짧은 등장임에도 부량인은 둘의 관계를 전복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라네프스카야의 무기력하고 낭만적인 현실에 대한 이해나 의지 없는 비주체적―‘노예’가 없으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주인의 변증법적인 구조 아래―인 ‘상태’는, 삶을 희구하고 의지하는 민중의 상을 아이러니하게 재구성하기 때문이다. 곧 부량인에게 돈을 주며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 유기하며. 여기서 부량인이 뒷모습에 가깝지만 굳건하게 무대를 지지하고 있는 것에 반해, 라네프스카야는 무대에 정박하지 못하고 이미지로 삐져나오는 것에 가깝다. 또한 라네프스카야는 두 번의 분기되는 그의 강력한 과거와 결부되는 방으로서 특히 두 번째 기억―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포맷된 트라우마적 기억-공간에서 미래를 기획하지도 못한다. 
     

    (사진 왼쪽부터) 샤를로타 이바노브나 역 하지은, 두나샤 역 홍지인, 야샤 역 장석환, 에피호도프 세묜 판텔레예비치 역 송철호 배우.

    어렸을 적 라네프스카야의 방이 중앙 무대를 이루는 가운데, 이를 둘러싼 무대 안쪽의 정면과 양 옆면으로 이어지는 3면의 유리 구조물은, 진공으로 지난 기억을 현실로부터 방어한다. 동시에 현실의 환기 역시 가로막는다. 라네프스카야의 어린 아들이 자라다 죽었고 자신이 어린 시절 있었던 이 공간에서, 그 바깥의 뼈대는 그 안의 인물들을 유폐시키지만, 무대로서는 증폭된 음향과 집중을 창출한다―반면, 통로 공간은 소리의 굴절과 감축의 양상을 빚는다. 집이 경매에 들어간 상황에서 무대 정면의 커튼 뒤에 있는 뒤쪽 공간에서 무도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비친다.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역 백지원 배우.

    라네프스카야의 슬픔은 특별한 공감을 얻기 어렵다. 백지원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는 연기의 정석을 보여주는 것이겠지만, 〈벚꽃 동산〉은 차라리 그 바깥의 계급에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관계의 긴밀한 유착이 극 중 현실―흐릿하게만 드러나는, 극 너머의 현실이 어느 정도 개별 인물에 침투하고 있는지는 차치하고―을 지지하고 있고, 그 반대편에 라네프스카야가 위치하고 있음이 명확해진다. 그것은 미천하거나 평범한 존재 간의 사랑 혹은 그러한 감정이다. 
    로파힌의 하인인 야샤(장석환 배우)와 그를 사랑하는 하녀 두냐샤(홍지인 배우), 그리고 두냐샤를 짝사랑하는 집사 에피호도프(송철호 배우). 연인 관계인 라네프스카야의 딸인 아냐(이다혜 배우)와 그의 과외 선생이자 대학생인 트로피모프. 반면, 라네프스카야에 의해 일시적으로 연관될 뿐, 잠재된 채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 라네프스카야의 양녀인 바랴(정슬기 배우)와 로파힌의 관계까지.
    라네프스카야의 멜랑콜리적 우울에 비해 그 감정들은 생생하고 즉각적으로 전달되지만, 특별히 이러한 관계 양상이 물리적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음,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 외에 다른 어떤 현실의 전개를 이끌어 내는 건 아니다. 〈벚꽃 동산〉은 ‘무대’로서의 현재성을 가져간다. 그것은 가장 사실적인 무엇이다. 하나의 프레임 안에서 증폭되고 집중된 배우의 음성과 이미지는 관객을 웃기고 울린다. 거기에는 각 캐릭터가 역할을 초과해서 고유한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도 한몫한다. 곧 배우들이 등장할 때나 무대 위에 놓일 때 대사 외에 지연되거나 과잉되는 연기의 양식을 선보이며 수행성을 띠는 순간들이 있다. 
     

    (사진 왼쪽부터)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역 백지원, 아냐 역 이다혜, 시메오노프 피시치크 보리스 보리소비치 역 곽은태, 야샤 역 장석환, .로파힌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역 이승주 배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이 웅얼거리는 하인 피르스(박상종 배우)의 등장 역시 그러하다. 그의 언어는 견고하게 인지의 틀을 비켜난다. 〈벚꽃 동산〉에는 라네프스카야를 필두로 벚꽃 동산을 떠나는 사람들과 경매를 통해 새로 벚꽃 동산의 주인이 됐지만 한동안 이곳을 떠나는 로파힌 일행까지 빈 집에 그가 혼자 남아 쓸쓸이 죽음을 맞이한다. 과거의 완전한 종식의 주인은 벚꽃 동산의 주인도 자본 시스템을 통해 이를 쟁취한 자 역시 아니다.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그의 말은 벚꽃이 지는 삶의 유한함에 대한 메시지로, 무대에 벚꽃이 떨어지는 것과 함께 서서히 사라지며 녹아내리는 듯한 그의 육신은 벚꽃 오브제 자체를 체현한다. 
     
    〈벚꽃 동산〉은 피르스의 웅얼거림이 언어의 형상을 띠는 대신 그의 존재 자체의 퍼포먼스성으로만 수렴되는 것과 같이, 개별 인물들의 순간적인 현존 자체에 주목한다. 이들이 하나의 벚꽃처럼 현재를 밝히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피르스의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비로소 인지 가능한 주체로 부상하며 사라짐 이후의 세계를 예비하고 지시하며 마침내 완성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벚꽃 동산〉은 결국 판타지가 실재를 대체하며, 사라짐이 주는 쓸쓸함의 정동을 육체의 허물어짐으로 구제하며 각인하려 한다. 이러한 기억의 순간은 결국 원작이 지닌 혼란한 사회상에 대한 측정할 수 없는, 반응할 수 없는 개인들의 무력함을 오늘날의 우리와 연결 짓는 대신, 극적인 단 하나의 위대한 순간에 대한 기억을 강조하며 해석의 차원을 유예하는 것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3.05.04.~05.28 평일 19시 30분 / 토, 일 15시(화요일 쉼) ※ 5.5.(금) 어린이날 15시, 5.15.(월) 공연 없음, 5.20(토)-5.22(월) 음성해설, 한국수어통역, 한글자막 운영
    공연 장소: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
    관람등급: 14세 이상 관람가
    소요시간: 110분(인터미션 없음)

    작/연출: 안톤 체호프 
    작, 김광보: 연출

    ■ 출연진
    라네프스카야 류보비 안드레예브나: 백지원
    로파힌 예르몰라이 알렉세예비치: 이승주
    바랴: 정슬기
    아냐: 이다혜
    가예프 레오니드 안드레예비치: 강신구
    트로피모프 표트르 세르게예비치: 윤성원
    시메오노프 피시치크 보리스 보리소비치: 곽은태
    샤를로타 이바노브나: 하지은
    에피호도프 세묜 판텔레예비치: 송철호
    두나샤: 홍지인
    피르스: 박상종
    야샤: 장석환
    부랑인, 역장: 박진호

    ■ 스태프
    번역: 오종우
    무대: 박상봉
    조명: 김창기
    의상: 유미양
    음악: 옴브레
    사운드: 목소
    분장: 이동민
    소품: 정윤정
    안무: 이경은
    조연출: 김하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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