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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상은,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발레를 사랑할 수 있는가
    REVIEW/Dance 2024. 2. 5. 20:15

    윤상은,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사진 제공=두산아트센터](이하 상동).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이하 〈메타발레〉)은 윤상은 안무가가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의 연장선상에 있다. 일종의 커뮤니티 아트가 수용하는 개방성의 감각―여기에는 어떤 특정 지역이나 특정한 주제와 관련된 대상을 가리키면서 예술가가 아닌 존재라는 더 중요한 조건을 동시에 전제한다.―과 연관 지을 법한 “모든”이 어떻게 장르를 고찰하며 지시하는 “메타”로 전환되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그것을 입증할 것이다. 
    가령 이 ‘모두’는 발레를 하기 위한 적합한 몸, 발레의 특정 자세와 몸짓의 정교함을 이탈하거나 위반한다. 그렇게 강박적이기도 하고 동시에 율법이기도 한 발레의 몸과 동작은, ‘원래부터’ 발레를 하지 않았던 존재에 의해 전유됨으로써 발레의 틀을 깨뜨린다. 안무의 전략은 이 ‘모든’ 것을 수용함에 있다. 더 다양하고 다른 몸들이 요청된다. 이미 발레를 잘하는 이라면 변별력이 떨어질 것이다. 발레를 전공한 안무가가 발레를 ‘잘’ 보여주기 위한 발레가 아니라 발레와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발레를 한다는 것. ‘메타’는 발레 너머의 존재를 호출하는 것에서 시작할 뿐만 아니라, 발레에 대한 통념의 지식을 망각(unlearning)하는 안무가의 자의식에서 출발한다. 
    발레의 학습된 상과 뭉그러지는 발레의 학습되는 또 다른 상 사이에 안무가의 분열증적 의식이 발생한다―이는 〈죽는 장면〉이 안무가가 발레의 여성상의 전형성을 클라이막스의 죽음에서 찾았던 부분이 그것을 망라하는 하나의 정보가 되는 동시에 그것을 재현하는 안무가 스스로의 처절함과 과감함 따위의 정서나 태도와 연결되는 것과 같이, 비단 ‘메타’는 인식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모두를 위한 이 발레는 똑같은 것에 근접하기 위해 수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과의 차이에 대한 열화된 버전으로 읽힐 것이다. 그것을 하는 이로서는 그것과의 차이에 심각해질 것이다. 그럼에도 질적인 차이의 발생은 적어도 〈메타발레〉에서는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다. 〈메타발레〉는 참가자들이 무대 공간을 각자 자신의 것으로 점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떤 동작들은 움직임 차원에서 축약돼 있다. 또는 완성되어 있지 않다. 그보다 완성의 이미지를 관객에게 맡긴다. 이는 발레가 가진 선의 고유한 무늬―우아함과 유연함의 어떤 몸짓 코드―를 우리가 인지하고 있음을 발설한다. 분절되는 몸짓은 발레의 온전함을 기약하고 예고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기대에 대한 단서를 제공했음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이 출현될 것을 기대하게 한다. 

    예컨대 그것은 형용사다, 게으른 파세”(파세: 한 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의 발끝을 선 다리의 무릎까지 끌어올린 자세)와 같이. 심미적인 것과 대별되는, 일상적인 태도나 의식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발레가 준별해 온 의식 바깥의 틈을 최대한 허용하고자 한다. 뭔가 성의 없거나 심드렁한 태도들이 밀려오다가 화를 내는 것과 같이 히스테리한 것의 폭발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는 자막에 따른, 발레의 창조적 타협의 사례들일 뿐이다―자막은 형용사를 번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른 발레는 곧 발레라는 것을 지시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발레의 구문론을 만드는 이와 같은 방식은 가치판단이 부여되지 않는 발레 동작 하나하나에 인간학적 의미를 더한다. 일종의 기호학적 변용인 것이다. “털난 앙 호”(앙호: 머리 위에서 두 손을 모아 동그랗게 만든 자세)는 동작의 상이함보다는 그것을 표현하는 신체 자체의 표층을 형용하는데, 가령 겨드랑이털은 페미니즘 언어의 발설로도 보인다, 동시에 발레가 가진 전형적인 여성상에 대한 금제를 지시하면서. 앞선 히스테리 역시 말없이 죽음을 아름답게 수용하는 발레의 여성상에 대한 전복에서, 부드럽고 인자한 여성상에 대한 금기를 이탈하는 발화로 보인다. 

    다음으로, 발레는 움직이면서 발화한다는 하나의 행위를 더하는 것으로써 철저하게 기능화된다. 존재를 각인하는 첫 번째 장면이 발레의 강력한 기본이라는 것을 시험했다면, 그리고 두 번째 장면이 탈발레적인, (‘여성’의) 일상적인 부분들로 연장되며 발레의 경계를 시험한다면, 세 번째 장면은 발레를 하면서 대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발화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모두를 위한’ 시작은 존재의 주체적 발화의 자리를 열어주는 것으로 연장된다. 

    ‘저출생’을 다루는 서사는 사실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서 가는 뻔뻔한 아저씨들’의 이미지를 재현하면서 아이를 낳고 싶지만, 낳기 힘든 국가의 사회적 현실을 지적하는, 일종의 페미니즘적 시선을 탑재한 전형성을 띤 이야기다―그러니까 틀렸다가 아니라 참신하지가 않다. 이러한 주제를 〈메타발레〉의 특정한 코드로 수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작품의 편집점을 질문하게 한다. 
    전자는 물론 다양성의 견지에서 각자의 입장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후자의 차원에서는 발레의 내용이 가진 전형적인 차원, 고전의 답습 차원을 벗어남으로써 메타발레가 형성됨을 보여주는 것일까―이 장의 제목은 “발레와 발레 아닌 것”으로, ‘발레 아닌 것’을 발레와 접합했음을 명시한다. 〈메타발레〉는 발레보다 존재를 앞세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작품의 원칙에 따라, 관객은 이 모두를 부정하는 대신 수용해야 하지만, 그 이야기들의 결이 수렴되는 지점 없이 방만해질 수 있음까지 수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야기는 검열될 수 없다.’ 반면, ‘선택되거나 다시 매개될 수 있다.’ 마지막 이야기는 테슬라 제조공장에서 로봇이 노동자를 공격한 SF 작품 같은 일상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이는 신선하지만 공연 전체적으로 봉합되지는 않는다. 이는 자동인형으로서의 ‘코펠리아’의 전사―윤상은의 지난 작업으로, 〈Coppelia-입을 다문 존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2015)가 있었다.―를 상기시키는 구절일까. 그러니까 사실 이야기가 아니라 편집점이 방만한 것 아닐까. 〈메타발레〉는 〈모든 몸을 위한 발레 워크숍〉의 워크숍 과정을 상당 부분 그대로 가지고 있음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일까. 

    사실 인상적인 부분은 말과 동작의 일체화된 부분이다. 동작은 분명 그들의 말을 뭔가 (그 스스로의 차원에서도) 어색하거나 부담스러운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어주는데, 적절한 몸짓이 갖는 발화에 대한 도움이 뭔가 극대화된 모습이다―말을 하면서도 움직임을 잘한다, 또는 그 반대가 아니라, 움직임으로 잘함으로써 말을 잘한다로 보이는 것이다. 이는 발레보다는, 말과 몸짓의 분리된 타입을 갖고 가는 연극에 대한 메타적인 지시의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메타발레〉는 그 다른 발화의 주인공들에 무대의 시간을 분배함으로써 고유한 각자가 되길 소망한다. 입을 다문 코펠리아(〈코펠리아-입을 다문 존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2015))로의 주술에서 벗어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참가자를 관객이 수용)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결과적으로 안무가는 냉철한 분석가의 자세를 비켜난다고 할까. 아님 관객의 입장에서 앞의 장면을 하나의 정동으로 목도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후반부에, 한 명이 아닌 참가자 모두가 〈라 바야데르〉의 니키야를 연기하며, 각각의 주인공/주연이 된 광경은 모두의 차이가 종합되는 광경이다. 그것은 일치될 수 없는 군무이면서 비복제되는 존재의 차이에 대한 긍정을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 각자는 각자의 차이로서 긍정된다.’ 이러한 결론이 도출된다. 사실 그 몸짓 자체의 차이보다는 하나의 미학적 이념이 강조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각자는 자신의 발레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발레에 관한 이미지와 발레에 대한 주관적 경험은 온전히 분리될 수 있는 것일까. 이들은 발레리나가 아니므로, 사실상 발레가 자신의 정체성을 순수하게 구현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는 발레라는 키워드로써 이들의 공통된 토대를 구축하고 있음을 천명하면서(엄밀히 이들은 여성이라는 성별, 혹은 젠더로의 구분을 취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 토대의 자의적이고 우연적인 차원을 다시 구성하는 차원에서, 그 발레가 어떻게 비전문적인 영역에서 개인과 관계되는지에 대한 일종의 사회심리적 리서치로서 〈메타발레〉를 볼 수 있음을 의미할까. 

    물론 〈메타발레〉는 그와 같은 관점을 취하지는 않는다. 일반인의 여러 다른 몸들의 향연이 무대를 가로지르는 가운데, 미학적이면서 정치적인 차원에서 발레에 대한 통상의 관념이 전복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발레에 전제되는 통상의 코드에 대한 대항적이고 비판적인 관념의 차원에서. 그럼에도 〈메타발레〉가 공연자들의 어색함의 표현이 아닌 것에서 나아가, 자연스러운 표출의 차원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에서, (기존) 발레에 대한 비판적 토대를 구축한다고 하는 설명에는 뭔가 미진한 부분이 있다. 
    차라리 〈메타발레〉는 앞선 발레를 통한 자아 효능감의 성취 차원에서 각자를 발레의 숙련도 혹은 전문성이 아닌, 발레를 하는 평범한(?) 존재들이 발레를 전유할 수 있음 자체를 보여준다. 이 전유의 여러 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부분 동작, 서사, 말과 움직임, 중복되는 주연과 같은 여러 장치가 동원된다. 〈메타발레〉는 발레의 (공고한) 의미 체계를 전복함으로써 의미를 얻는 게 아니라, 그 의미의 지형에서 벗어나서 다른 경로를 채택함으로써 즐거움을 얻는다. 

    발레에는 사랑이 있는가. 신체 변형에 이르는, 고도의 테크닉을 성취하기 위한 고강도의 지속된 훈련과 고착되고 고정된 캐릭터, 그리고 시각적 인공물로서의 성취에 이르는 하나의 시스템에서 발레는 발레리나의 말과 그의 삶을 작품으로 투영하는 역량을 창출할 수 있는가. 그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하나의 작품이 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메타발레〉에는 발레에 대한 사랑이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는 발레에 대한 비판과 전복보다는 발레에 대한 다시 쓰기를 통해 발레를 다시 사랑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두산아트랩 공연 2024
    무용 〈메타발레: 비(非)-코펠리아 선언〉
    공연 일시: 1.11-1.13 
    공연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출연진·제작진〉
    움직임 가이드 및 안무: 윤상은
    움직임 창작·출연: 김혜인, 신민, 이가경, 이민진, 임다운, 지혜경, 최윤희
    드라마터그: 손예운
    작곡·연주: 한정원
    조명디자인: 성미림
    조명 크루: 강민지, 김휘수, 박자연, 홍주희
    영상·음향 감독: 임기택
    영상·음향 크루: 김연수
    무대감독: 김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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