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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영 안무, 〈비수기〉: 춤이 시작되는 장소REVIEW/Dance 2024. 10. 17. 10:06
〈비수기〉는 현실 공간의 전유와 문화 양식의 참조를 통해 완성된다. 이는 무대가 실존적 주체의 무정형적 터전이 되는 대부분의 공연과 다르게, 무대가 현실의 변형이거나 변환이라는 차원에서 출발함을 의미하는 한편, 현실 공간이 극장을 다른 세계의 입구로 지정하고 있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 변환은 이 공간에서라기보다 이 공간 내에서 이뤄짐으로써 가능해진다. 두 남녀가 앞쪽의 테이블을 항하여 바닥이 파인 중앙의 자리에 앉고 정면의 스크린을 응시하는 첫 번째 장은, 병풍과 같은 무대가 반쯤 옆으로 펼쳐지는 데 이어 마지막으로 비닐막이 걷히고 완전히 확장된 세트 아래서 종결된다.
펼쳐지는 무대에서 시종일관 무미건조한 표정―특히, 처음 일관되게 스크린을 향한 두 남녀의 심드렁한 눈빛과 몸짓 아래 진행되는 일상의 시간성은 부조리극의 한 단면을 출현시키는 것처럼 보인다.―으로 반복적이며 다분히 양식적인 춤이 지속되며, 이는 무대가 재세팅되는 과정 아래에서도 그러하다. 이는 공간의 임시 구조적 측면을 드러내지만, 춤의 작동이 가진 인공성을 함께 드러낸다. 오히려 후자의 차원은 희화화되면서도 부박한 지위를 획득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데, 이는 춤의 기계적 움직임이 세팅된 장소에 의해 강화되고 적용되는 것임을 현재화하기 때문이다.
〈비수기〉의 양식적 춤의 공고함은 변화하는 가상의 장소성이 가리키는 구체적 현실로부터 온다. 여기서 장소와 춤의 관련성은 절대적이기보다 유연한 편인데, 곧 장소가 춤의 절대적 원리가 아닌, ‘춤’이 자리하는 무대 디자인의 영역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객이 보는 건 일종의 스튜디오 공간에서 춤이 녹화되고 있음을 본다고 가정할 수 있지 않을까. 〈비수기〉에서 춤은 주체의 이념이 튀어나오는 행위이거나 실천인 대신에, 그 자체에 매진하는 신체 그 자체로서 직접 관객을 향하는 반면, 그것은 소통의 언어가 아닌 문화의 언어로서 지시된다.
이 춤의 양식성―‘이 춤은 결정적으로 순수함을 지향하지 않는다. 다만 춤에 대한 열정을 순수하게 간직할 뿐이다.’―은 장소의 설정됨이 가정하는 어떤 환경, 문화, 장르, 시간을 향하므로, 관계된 제반의 참조점들을 불러오며 이 춤의 ‘정체’를 파악해야 할 것이다. 허공을 가볍게 가르고 찢는 손짓과 잔 스텝과 전체적으로 절제된 미시 몸짓의 영역은 디스코라는 장르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영화 〈펄프픽션〉(1994)에서, 존 트라볼타와 우마 서먼의 디스코 신에 대한 오마주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얀 벽을 배경으로 상대적으로 멜랑콜리한 정서가 남녀의 관계로까지 연장되는 중반부의 춤은, 데이비드 호크니의 그림을 떠올리게 할지 모른다. 곧 배경과 합일된 인물의 정서가 포착된 회화. 하얀색 계열의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녀의 의상은 마치 캔버스로 주어진 하얀 벽의 배경과 연합하며, 단둘이 놓인 저녁 방 안의 로맨스를 하나의 정서로 고양시킨다―분위기와 정서가 일체화된다. 여기에는 물론 음악적 효과가 크게 개입한다.
이 장(면)은 〈비수기〉에서 유일하게/예외적으로 춤의 정면성을 벗어나며 무대로의 직접적인 가시화가 아닌 전략을 취한다. 결과적으로 장소 ‘위’에서의 춤, 장소를 무대화하며 추던 춤은 장소 자체의 춤, 장소가 지시하는 현실에서의 춤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장소는 인테리어의 현실에서, 스튜디오로의 전환으로 연장된다. 가장 처음 남녀가 앉았던 자리 아래에는 갖가지 볼이 있었고, 테이블에는 포도알이, 위에는 미러볼이 있었다. 구의 도상으로 연합되는 환경은 임시적 무대를 위한 디자인의 영역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남녀의 춤이 지속되는 가운데, 뜯고 변형되는 스튜디오로서의 장소적 지시는 춤 자체보다는 춤이 놓이는 조건을 반향한다.
펼쳐지는 무대와 양식적 춤, 나아가 현실을 옮겨 놓은 듯한 무대와 현실에서 성립할 수 있는 춤, 곧 〈비수기〉는 춤이 어떤 현실로부터 출발하고, 춤이 그 현실을 전제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은 곧 장소의 연출로부터 시작되고, 그 장소는 출연 무용수(들)의 몇 번의 세팅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변형되고 연출되며 구성되는 곳이다. 그와 같은 행위는 춤이 성립하는 현실 기반을 지시하며 장소와 극장의 간격을 드러내는 한편 (극장 일부로서) 장소의 작위성을 노출한다. 그 장소의 작위성은 무대 바깥의 시간, 일상성을 다시 지시한다. 결과적으로 〈비수기〉는 일상의 문화, 장소 특정성을 극장에서 다시 전유하며, 그것의 간극을 춤과 재세팅의 동시성 안에 드러내며 춤이 시작되는 장소의 정체성을 정의한다.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4.07.12 ~ 2024.07.13. 금요일 20:00 / 토요일 15:00, 19:00
공연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관람등급: 만 7세(초등학생) 이상
관람 시간: 50분
〈출연진 및 제작진 소개〉
안무: 이가영
연출: 이가영, 안겸
출연: 문형수, 서보권, 안겸, 이가영, 임소정
영상: Limvert
음악: haihm, 손희남
조명: 김병구
무대: 김인성
무대제작: 카펜터리
음향: 남영모
의상: 김은영
포스터디자인: 이경교
기록: KUNST(영상), 류진욱(사진)
프로듀서: 이보라미
주최,주관: 이가영, 모므로살롱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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