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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광주비엔날레: 명확한 전형의 미래를 향해 투사된 전통과 차이의 존재들REVIEW/Visual arts 2023. 8. 13. 15:05
2022 부산비엔날레가 비좁고 결과적으로 불편한 환경 제공했다면, 2023 광주비엔날레는 어찌 됐건 공간이 작품과의 유격을 적절하게 또는 그 이상으로 확보한다―둘은 일 년의 간격을 두고 서로를 마주한다. 이는 큐레이팅의 차원보다는 어느 정도 아웃소싱된 설치의 영역에서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흥미로운 건 그러한 전시 환경이 발전된 도시와 상대적으로 낙후된 도시 환경을 체현한다는 것이다. 부산비엔날레가 도시에 대한 은유, 그것도 무의식적인 차원이 응결된 것이라면, 광주비엔날레는 기조성된 광주비엔날레관 전시관이든 무각사와 같은 문화유산이든 갖춰진 하드웨어에 적절한 관람 환경의 동선을 확보했다.
반면, 광주비엔날레의 주제관인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비해 부산비엔날레의 주제관인 부산현대미술관은 지치지 않고 관람이 가능했다. 이 부분이 큐레토리얼이 분기되는 지점일 것이다. ‘글로벌’ 언어는 서구의 언어에서 아시아의 전통을 전유하는 언어이다―“세상에서 물이 가장 유약하지만, 공력이 아무리 굳세고 강한 것이라도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도덕경 78장)를 인용하고 있다.―. 동시에 추상적이어서 무엇이든 다 포괄할 수 있으며 이후 예술의 자율적인 형식을 수용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부산비엔날레가 근현대사의 연결 지점으로서 부산을 표상할 때 시간과 장소, 타자로(부터)의 좌표를 적어도 찍고 있음의 언어를 전시장으로 분산시키고자 했다면, 광주비엔날레는 ‘비엔날레는 곧 글로벌’이라는 등식을 내세운다. 곧 부산은 그 바깥으로 타자화 혹은 고립된다. 곧 비엔날레가 종합되지 못하는 파편들의 정거장이라고 해도, 부산비엔날레가 그 안에서 건져 올리려고 하는 건 주체의 의지와 함께 묻어나왔다면, 광주비엔날레는 유형화의 박물관이라는 등식으로 모든 걸 확장하며 연결지어 버린다. 이는 주제관의 거대한 공간 구획의 역학에 부합하게 된다. 이후 2023 광주비엔날레에서의 여러 작업을 살펴보며 이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주제관의 가장 인상적인 작업 중 하나인, 타우스 마카체바(Taus Makhacheva)의 〈독수리 평원〉(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58분 39초.)은 작고한 마카체바의 할아버지이자 소련의 유명 시인이었던 라술 감자토브에 대한 작가의 기억과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겹쳐낸다. 그 장소는 다게스탄의 독수리 평원으로, 인상적인 건 이 평원 위에 무대를 가설하는 과정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시각적 이미지에 대한 관점의 이동이 드러난다. 시각적 이미지는 그 자체로 결정되기보다 어떤 시점에서 공간 안에 위치하고 다시 그 프레임 바깥에서 재구성되는지, 그 프레임이 구성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발생과 소멸의 이미지다. 가령 무대 벽면에서 하나의 블록을 제거하면, 자연 풍경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가상의 무대는 실재의 자연과의 경계에서 그것이 가상임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일순간 놀라움의 효과를 안긴다, 그것이 얼마만큼 실재 같은지가 아니라. 무대는 실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곧 무대가 만들어지고 그 위에 증언자를 불러 세우는 과정 전체로써 그 스스로가 무대 위의 재현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러한 무대의 가설 과정은 기억의 재구성이 갖는 허구성과 실재의 경계를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다.
아무래도 가장 재미있는 작업은 주제관이 아닌, 국립광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캔디스 린(Candice Lin)의 〈리튬 공장의 섹스 악마들〉(2023. 관리자 플랫폼, 도자기, 목재, 금속 작업대, 연구, 실험실 스탠드, 애니메이션, 사운드, 전자 제품, 해킹된 교반기, 사무용품, 알루미늄 및 플라스틱 덕트 및 튜브, 양각 동판, 자석, 그림, 인쇄 종이, 유리, 플라스틱, 액체, 판, 가변크기.)로, 여기서 사물과 인간은 네트워크 차원에서 세계의 일부로서 접속되어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물과 인간은 신화적 서사 차원에서 또한 만난다. 곧 인간 너머의 서사는 사물의 지위를 복권하며 종래의 인간의 (인간 너머의) 서사가 지닌 계층성, 또는 그것의 구태의연함을 가로지른다. 쓰인 재료는 매우 다양하며, 3D 모델링과 애니메이션, 도자 항아리 제작은 협업의 결과이다. 기본적으로 여섯 개의 금속 작업대에 놓인 사물들은 도자 외에도 전자 제품, 동판, 그림, 인쇄 종이 등 다양한 매체와 재료로 구성되며 공산품을 포함한다.
이는 그 자체로 누군가의 현재적 실험실의 도상이며, 용도와 쓰임에 따른 애드호키즘적 배치와 지나간 시간성을 상정한다. 물론 이것은 서사의 일종이며, 그 안의 각각의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현재적 도상에 ‘악마’가 위치했음을 보여주는데, 여기에 더해 작업대 뒤편의 문학적 텍스트는 내재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실험실의 주인을 구성하며, 그가 알고 있는 서사를 원래 존재하는 것 같은 서사의 자리로 이동시키며, 서사의 레이어를 분별하며 확장한다―또는 두 개의 서사, 곧 실험실의 서사와 신화의 서사는 서로를 보증한다. 작가는 작가의 작업실을 ‘실험실’의 시간과 맞바꾸고 문학적 상상력을 그보다 넓은 신화의 세계에 관한 인지와 맞바꾸는 것이다. 물론 그로써 작가에 대한 신화는 신화를 쌓고 만들며 구동하는 이로 ‘투명하게’ 바뀌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주제관으로 돌아오면, 막가보 헬렌 세비디(Mmakgabo Helen Sebldl)의 회화는 흡사 얼굴이 뒤틀린 입체 공간이자 색면 공간으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입체파 혹은 큐비즘적 외양을 띠는데, 인간과 동물의 다양한 존재들이 하나의 공간 안에 구심점을 갖지 않고 합성된다는 점에서, 그럼에도 개별적인 신체 일부러 그것들이 존속된다는 점에서 아프리카의 공동체적인 부족성과 신화적 세계관―“아프리카 신화와 전통적 가치체계”―을 체현한다. 그런 지점에서, 한 명의 주체가 여러 존재로 분화된 것으로도 보이는 뚜렷한 인장의 얼굴은 관찰자의 혹은 대상의 분열증적인 진단으로 향하기보다는 공통된 것의 함입을 상정한다고 보인다.
막가보의 회화처럼 그 자체의 자족적인 미감의 고유성이 침투하며, 비엔날레의 거대한 이념 자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강렬한 파편과 달리, 어떤 작업들은 정체성 정치의 재현적 장에 또는 스펙터클의 무덤에 사로잡히고 마는데, 가령 비엔날레관 초입에 자리한 불레베즈웨 시와니(Buhlebezwe Slwanl)의 작업 〈바침〉(2023. 양모실, 흙, 풀, 나무, 조명, 가변설치.)의 경우, 양털 밧줄은 종교적인 오브제―“남아프리카공화국 시온교회 성도들이 야외 기도 때 착용한 벨트를 상기시킨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나아가 작가의 의도는 공동체의 진정성을 그와 합치시키는 것―“이는 우리의 영혼과 우리 선조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이는 비엔날레관의 거대한 텅 빈 장소에 대한 채움의 기능적 차원으로서만 작용한다.
〈영혼 강림〉(2022. 3채널 영상 설치, 수조와 물, 10분 5초.)의 거대한 수조 위에 투사되는 영상의 물 이미지는 광주비엔날레의 웹 영상 포스터의 물방울의 동세를 상기시킨다. 이는 부산비엔날레의 일종의 아이덴티티를 가리키는 광고 버전의 영상이다. 이는 물론 작품이 지닌 핍진성 차원보다는 그 물이라는 것이 가리키는 어떤 과도한 추상성의 차원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베티 머플러의 〈나라를 치유하다〉(2018. 린넨에 아크릴, 122×305cm., 2021. 린넨에 아크릴, 피그먼트 잉크, 152×198cm., 2019. 린넨에 아크릴, 152×198cm., 2021. 린넨에 아크릴, 167×198cm.)의 경우 역시 물에 이는 잔상처럼 응결되며―“바위의 구멍들을 그렸고, 사람과 장소 사이로 흐르는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풍경을 따라 흐르는 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의식적인 성격을 띠는데, 타자성의 해석과 도상적 유사함의 인지로 수렴한다.
마타아호 컬렉티브(Mataaho Collective)의 〈투아키리키리(Tuakirikiri)〉(2023. 폴리에스테르 직조, 가변설치.) 역시 지역 전통에서 착안하며, 신화적 상징과 전통 직조 기술을 활용하지만, 재료의 요소는 화물 고정끈이라는 현대적인 요소를 가져온다. 팀명에서 ‘마타아호’는 “특정한 대상에 초점을 맞추거나 주목하는 뷰파인더”를 뜻하는데, 이는 리서치나 연구로부터 작업이 시작됨을 전제한다. “마오리 사회에서 아기나 식료품, 자원 등을 운반할 때 사용되는 ‘카웨’“라는 전통의 원형은 X축으로 교차된 힘의 배분을 통해 역동적이고 뒤틀린 힘의 자장을 드러낸다.
제2전시실의 주제, “은은한 광륜”은 버지니아 울프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적인 상징으로 놓고 확장하며 세계상을 탐구한다. 그중 가장 전위에 놓인, 팡록 술랍(Pangrok Sulap)의 집단 목판 작업인 〈광주 꽃 피우다〉(2023.암막 코튼에 목판 인쇄. 3점, 각 276×152cm, 1점, 155×152cm, 1점, 204×152cm, 1점, 101×152cm, 1점, 217×152cm, 1점, 215×152cm.)는 광주 출신의 목판화 작가들과 5·18 민주화운동의 아카이브 이미지들과 광주 시민들의 삶을 살펴보고,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전면에 드러나는 색색의 프린트에서 인물의 얼굴은 묘하게 이국적인 인상을 주는데, 곧 번안되고 변화되는 건 사건이 아니라 이미지에 가깝고, 역사의 공통된 차원을 새롭게 가설하는 가운데 미래를 향해 역사가 작동하게 된다, 반복은 다른 반복으로 변주되는 가운데. 여기에 배면에 자리한 오윤의 판화 작업들은 1차 아카이브로서 역사화된다.
타렉 아투이(Tarik Atoul)는 2019년 광주 방문 이후 현지 악기장, 예술가, 공예가 들에게 한국 전통 타악기, 옹기, 청자, 한지를 재해석하는 협업을 제안, 진행해 오며 만든 〈엘리멘탈 세트〉(2019~2023. 도자기, 타악기, 수로 장치, 사운드, 전자 기기, 가변크기.)를 선보이는데, 이는 전시장 안에서 거의 유일한 무대이자 퍼포먼스를 체현하는 장치로서, 시계열의 순서와 시간,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 또는 지나간 퍼포먼스의 잔상으로 남는다. 작가의 연구는 전통의 재현이 아닌 이질적인 것들의 연결과 배합 자체를 향한다. 전통은 하나의 토대가 되고, 그것들은 작동하는 미디어가 된다. 이러한 연결은 순차적이라는 점에서, 하나하나는 거대한 연결망 안의 고유한 시간성과 전체의 연결적 시간을 수여받게 된다. 그리고 이는 전통, 협업, 국제성에 관한 올바른 하나의 이념으로 부상한다.
파라 알 카시미(Farah Al Qasimi)의 〈특별한 날들을 위한 편지〉(2023. 시트지에 라텍스 출력, 367×1660cm., 2021. 아카이벌 잉크젯 프린트, 작가 제작 알루미늄 액자 에디션 1/5, 2 AP, 101.6×73.7cm.)는 사진 이미지의 물리적, 매체적 확장을 통한 공간 설치―“커다란 벽지 이미지 위에 표구한 사진이나 납작한 모니터”―가 인상적인데, 이는 작품과 관람객을 사진 이미지의 확장된 주거 공간으로 연장하기 때문이다. 2021년 초 “서구로의 이주 기록을 담은 오래된 가족 앨범을 참조해 자신이 가족과 함께 사는 집의 실내 공간과 주변”을 담은 사진은 “꽃무늬 식탁보와 옷, 벽지, 실내장식 등”에 주목하는데, 이러한 “사적 아카이브”가 지닌 자국 문화의 무의식적 지층이 갖는 유형학적인 부분은 사적이지만은 않다.
이러한 부분은 오석근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데, 오석근은 인천, 부산 등의 지역에서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 불리는 주택이 “70여 년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형, 증축”되어 온 모습을 사진으로 아카이브해왔으며, 광주에서 역시 어느 정도 공통된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특별히 이번에는 “대문, 현관문, 담벼락, 주차장 셔터 등”에서 발견한 “십장생이 주물, 모르타르로 제작된 패턴들”이 “아르누보, 모스크 사원, 그리스 신전, 일본,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발견되는 문양과 모티브를 차용하고 조합해 만들어진 상징물”로서 유형화됨을 보여준다.
타스나이 세타세리(Thasnai Sethaseree)의 〈거품탑〉(2022. 승려복에 종이 콜라주 8점, 각 250×200cm., 2022. 종이에 오일파스텔, 구리 액자 6점, 각 200×200cm., 2022. 승려복에 종이 콜라주 4점, 각 지름 350cm, 넓이 175cm.)은 크기와 부피 차원에서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데, 보색 대비의 강렬한 색채감과 반복적으로 찍힌 또는 그려진 형태들의 강박적인 제스처는 거대한 회화 구조물을 과포화상태로 지지한다. 이는 자율적인 표현에 의한 배치보다는 의식적인 주술의 성격을 띠는 행위 자체에 방점이 찍히는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이러한 패턴의 기호들 아래 현실의 이미지들이 중간 중간 눈에 띄는데, 이로써 이미지가 작동하는 세계 너머의 진실을 역사―가령 흑백으로 된 얼굴들―로 연장시킨다. 곧 작가는 “태국에서 권력과 부패가 국가와 상업적 상상에 뒤섞이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냉전 이후 이미지가 정치적 사건과 맺는 관계를 탐구”하며, 권력이 작동하는 세계 속에 기록되어야 할 것들을 미약하게 새어나오게끔 배치한다.
엄정순 작가는 “약 600여 년 전 인도네시아,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가 전라도 끝 장도로 유배되는 수난의 여정을 따라가는 작업”에서, “그 경로선상의 도시에 사는 시각장애 학생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시각장애 학생들이 청각과 촉각, 후각으로 느낀 코끼리를 표현한 조형물을 재해석하고 실제 코끼리의 크기로 대형화한 설치”인 〈코 없는 코끼리〉(2023. 철판, 양모, 천, 300×274×307cm.)를 비롯한 다양한 코끼리 작업들을 선보였다. “코가 사라진 코끼리 형상들”은 “기형과 원형 사이를 넘나드는 형태”로서, 타자의 체험에서 온 원형적 아이디어의 합성을 구현하는 과정―“철 파이프 골조 위에 수천 장의 철판 조각으로 조립한 뒤, 130개의 섬유 조각으로 외피를 감싸는 방식으로 완성”―과 실제 만져볼 수 있도록 한 전시의 결과까지 코끼리는 촉각적 대상이 되며, 작가의 이전과 이후의 세계의 연결이라는 키워드를 구성하며, 연속적인 역사의 토대를 만든다.
“조상의 목소리”를 주제로 한 제3전시실은 앞선 부족 전통의 현대적 계승으로서 마타아호 컬렉티브와 같은 사례가 많이 자리한다. 근본적으로 전통을 가져온다면, 맥루한이 말한 그들이 가진 전체로서의 감각, 외부로서의 무한한 확장, 부족 문화의 집단 의식이 큐브로서의 공간과 어떻게 충돌하는지의 관점이 도입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곧 개념이 아닌, 감각으로서의 전통. 반면, 한국의 전후 아방가르드의 여러 핵심적인 예술가들도 자리하는데, 이건용의 정면으로 서서 양옆으로 붙인 팔을 크게 여러 번 휘저어 만든 드로잉 바디스케이프 〈76-3-2023〉(2023. 퍼포먼스.)를 참여형 공간으로 확장이나 김구림의 여성 신체들에 페인팅을 하는 바디 페인팅의 사진 연작, 이승택의 〈무제(이 물건으로 무엇을 만들어도 좋습니다)〉(1967-1969/2001/2023. 각목, 노끈 천, 가변크기.) 같이 퍼포먼스의 요소가 개념의 새로움 대신 ‘참여’ 자체의 목적으로 갈음되는 듯하다.
그런 차원에서 타냐 루킨 링클레이터(Tanya Lukin Linklater)의 〈겨울을 느끼다, 차가 숨가 목구멍을 대울 때〉(2023. 영상 설치 및 스카프와 돌, 가변크기.)의 경우, 전통과 현재의 거리를 퍼포먼스로 매개하는 중간적 작업이다. “코디액군도의 아포낙과 포트 라이언스에 위치한 선주민 마을의 알루틱족 출신”의 작가가 “주민들의 생활 경험, 소속 체계, 지식 전수에 영향을 준 역사”를 “북아메리카 선주민 여성들이 착용하는 코콤 스카프”의 설치로 이전하며, 그 앞에서 제목과 같이 눈밭에서 행위를 하는 작가의 퍼포먼스를 영상으로 상영하는데, 이러한 기이한 병치는 화려하지만 어떤 기성품의 이미지가 단지 하나의 이미지에 그치거나 비판받지 않기 위한 몸부림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사실상 그보다는 전시장 안에서 축소되는 퍼포먼스의 아이러니를 필사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처럼 보인다. 이 지점이 곧 ‘비엔날레’의 가능성과 한계일 것이다.
데이비드 징크 이(David Zink Y|)의 〈나의 모든 색〉(2023. 도자기 설치, 가변크기.)은 “벽면을 가로질러 촘촘하게 배열”되는데, 조개 같은 바다 생명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는 오카리나 같이 특정 악기의 형태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것은 점과 면, 무늬로 깔끔한 색으로 변주되며 마치 색의 지속적인 공명을 이루기 때문이다.
“일시적 주권”을 주제로 하는 제4 전시실은 탈식민주의나 식민주의 이전을 다룬다. 고이즈미 메이로(Meiro Koizumi)의 〈삶의 극장〉(2023. 5채널 영상 설치, 가변크기.)은 광주 고려인마을의 15명의 청소년들이, 작가가 주최한 이틀간의 워크숍을 통한 “1932년에 설립된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의 사진 기록물을 가지고 “의례와 역할 놀이”(니콜라이 예브레이노프)를 수행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겹치게 편집한 영상 작업이다. 여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보다 수행하며 변화시키는 과정은 뭉친 시각적 덩어리로 나타나는데, 시간과 존재의 양상은 민주주의적인 고른 분배의 형식을 따른 과도한 합산으로 흩어지고 사라지며 꽉 찬 유령적 스펙터클로 증발한다. 연기하는 순간의 표정 등을 포착한다면 진실이 거기 있지만, 이는 짧은 설명을 위해 최소한의 정보로 감축된 결과이다. 이것은 예상과 달리 전혀 연극적이지 않다.
“신화와 건축물”의 “변화하는 양상”을 “관찰”해 나가는 헤라 뷔욕타쉬즈얀(Hera Büyüktaşcıyan)의 〈속세에서 속삭이는 자들〉(2023. 천에 흑연과 융단, 가변설치.)은, 평평하지 않은 초록색 융단 위에 흑연으로 그린 거시의 지형 위에 미시적인 건축의 모형을 배치한 작업이다. 이는 “콘월의 ‘아홉 처녀들’ 석상과 한국의 고인돌에서 영감을 받”은 작업으로, “켈트족의 전설”에서의 “안식일에, 노래를 했다는 이유로 석화”된 “아홉 처녀들”과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군사기지와 민간 건물들을 가리기 위한 카모플라주를 숨죽여 만들었던 세이트아이브스의 크리세드 실크 방직공장 여성 노동자들”을 겹쳐 놓는다. 놀랍게도 권력의 압살에 사라진 존재들의 계보라는, 역사적 형상이 축소되며 뚜렷해진 조망의 재현은 바로 권력의 지점과 맞물리면서 신화의 애도를 현재로 계승한다. 일종의 지형을 수학적으로 옮겨놓는 부분은 나이자 칸(Nalza Khan)의 〈깊은 정복〉(2023. 잉크젯 프린트, 종이에 수채, 종이에 콘테 및 목탄, 가변크기.)의 작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영제국의 일부러 카라치항에 건설되었던 댐과 운하 식민지의 역사를 다루”는 데 있어, ‘카라치항의 확장에 따른 생태계의 영향’을 “인도양의 이산화탄소 수치와 분포”라는 일종의 수학적 도표로 재현한다. 이러한 표현은 “종이 표면에 흐르고 맺히는 물감의 농도”로써 조율된다. 따라서 이러한 회화는 몇 번의 번역을 통해 미지의 형상을 향하고, 매개의 언어를 인지하기 전에는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산티아고 야오아르카니(Santiago Yahuarcani)의 〈위토토 세계관〉(2022. 나무껍질에 천연염료와 물감, 210×410cm.)은 “무화과나무의 내피로 제작한 여러 장의 양피지를 이어 천연 염료로 채색한 회화”로,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는 “신화적 서사”, “아마존 우림에 스며든 도시 풍경” 등을 “뚜렷한 위계 없이 하나의 화면에 연결”한다. 이를 연장해서, 글자 일부는 문자 정보에 국한되지 않고 표면에 새긴 것 같은 느낌을 주며, 글자와 이미지는 하나의 표면에 동등하게 등장하며, 꿰맨 기호와 인물의 등의 무늬가 겹쳐지는 것처럼 이미지들은 사실적 재현이 아닌 꿰매지고 종합되기 위해 변형되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곧 입체적 감각의 세계 재편은 공간에 대한 다른 감각을 선사한다. 이를 입체적으로 확장한다면, 과달루페 마라비야(Guadalupe Maravilla)의 ‘질병 투척기’ 작업과 만나게 될 것이다. 네 개의 작업은 온갖 사물들의 아상블라주이자 콜라주로, 무엇보다 뼈대와 늘어진 살가죽의 흔적으로 구성된 몸체의 중앙이 뚫린 가운데, 그 속에 징 같은 철 구조물이 자리하며, 내장이 드러난 신체로부터 손과 팔들이 실제 등장하거나 의사-부분 신체들의 증식으로서 더해지며 기괴한 신체들을 구성한다. 이는 네 개의 작업의 캡션에 언급된 “작가의 첫 이주 경로를 재추적하는 의식에서 수집한 오브제 모음”의 항목을 포함하는데, 곧 “의식”이 재료 혹은 물질이 된다. 이는 작가의 “질병”을 투사한 것으로, 의식은 수축되지 않고 증폭되고 확장된다. “미등록 이주민들에게 자행되는 박해와 정치적 압박에 대한 저항을 상징”하는 그의 ‘자수’ 작업들은, ‘질병투척기’를 연상하게 하는 부분 신체의 기괴한 확장을 원의 평면에서의 중앙으로 구현하고 그 작업들을 잇는 지그재그식의 드로잉을 배경에 더해서 사실상 피규어와 그라운드의 경계를 없애며 끊임없는 확장을 한다는 점에서 인상적이다.
‘시각 연구 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컬렉티브 이끼바위쿠르르의 〈열대이야기〉(2022. 2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2분 34초.)는 “태평양전쟁의 흔적을 따라” “제주도와 미크로네시아의 섬들, 인도네시아”를 탐사한다.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문명에 적응하고 인간이 만든 창조물을 잠식하는 자연의 모습”과 “한국의 불화 형식인 감로탱”, 드로잉 연작 〈열대 스토리의 각주〉(2022-2023. 종이에 드로잉 및 글 25점, 각 32×44cm.)에서 영상의 장소, 사건 등의 재현과 그 옆의 메모를 통해 맥락에 대한 이해로 연장되는데, 이는 미학적 기술보다는 기록의 매개 차원으로서의 위치를 강조한다. 반면, 신화적 상상력과 역사의 재현, 인공과 자연의 합성된 경계와 같은 여러 부분은 주체의 언어로 읽히기보다는 그것들 가운데서 분열되는 주체의 증상을 나타내는 데 가까워 보인다.
“행성의 시간들”을 주제로 한 제5 전시실의 작업들은 인류세와 생태 관련해 지구라는 행성의 미래를 향한다. 그에 관한 진술은 다분히 민족국가(들)의 탈경계와 지구촌에 대한 환상을 간직하며, 앞선 전통과 지역에서의 정치를 손쉽게 벗어나는 듯하다.
멜라니 보나조(melanie bonajo)의 〈터치미텔〉(2019. 단채널 영상 설치, 24분 27초.)의 경우, 바닥의 신체 지지대 기능을 하는 다양한 유선형의 오브제들을 통해 커다란 요철로서의 공간을 만들고 그와 연동해서 영상에서 그것을 활용한 지침을 수여한다. 이 작업은 “6~8세의 아이들 한 무리와 함께” “서로를 밀고 끌어안고 색칠하고 쓰다듬으면서” “자기 자신의 몸, 타인과의 신체적 접촉을 경험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가족 단위의 참여, 일종의 명상과 같은 과도한 몰입을 끌어내는 작업이다. 곧 〈터치미텔〉은 의식 너머의 감각, 언어 이전의 신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상이자 방법론이 된다.
테스 자레이(Tess Jaray)의 작업들은 추상을 통해 평면에서 입체 공간을 구성하는데, 도형이 일정한 결을 따라 크기의 차이를 서서히 두면 부피감 있게 쌓이는 가운데, 도형들의 틈으로 배경이 연장된다는 점에서, 곧 전체의 일부로서 형태가 잠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표백된 무의 공간이 가진 무한함 아래 일정한 질서를 확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여기서의 체험이 명상적인 의식에 닿게 된다. 결국 몇몇 작업들은 “행성의 시간들”이 더욱 정치적인 구체의 언어를 상실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류젠화(Lou Jianhua)의 〈흔적의 형태〉(2016-2022. 자기, 가변크기.)는 ‘전 세계의 박물관 소장품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유물의 흔적처럼 파편으로서의 도자 작업들로 구성된다. 이는 매끄럽고 광이 나는 표면과 거친 옆면의 결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그 경계에서의 윤곽선을 뚜렷하게 보여주며, 파편으로서의 유동적인 형상을 매끈한 드로잉의 미감으로 마감한다.
아벨 로드리게즈(Abel Rodríguez)의 경우,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아마존 우림을 기록”하는데, 일러스트레이션처럼 보이는 작업들은 빽빽한 배경과 생명체의 공존과 함께 색이 투과되는 나무처럼 레이어‘들’을 구성하며 개개의 존재들을 입체적으로 강조하게 된다. 로드리게즈의 작업은 인류세 이후의 작가의 재현으로서의 윤리가 일차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 자오 런휘(Robert Zhao Renhul)의 〈강을 기억하고자 함〉(2023. 4채널 영상 설치 및 오브제, 가변크기.)의 경우, “지난 30년간 배수관을 사용하지 않게 되면서 출현”한 싱가포르의 한 강을 주변으로 야생동물을 촬영하고 영상과 함께 각종 오브제들―자연보다는 마모된 인공물의 흔적이 더 많다.―을 수집해 병치하는데, 이는 조금 더 적극적인 탐사이자 자연에 관한 고고학적 리서치라 하겠다.
주디 왓슨(Judy Watson)의 경우, “퀸즐랜드의 여러 강과 개울에서 수집한 자연물들로 만든 회화 연작”을 선보이는데, 캥거루풀이나 홍합 껍질 등을 덧붙이거나 천연염료로 물들이는 등의 자연 재료의 사용, “작품의 구성 요소를 발견한 장소의 이름을 바탕으로” 한 작명들―가령 〈죽은 나무가 있는 버룸강〉(2022. 캔버스에 인디고 및 아크릴, 235×178cm.)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공동체가 특정 지리를 기억하는 방식을 상기시”킨다고 한다.―의 특징과 함께 전체적으로 자연의 한 부분을 상기시키는 표현에서 강이나 땅의 구불구불한 지형을 상정하는 듯한 구성으로 나아가는데, 여기서 평면은 거대함의 일부를 추출하는 것으로 수렴한다. 인류세 이후의 대응으로서 전통은 근본적인 지점에서 대안으로 구성된다.
사실 QR 코드를 통해 작품 캡션의 정보를 확인받을 수 있던 부산비엔날레에 비한다면, 가이드북으로 캡션들을 별도로 판매하는 건 꽤나 불편부당한 일로 보였다. 정보의 매개가 투명하지 않고, 가이드북을 파는 건 비엔날레관밖에는 없기도 했다. 이는 그럼에도 비엔날레를 찾는 관객층에 대한 어떤 가정을 보여준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이는 부산과 광주 각각을 젊음과 고루함으로 분별한다. 곧 가족과 나이가 많은 관람층을 고려한다면, 또는 여전히 동선을 물리적으로 따라 가야 하는 비물질적인 전시 관람의 룰을 연장한다는 차원에서 온라인 환경으로의 매개를 배제하는 한 방식으로서, 물신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의 손에 잡힘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까.
비엔날레관 이외의 공간은 작업과 결합하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이밖에 “캐나다, 중국, 프랑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폴란드, 스위스, 네덜란드, 우크라이나 총 9개국이 참여”한 “한국과 세계 미술기관의 네트워크 확장을 위해 2018년 시작”된 파빌리온관의 전시들이 있었는데, 각 나라의 기획자의 독립된 공간으로 분화한 반면, 독립된 양식과 개성이 거대한 주제와 이념의 차원보다는 개별적 고유성으로 환원된다는 인상을 주었다―파빌리온관의 전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무각사 공간에 놓인, 홍이현숙의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17분 48초.)은 북한산의 커다란 ‘마애여래좌상’을 카메라로 훑는데, 여기에 붙는 작가의 내레이션의 언어는 일견 그것의 ‘살아있는 느낌’을 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하지만, 묘사와 재현의 방식은 일종의 비평의 언어에 가까워진다. 카메라의 매개는 클로즈업과 이동을 통해 대상과의 거리를 극복하며 가이드의 언어와 대상을 일치시킨다. 반면 더듬어 가는 카메라의 촉지적 시각은 매끄러운 이동에 그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낸다. 작가는 발가락 사이 홈이 수직으로 파인 것이나 아래 움푹 파인 것 같은 미소한 것들에 주목한다. 곧 “이보다 디테일할 수 없다.”라는 작가의 말을 자신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 - 월출산 시루봉〉(2023.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7분 34초.)은 등산을 하는 모습을 거칠게 보여주는데, 신체에 대한 육감 어린 묘사와 “너의 손을 나에게 줘”와 같은 상대를 상정하는 말투로써 암벽을 오르는 자와 암벽의 어떤 초월적인 접촉의 상태를 종용한다. 곧 대상과 누군가의 무의식의 지층을 합성한다.
흐엉 도딘(Huong Dodinh)의 작업들은 자른 선, 그은 선, 입힌 선 곧 뚫고 나간 선, 마찬가지로 나무로서의 캔버스의 지표적인 흔적을 남긴 선, 거의 체감하기 어려운 두께를 가진 이미지로서의 선 등 다양한 직선의 미학으로써 미니멀리즘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 선은 일종의 지평선을 향한 내적 충동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곧 베트남에서 가족과 파리로 이주한 뒤 처음으로 본 눈이 오는 광경에서 하늘과 땅이 어우러지는 모습이 작가의 원체험과도 같기 때문이다.
앙헬리카 세레(Angélica Serech)의 〈내 두 번째 피부에 말의 씨앗을 뿌리다〉(2023, 페달 직기, 수직 직기, 나무 바늘 자수, 250×700cm.)는 “과테말라 산후안 코말라파의 칵치켈 민족 선조들의 전통 직조 기법”을 활용하며, 긴 하나의 레이어로 구성돼 있고, 그 안에 비선형적인 구조들, 겹겹이 맺히고 비정형적으로 연결되는 이미지로 압축돼 있다. 전시장 벽 바깥쪽에서 볼 때 순간적인 빛과 그 밑에 드리우는 그림자 무늬들 역시 인상적이다.
탈로이 하비니(Taloi Havini)의 〈하이에나 울림〉(2020,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4분 27초.)은 부카 섬에서 -보름달과 산호의 산란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에 대해 공동체 의식을 치루는 바다의 이미지를 보여주는데, 전체 비엔날레의 주제어와 겹쳐지며, 직접적인 상징 코드로 전유된다. ‘부드럽고 여린’ 이미지 그 자체가 고스란히 어떤 언어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고도 보인다. 사실상 〈하이에나 울림〉은 어떤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형해화되는 바다의 산호와 보름달의 잔상 이미지 정도를 보여줄 뿐 공동체의 형상도 언어도 드러내지 않는, 일종의 배경 이미지에 가까운 것이다.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 지하의, 앤 덕희 조던(Anne Duk Hee Jordan)의 〈안녕히, 그리고 물고기는 고마웠어요〉(2023. DIY 로봇, 시트지, UV 조명, 수조 설치, 가변크기.)는 U자 모양으로 두 개의 방을 마주 보게 하고, 중간에 습실이 자리한다. 관객을 비추는 파랗게 감광되는 사이키델릭적인 거울 공간 아래 해양생물과 로봇이 합성된 의사-생명체들―“움직이는 눈, 좌우로 흔들거리는 게의 팔과 문어 정원, 성기로 변형된 따개비, 다섯 개의 특출난 복제 뇌, 그리고 제임스 러브록의 비범한 뇌와 같은 일련의 로봇”―이 비정형적인 움직임을 구성한다.
비비안 수터(Vivian Suter)의 연작―〈무제〉(제작연도 미상. 캔버스에 유채, 피그먼트, 아크릴, 풀, 35점, 가변크기.)는 일종의 드로잉 아카이브로, 촘촘하게 걸려 펼쳐진 것과 펼쳐지지 않은 것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든다. 아마 이번 광주비엔날레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으로 하나의 공간을 만든 경우일 것이다.
예술공간 집에서 단독으로 상영된 나임 모하이멘(Naeem Mohaiemen)의 〈졸 도베 나(익사하지 않는 사람들)〉(2020. 단일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4분.)은 과학으로 대변되는 의학의 힘과 개인의 위치 사이를 질문한다. ‘고칠 수 없는 감기’는 근대의 맹점을 우화적으로 드러내는 듯하고, 폐건물과 텅 빈 수술실, 그리고 설치의 다른 요소들은 죽음에 대한 무거운 대기를 강조하면서 개인의 본원적 생명의 가치를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꽤 지루한 작업은 영화의 길이를 갖고 있지만, 내레이션으로 나타나는 개인의 자의식은 서사의 전개로, 시각 예술로서의 설치는 현실로 매끄럽게 나아가지 않으며, 그 둘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 어떤 차원에서 하나의 공간을 상징하며 상정하는 가치로서 판단했을까에 대한 의문과 함께.
p.s. 광주비엔날레는 장소를 주제화하지 않으면서 공간이 원래 갖는 힘을 ‘물’처럼 적용해서 최대한 작업들을 유연하고 매끄럽게 볼 수 있게 한다. 광주는 희미하고 굳건한 컨텍스트로 작용한다. 초과된 전통 양식의 호출은 이미지를 뛰어넘으며 피곤함을 안기고, 추상적인 개념이 맴도는 사태를 만든다. 다시 말해 각 작업이 주제에 대한 차이의 세공을 구성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주게 된다. 그 속에서 작업들에 관한 흥미로움 역시 감축된다. 이는 비엔날레의 한계이기도 하고, 동시에 비엔날레가 지닌 폐쇄된 잠재성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큐레토리얼의 언어는 추상적이기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것이 맞지 않을까. 그러한 언어는 어떻게 작업‘들’ 사이의 간격을 만들며 그것을 더 잘 보이게 만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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