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부산비엔날레》에 관한 몇 가지 인상들
    REVIEW/Visual arts 2023. 1. 3. 02:32

    프롤로그: 과잉의 몸짓들

    법인, 〈낙원으로의 여정, 오래된 미래-1〉, 2022, 광목, 한지, 석채, 금, 240×180cm.

    비엔날레는 과잉의 경험을 요청한다. 이것은 분명 요청이 아닌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를 ‘제안’으로 두기 위해서는 경험의 아카이브 방식이 역으로 요청된다. 《2022부산비엔날레》(이하 《비엔날레》)는 일반적인 작가, 작품 정보를 전시 현장에 덧붙이는 것과 동시에 홈페이지에 이를 재현하고, 홈페이지 안에서만 볼 수 있는 작품들을 통해 경험을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편재하는 또는 축적하며 분산하는 방식을 택했다. 물론 이러한 부분만으로 작품 간의 다종다기한 횡단과 전시의 총체가 제대로 종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물론 전시장을 그저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더욱 가능하지 않다. 적어도 무언가를 다 볼 수 없게 비엔날레가 구성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져 온 것 아닐까. 이는 두 가지 사실을 말한다. 사용자 입장에서 어떤 부분은 누락시켜야/선택해야 하고, 주최자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은 정보의 집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현상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물론, 이러한 언급들은 물론 《비엔날레》에 관한 직접적인 회의의 성격보다는 비엔날레가 갖는 스펙터클의 질서가 정말 합리적인 것일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 기초한다. 

    《비엔날레》가 ‘부산’이라는 접두어를 품고 있는 이상 부산에 관한 정보와 경험은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는 《비엔날레》가 부산의 어떤 아이덴티티를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무조건적으로 미래 가치 지향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어떤 미션, 곧 그것이 부산이라는 도시 이미지 브랜딩에 어느 정도 순기능을 해야 하는 것은, 부산비엔날레가 그리고 그 접두사가 반드시 ‘지역’이어야만 하는 비엔날레의 운명 같은 것 아니겠는가. 동시에 이 운명으로부터 실패하거나 미끄러질 수밖에 없는 게 또한 비엔날레 고유의 조건과 같다. 

    초량 전시장 입구.[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전시는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갖춘 부산의 풍경 속에 감춰진 이야기들을 펼쳐 내고 이를 다른 지역, 더 먼 곳의 이야기들과 연결하여, 지금의 우리가 경험하는 일들이 품은 복합적인 연쇄의 그물을 건져 봅니다.” 일종의 어젠다일 수 있는 전시 주제의 첫 번째 문단의 마지막 문장은,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지는 “네 개의 주요 항로”로 지시된 《비엔날레》의 네 가지 키워드가 가리키는 바는 다름 아니라 《비엔날레》가 부산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이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인 전시장인 부산현대미술관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을 이루는 (비엔날레에 가정된 ‘국제’라는 전제에 따른) 해외 작가들의 작업들은, 아마도 지난날 국가나 사회와 연관된 사회적 고통에 대한 재현이었으며 이는 타자를 재현하는 예술가의 초상―할 포스터가 이야기한 민족지학자로서의 예술가―쯤으로 귀착되었고, 이것이 어떻게 부산과 연관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마치 여기서 《비엔날레》는 전 지구적 인류가 지닌 고통의 경험을 축적하는 박물관 같았는데, 실제 작품의 매개는 작품의 매체적 특질이 갖는 고유성보다는 의미의 영도에 집중하고 있었고, 이는 무엇보다 동시대의 차원에서 그리고 부산과의 연관성에 대한 사전 지식까지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 듯 보였기 때문에― 아시아의 반경에서 서구, 아시아를 근대, 전근대로 나누는 이분법적 도식을 뛰어넘는 차원의 작업들 역시 몇몇 있었지만, 결코 많지는 않았다.―, 이후 이 부분을 더 살펴보고자 한다. 

    무니라 알 솔(Mounira Al Solh) 전시 전경.[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다시 말하면, 비엔날레에서 나아가 어떤 전시들에서 의미를 대체하는 건 정보이고 정보를 표현하는 건 텍스트이다. 전시장에 붙은 작품 설명―홈페이지에서는 아마도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장식하는 “조약돌”로 명명되었다.―은 작품과 전시의 관계, 전시의 어젠다 혹은 주제와의 연관성을 설명한다. 반면 이러한 텍스트는 (독자적으로 완결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과잉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이미지에 기대면서 투명하지 않게 배경 설명을 뒤섞는다는 점에서) 이미지에 비해 덜 즉각적이다. 이제 《비엔날레》는 대부분의 관객에 의해 10장 내외의 이미지로 압축되고 나머지는 구설로 떠도는데, 이러한 이미지는 대부분 대동소이한 차원을 이루고 이야기는 호오의 감상으로 ‘진단’된다―이미지와 이야기가 유착되는 것 역시 아니다. 
    사진들은 일종의 스펙터클한 이미지이거나 이색적인 느낌의 감각을 수여하는 것을 가리킨다―그리고 여기에는 대부분 ‘지역’으로의 이동을 감행하며 느끼는 감각 역시 연관되는데, 또한 거기에는 시작과 끝에 대한 계획이 따라야 한다. 이러한 지점에서 의미는 원래부터 감각으로 이행 불가능한 것이었던지 아니면 그것과 연관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었던 건지―다만 그 역사적 지식 자체를 인지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인지―에 대해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눈치를 챘겠지만, 비엔날레가 만드는 지성주의적 강박과 반지성주의의 환경 속에서 양자택일을 하지 않는 것이 두 방향의 실패를 막는 방식일 것이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타자의 재현 

    아마 부산현대미술관 1전시실에 들어가서 그 설명이 즉각적인 독해에 관한 어려움을 부르는 작업 중에, 가장 처음 맞닥뜨리는 ‘샌디 로드리게스의 연작 〈코덱스 로드리게스-몬드라곤〉(2017~)에 관한 텍스트는, “…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대에 얽힌 역사의 상처를 그려 내며 그 치유를 돕는다.”라는 문장처럼 그는 타자에 관한 접근을 예술가의 윤리로 삼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조금 더 객관적인 자리를 점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알렉산더 우가이는 “옵스큐라톤(obscurton)”이라고 하는 “핀홀 카메라의 원리를 기반으로 특정 사건과 기억의 장소를 기록하는” 작가의 “조각적 설치이자 작업 방법”을 선택해,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두 가지 역사적 장소를 찾아 기록한다. 
    현실을 재현하는 하나의 윤리에 대한 다양성의 변주 자체가 부산으로부터 연장된 국제, 부산이 맞물리는 국제에 대한 올바른 재현인 것일까. 또는 부산의 역사, 장소 특정성을 1/n으로 두는 간략한 방식으로 유효한 것일까. 결국 서사는 이미지 고유의 것이기도 하지만, 언어 자체의 확장성을 가져간다는 점에서, 마치 이미지 자체를 읽는 것이 아닌 단편적인 텍스트로부터의 도해는 보통의 비엔날레의 가장 성급한 종합의 형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레이스 슈빈트(Grace Schwindt) 전시 전경.[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이런 측면에서 벗어나 예술가의 자율성을 전제하는, 작가에 관한 텍스트 역시 있다. 그 예시로서 해당하는, 그레이스 슈빈트(Grace  Schwindt)의 작업에 관한 텍스트는 곧 수많은 작가, 그리고 그에 대한 일 대 일의 텍스트들에 대한 의무를 ‘전체적으로’ 매끈하게 소화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민족지든 그것을 벗어나 자유로운 국제적인 공통의 기준을 설정하든 다소 모호한 텍스트라 할 수 있는데, “조각은 종종 상처나 아픔을 드러내지만, 오히려 강하고 침착해 보인다. 그들 중 대다수가 경직된 구조로부터 더 유동적이고 추상적인 모양으로 변화해 나간다. … 작가는 개인의 경험에 기반한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하며, 트라우마가 각각의 신체를 통해 전달되는 방식들을 다룸으로써 개인의 트라우마 역시 사회의 일부임을 드러낸다.” 이 뒤에 위치한 문장에서 “사회”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체적으로 모호한 텍스트의 구사가 아니라 텍스트의 복무가 그 사회에 대한 모호성에 일조한다는 데서 적어도 이 텍스트는 무언가 나사가 빠져 있다―작가의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개인적인 것 너머의 구조적인 것을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사회적인 것은 관계의 양상에 의해 후차적으로 결정된다고 하겠다(여기서 ‘사회’는 “사회적”인 것과 구분된다. 전시의 텍스트는 관계의 양상에서 후자의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음을 온전하게 매개하지는 않는다.). 

    전통 혹은 지역을 결합하기

     

    메간 코프(Megan Cope), 〈킹인야라 구윈얀바[오프 컨트리]〉, 2022, 굴, 목재, 철, 가변크기.[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비재현에서 재현의 차원을 가져가는 작업들에 관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아딜라 술레만 역시 장인과의 협업을 통해 도자기 접시라는 생활 디자인과 예술을 결합하는 한편, 무굴제국 세밀화의 연장선상에서 파키스탄 사회의 국가 폭력의 이미지 속에 개인들을 병렬시키며 ‘전통’을 재창안하여 사회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낸다. 반면, 이러한 ‘화려함’은 사실상 전시장의 접경에 위치하며 민족지학지의 색다른 스타일로 각인된다. 메간 코프(Megan Cope)의 〈킹인야라 구윈얀바[오프 컨트리]〉[2022, 굴, 목재, 철, 가변크기.]는 “조개, 굴 껍질, 동물의 뼈와 같이 고대인들의 생활에서 파생된 잔여물이 쌓인” 패총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작업을 해왔는데, “작가의 선조인 퀀다무카 사람들의 주식”인 굴이 대규모 산업 형태로 변화하며, 기존의 굴 양식이 타격을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 설치는 경남 진해에서 수급한 굴 껍질을 사용해 전통적 양식 방식을 재현하는데, 사실상 이 ‘전통’에 대한 부분은 오리엔탈리즘과는 상관없는 통시사적이며 근대 이후의 토대를 바탕으로 하면서 동시에 설치로 수렴하는 비-미술적 이미지, 그리고 부산항 제1부두에 위치하여 부산의 바닷바람과 자연이 새어 들어가는 전시장의 적절한 환유적 조각을 형성한다. 
    침↑폼 프롬 스마파! 그룹은 “일본의 도부로크 사케의 제작 방식을 금정산성 막걸리의 누룩에 결합”해 《비엔날레》의 공식 음료로 제안하는데, 이러한 또 다른 전통적 방식의 협력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임에도, 오프닝 행사의 전이를 제하고는 실상 영도의 바깥 컨테이너의 비좁은 냉장고에 보관만 되며 전시로서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점에서 퍼포먼스의 일회적 현전과 전시의 연장의 간극을 강도 높게 재확인시킨다―클로징에 대한 계획 역시 없으므로 이벤트에 그친다. 

    거대한 구조의 가설

    한편, 비엔날레는 과잉의 공간을 채우기 위한 양적 스펙터클의 동원, 그리고 과잉의 공간이 되는 비좁은 작업들의 스펙터클―그것이 양적 스펙터클이든 아니든 상관없다.―로 양분되고는 한다. 여기서 전자와 후자는 다른데, 전자는 어쩔 수 없이 그럼에도 (작업 간의) 공간의 이음매가 생겨남을 의미하며, 후자는 작업이 과잉으로 자리해 ‘전시’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림을 의미한다―이 모든 것들이 결국 이미지 몇 장으로 추슬러지는 건 다름 아닌 과잉의 텍스트의 실패 이전에 밀접한 작품 간의 비결속적 접합에 있는 것 아닐까. 후자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난다면, 부산항 제1부두와 영도는 전자의 차원이 적용되는데, 가장 온전한 전시의 규격을 갖춘 건 오히려 초량에 해당했다. 

     

    송민정, 〈커스텀〉, 2022, 휴대 전화 여러 대, 영상 설치, 가변크기.[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송민정 작가의 작업 〈커스텀〉[2022, 휴대 전화 여러 대, 영상 설치, 가변크기.]은 한국에서 해외 발령을 받은 남편을 따라 부산에 정착한 하루코와 부산의 춘자가 만났다는 설정으로, 이 다른 전시장의 물리적인 둘의 거리가 작업으로 통합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는 스마트폰들로 상영되는 것과 달리 그 경로를 이루는 구조물의 거대함이 이루는 비균형적인 스펙터클이 비엔날레 자체의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전유하는 동시에 부산이라는 물리적 거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검토하며 작품에 도달하게 했다. 그러한 신비화의 주술은 다시 반쪽의 작업이 이전된 영도에서 깨어졌다. 곧 오래된 건축물을 스펙터클적인 구조로의 설치를 통해 확장함으로써 협소한 장소 특정성의 현상학적 체험이 고양되는 경로를 해체하였다. 

    필리다 발로(Phyllida Barlow), 〈무제: 블루캐처; 2022〉, 2022, 철, 그물, 시멘트, PVA, 625×850×600cm.[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현남, 〈연환계〉, 2022, 에폭시 수지, 폴리우레탄 수지, 안료, 아크릴, 시멘트, 탈크, 유리섬유, 철, 플라스틱 체인, 카라비너, 폴리스티렌, 가변크기.[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필리다 발로(Phyllida Barlow)의 〈무제: 블루캐처; 2022〉[2022, 철, 그물, 시멘트, PVA, 625×850×600cm.]는 비엔날레를 맞닥뜨리게 하는 이미지다. 이는 영도의 현남의 작업을 만나 비로소 그 궤를 같이하는데, 부산의 어선에서 사용되는 그물을 갖고 시멘트에 담가 철골 기둥과 시멘트 지지대 위에 올려놓은, 헐벗고 헐거운 이미지는 우선 거대하고 닿을 수 없는 촉각의 실패로 인한 잔여적 이미지로서, 따라서 조망과 포획의 이미지를 구상하게 하는 멀어짐의 적극적 전유를 유도하는 작업이지만, 또한 이는 다닥다닥 벽에 붙은 작업들의 공간을 가로지르며 입체적인 포획선을 그음으로써 닫힌 공간을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부산항 제1부두와 영도는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작업이 위치했어야 할 가상 공간으로 작용한다. 부산항 제1부두에 자리한 현남의 〈연환계〉[2022, 에폭시 수지, 폴리우레탄 수지, 안료, 아크릴, 시멘트, 탈크, 유리섬유, 철, 플라스틱 체인, 카라비너, 폴리스티렌, 가변크기.]라는 구멍이 숭숭 나며 안팎의 다른 색감이 입체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은 녹슨 배의 닻에 묶여 있고, 이로써 비교적 연약하고 화려한 작업은 부산의 상징적 이미지와 비현실적인 궤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마치 너무 평범한 물질이 거대한 힘과 엮이며 파열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래, 〈구멍이 많은 풍경: 영도 바다 피부〉, 2022, 비계, 폐유, 공사 가림막, 1620×2160×1660cm.[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영도에 전시된, 건설 현장에서 사용되는 재료들을 가지고 작업해온 이미래의 작업 〈구멍이 많은 풍경: 영도 바다 피부〉[2022, 비계, 폐유, 공사 가림막, 1620×2160×1660cm.]는 《비엔날레》를 상징하는 또 이를 환유하는 거대한 체험 공간과 이미지가 되었다. 사실상 이 작업은 “건물의 골조가 드러나 있”는 공간 안에서 건설 현장의 외형을 스펙터클하게 재현했다는 인상과 함께 태풍 힌남노와 난마돌로 인해 원래의 천이 더 손상되며 시간의 잔해와 같은 형상을 하며 오히려 더 주목받게 되었는데, 공간을 채우기 위한 스펙터클이든 스펙터클을 채우기 위한 공간 선정이든 그것이 환경과 적확하게 맞물림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부산’이 현재화됨을 의도치 않게 드러낸다.

    부산을 호출하기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손혜민, 신현진, 유소윤), 〈손엮어풀얽힌갯바위〉, 2022, 혼합매체 잉크젯 프린트, 목재, 광목, 그물, 부표, 초), 영상(02:20, HD 컬러, 무음), 가변크기(200×785×650cm). 설치: 신익균, 영상편집: KAY.

    메간 코프나 필리다 발로와 같이 부산의 사물을 작업으로 전유하는 작업이 다소 임시적인 조각의 특질을 실험하는 일차원적인 충동성의 발로로 보인다면, 단순히 부산에서 태어난 작가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산에서 작업’을 한 몇 명의 작가들의 작업은 심층적인 충동의 특질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손혜민, 신현진, 유소윤)은 메간 코프의 작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더 구체적인 과정 자체를 작업으로 연장하는데, 이는 부산 해녀, 맨손 어업인의 목소리를 작업으로 현전시키는 행위로 나타난다. 곧 필리다 발로의 작업에서 부산이 표면화된다면, 그리고 현남의 작업에서 다시 부산이 사물의 환경으로 환원되어 가는 것으로 보인다면,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의 작업에 의해 가시화되지 않은 부산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물론 이와 같은 또 다른 예시는 미술관을 제외한 다른 공간들의 채택 그 자체이다. 

     

    PACK, 〈힌터랜드: 하우스보트 해부도〉, 2022, 아크릴에 UV프린트, 레이저 프린트, 알루미늄, 가변크기. 콘셉트 아트: 김정태, 그래픽 디자인: y!.[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이에 대한 비판적이기보다는 다분히 독립적 위상을 갖기 위한 차원에서 이들은 앞선 부산현대미술관의 비좁고 딱딱한 경계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며 동시에 관객 스스로에게 공간을 열어주기 위해 라운딩된 원형 공간에서 작업을 선보인다. 해초와 멸종 위기 생물 등의 생명력과 반대되는 지구 환경의 역설을 드러냄에도 그렇게 명확한 어젠다를 구성하는 데는 한 발 물러서는 듯 보인다. 이는 오히려 《비엔날레》의 부산이라는 혐의를 충족하며, 다른 작업들에 대한 가상의 메모리를 현실과 맞닿게 하는 주요한 참조점으로 기능한다. 곧 물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한 PACK의 〈힌터랜드: 하우스보트 해부도〉[2022, 아크릴에 UV프린트, 레이저 프린트, 알루미늄, 가변크기. 콘셉트 아트: 김정태, 그래픽 디자인: y!.]은 가상으로 하우스보트를 타고 해양을 떠돌며 사는 사람들의 기록들을 통해 인류세 이후의 23세기의 뒤바뀐 인류학적 사실을 수집, 나열하는데, 소설의 파편들, 또는 파편들로서의 소설은 〈손엮어풀얽힌갯바위〉[2022, 혼합매체 잉크젯 프린트, 목재, 광목, 그물, 부표, 초), 영상(02:20, HD 컬러, 무음), 가변크기(200×785×650cm). 설치: 신익균, 영상편집: KAY]의 실제의 단면들, 구술의 문체로부터 흡사 연장된다. 
     
    이러한 구술은 김도희 작가의 작업 〈새우깡〉[201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59.4×84.1cm.]을 통해 비로소 부산을 현현시키는데, 잘린 손가락에 낀 새우깡이라는 강렬한 사진 이미지는 어렸을 적 할머니―“할매”―를 따라간 목욕탕에서 “총탄 자국이 몸에 심겨” 있는 용사 할아버지들, “조선소 일하다가 팔 없는 겨드랑이에 수건을 끼워 귀신처럼 머리를 털어 말렸”던 “어딘가 짧아진 삼촌들”이 새우깡을 사주고 “두어 개가 비는 손가락으로 새우깡 봉지도 뜯어주었던” 작가의 자전적 경험에 근간한다. 이러한 글은 무언가를 들리게 하는 것과는 다르게 들려주는 걸 다시 말한다는 점에서, 곧 화자와 청자가 분열되며 중첩되는 지점에 있다는 점에서, 그 말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 있는 듯 보인다. 

    김도희, 〈살갗 아래의 해변〉, 2021-2022, 합판 위 수성 페인트, 238.6×1076cm.[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실제 “제1부두에서 바라다보이는 섬”인 영도의 조선 수리소 마을, “깡깡이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 “배에 눌어붙은 따개비와 녹을 제거하는” “깡깡이”라는 행위를 보며 자랐고, 전시장의 흰 벽을 마치 연마기로 갈아 내며 노동의 경험을 투사한다―〈살갗 아래의 해변〉[2021-2022, 합판 위 수성 페인트,  238.6×1076cm.]. 이러한 과정은 다른 공간 안의 영상 작업―〈몸의 소실점〉[2020, 단채널 비디오 설치, 사운드, 컬러, 06:14.]―으로 전시되어, 어떻게 보면 몇 안 되는 《비엔날레》 안의 개인전의 밀도를 달성한다. 노동은 사실상 수행되는 것으로 기억을 보존하면서 더 적극적으로 그것과 상대하면서 역사를 계승하면서 되살리는 동시에 자아를 관찰하면서 자아를 보존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어떤 신체와 정신의 한 부분에 내재되며 현재화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부산에서 출생하고 자랐고 그 경험을 토대로 작업을 했다는 차원에서보다는 타자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타자로서의 나를 발견한다는 점에서 예외적이다. 

    부산항 제1부두에 위치한, 김익현의 〈빛 속으로〉[2022, 싱글채널 비디오, 리어 프로젝션, 사운드, 25:00.] 역시 부산을 배경으로 한 리서치 작업인데, 밀도가 가장 높은 편이다. 1905년 건립된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등대”인 제뢰등대가 2001년 옮겨져 그 불빛을 볼 수 없지만, 당시 남은 사진으로 그 빛을 추적해 간다는 낭만적인 콘셉트는, “1930년대 식민지 부산과 만주 봉천을 연결했던 급행열차 히카리 호”의 또 다른 노선에 주목해 걸어가며 찍은 사진들로 여행 사진의 장르적 성격을 띤다. 곧 이전에 찍힌 사진과 현재 찍은 사진들은 비가시적 데이터로 시간과 거리를 넘어서서 전송되는 이미지의 새로운 환경을 바라다보는 것으로 연결된다. 렉처 퍼포먼스로 자신의 작업을 확장시키기도 하는 작가는 기존에 이미지들의 단순하고도 일정한 나열 뒤로 정교한 서술로 렉처 형식의 영상 작업을 주로 해왔으며, 〈빛 속으로〉는 그 과정의 산물과 지표로서의 데이터―“시간과 거리, 속도, 역 이름, 열차의 경로가 표시된 이 도표의 격자”―가 보완된 것이다. 이는 같은 장소에 자리한, 해저의 구리 광케이블을 이용해 데이터를 실어나르며 식민지를 지배하는 구조를 언급하는 작업, 타비타 르제르의 〈밀물과 썰물 저 아래〉[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8:40.]와 연관해서 살펴볼 수 있다. 

    부산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된 남화연의 〈당신은 오직 두 번 산다〉[2022, 싱글 채널 비디오, 6채널 사운드, 47:48.]는 퍼포먼스 리허설 자체를 촬영한 작업으로, 퍼포먼스 리허설의 잔여물은 〈너의 입은 작은 집〉[2022, 혼합매체, 가변크기.]이라는 설치로 부산항 제1부두로 연장되지만, 사실 부산을 재현하지 않고 부산을 터전화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순수하고 독자적인 지위가 무력화되지 않는 차원에서의 예술의 이념은, 그 장소 없음의 배경 아래 잔존하는 이미지의 파편들마저 모두 무용한 현재의 시간으로 점화한다는 점에서, 작업을 무력화한다. 그리고 이러한 차원은 《비엔날레》를 과잉의 이미지로 만드는 데도 실패한다. 

    또 다른 근대

    슈 차웨이(Hsu Chia-Wei), 〈사무라이와 사슴〉, 2019, 2채널 비디오, 08:50.
    프란시스코 카마초 에레라(Francisco Camacho Herrera), 〈고무 산업 자료 아카이브〉, 1890-, 사진 자료, 가변크기.[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슈 차웨이(Hsu  Chia-Wei)의 〈사무라이와 사슴〉[2019, 2채널 비디오, 08:50.]은 17세기 사슴 가죽이 유통되는 거대한 국제 시장을 참조하는데, 곧 “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대만의 사슴 가죽을 교환한 후 사무라이 문화의 일부로서 사슴 가죽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일본에 다시 판매하여 은을 벌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무역 행위에서 착안해, 자갈을 싣고 바다를 건너는 거대한 배, 사무라이 의상을 만들고 착용하는 모습, 프놈펜 동물원의 사슴들과 사육사의 인터뷰 등의 이미지를 나열하며, “시공을 초월하는 연결”을 통해 근대의 기원을 사슴 무역의 키워드로 추적해 나간다. 
    이와 유사한 작업으로, 프란시스코 카마초 에레라(Francisco Camacho Herrera)의 작업은 “남미 아마존과 아프리카의 대규모 고무 플랜테이션과 그 기술이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이전한 사실을 연결하고, 이를 다시 부산의 고무 사업과 연결”하는데, 이는 아카이브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슈의 작업이 이미지의 매개를 거친다면, 프란시스코의 작업은 전반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방대한 자료들을 헤집어 볼 것을 요청한다. 이는 협업 작업이면서 전혀 다른 미감을 구축하는 한국의 법인 스님의 불화 〈낙원으로의 여정, 오래된 미래-1〉[2022, 광목, 한지, 석채, 금, 240×180cm.]의 이미지에서 매개된다. 

    가마타 유스케(Yusuke  Kamata), 〈일본식 주택, 제국주의의 석정〉, 2022, 목재,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 페인트, 모래, 모니터, 455×1160×1020cm.[사진 제공=2022부산비엔날레]

    부산을 로케이션으로 한 오석근의 ‘적산’ 시리즈는 한국 근현대사와 맞물려 현지에서의 적응 과정 등 적산가옥의 변화상을 추적, 탐구해 가는데, 기존 인천에서 부산으로 그 작업 과정을 연장했다고 하겠다[출처: 「《적산가옥》: 중층의 시간과 시각」, https://www.artscene.co.kr/1766]. 관련해서 오석근과 함께 전시를 했던 가마타 유스케(Yusuke  Kamata)는 『일본서기』에만 기록된 삼한정벌, 곧 “고대 일본의 진후 황후가 신라에 군대를 보내 굴복시켰다는 이야기”가 이후 계속해서 조선 침략의 명분으로 작용했음에 주목해, 16세기 왜란과 함께 지어진 부산, 경남 일대의 왜성의 흔적을 쫓아 “부산과 규슈 지역을 잇는 하나의 석조 정원 이미지를 구축”한다―〈일본식 주택, 제국주의의 석정〉[2022, 목재, 잉크젯 프린트, 아크릴, 페인트, 모래, 모니터, 455×1160×1020cm.]. 이는 상상적인 차원을 이미지로 재현함으로써 유아론적으로 나의 영토를 주장하는 전쟁의 이념 혹은 정치적인 차원에서 전쟁을 설계하는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상에서 전쟁과 연관된 행위를 감각으로 치환한 것이라 하겠다. 

    의미의 그물을 벗어나서

    오우암 전시 전경.

    세계사의 인류학적 리서치와 보고, 거대한 스펙터클과 이미지 시장의 터널을 쉽게/겨우 빠져나온다면, 또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면, 그 바깥에서 사실 몇 개의 인상적인 작업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해방과 한국 전쟁 전후 한국의 모습”을 담은 오우암의 회화들은 하나의 톤과 정지시킨 사람들과 풍광의 조합을 특유의 색감과 빛으로 보여주며, 미지의 시공간을 현전시킨다―하나의 선분으로 나열된 회화들은 그 공간 자체를 특유의 빛으로 발색한다. 이러한 그림은 멜랑콜리를 띠며 “원형적인 기억을 보여준다. 이와 비교해볼 수 있는 작업으로, 아르투로 카메야의 ‘독립적인’ 전시 〈텅 빈 잔〉[2022, 나무에 아크릴과 클레이 분말, 발견된 오브제, 전자기기와 LED 조명, 스피커, 비디오, 석고보드 구조물, 250×800×600cm.] 역시 흥미롭다. “1990년대 페루 리마의 교외 풍경, 가족의 전통과 역사”로부터 시작된 작업은 수직으로 병렬된 기울어진 맥주잔들 위로 떨어지는 물줄기, 어두운 곳의 디오라마 방식의 축구 경기장, 복도에 자리한 의자들은 레디메이드와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현실의 한 장면을 의도적으로 가깝게 재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역사는 ‘역시’ 비판적이기보다 그 자체로 멜랑콜리의 차원을 띤다. 

    오웬 라이언(Eoghan Ryan), 〈개소리〉, 2022, 3채널 비디오, 13:57.

    오웬 라이언(Eoghan Ryan)의 작업, 3채널 영상 설치 〈개소리〉[2022, 3채널 비디오, 13:57.]는 강도 높은 컷 편집과 사운드, 자막의 진행을 통해 압도적인 집중력을 가져간다. 동시에 재현이 아닌 잠언적이고 우화적으로 현실을 언어화하며 역사의 진실에 관한 태도를 적시한다. 이는 “20세기 전반기 유럽의 상황과 현재 21세기 초반의 상황을 연결 짓”고 있음에도, 푸티지 이미지들의 시간 없음의 차원을 연장하며 재현으로부터 자유롭고 동시에 현재에 대해 더 풍부한 관점을 확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김성환의 작업 역시 일종의 개인전 성격을 띤다. “20세기 초 구 조선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 역사”를 다루는 작업은, 중앙의 영상 작업을 기점으로 그 주변은 기록처럼 연장된다. “엄마”, “경계” 등 몇 개의 키워드가 자리하는데, 이미지 안에 사람을 위치시키고 흐릿하고 불투명하고 흔들리는 반복적인 이미지들로 영상을 채운다―사람은 마치 패션 사진의 모델을 자처하며 하와이 곳곳의 자연에 자리한다. 과거를 현재화하거나(현재로 기록을 가져오거나) 현재를 과거화하는(과거의 장소에 다가가는) 이미지의 느슨하고도 적극적인 작동 방식으로써 역사와 그 간극과 예외적인 현재의 미래를 가늠하게 한다. 내레이션의 설명적인 특성이나 이 시리즈의 이후 계속될 프로젝트를 공지한다는 점에서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거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작품에 관한 메타적 인지를 추동한다. 

    사사모토 아키(Aki Sasamoto), 〈영상: 항복점〉, 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1:44.

    부산현대미술관의 한 방에 독립적으로 상영되는―영상의 경우 대부분 독립적인 하나의 공간을 수여했다.―, 사사모토 아키(Aki Sasamoto)의 퍼포먼스 영상 역시 흥미롭다. 〈영상: 항복점〉[2017, 단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21:44.]은 탄산 정수에 따라 모든 사람이 측정 가능하다고 주지하는데, 전시장을 퍼포먼스의 장소로 일회적으로 연출한다. 모빌, 쓰레기통, 봉지, 벽의 캔버스까지 설치와 회화 등 모든 것이 렉처 퍼포먼스의 재료로 변환된다. 또한 트램펄린을 타는 등 ‘탄성’이라는 성질을 재료들에 부여하고, 파이프 오르간, 색소폰 등의 악기가 동원되는데, 대부분의 시간이 퍼포먼스의 시간을 위해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으며 촬영 역시 기록적이면서도 그 세부를 잘 담아낸다. 

    에필로그: 다른 형식에 대한 변증법적 요청

    무언가를 더 잘 보기 위해서 필요한 (상대적으로) 영속적 시간과 무언가를 더 효율적으로 보기 위한 임시적 장소 사이에서 《비엔날레》는 두 가지 시공간을 통합하고자 했다. 각각 웹과 통속적인 전시장을 구성하는 것이 그것이다. “물결 위 우리”라는 슬로건은 김해주 예술감독이 어렸을 적 부산을 감각했던 것을 일종의 부산의 표상으로 재발굴한 것이라는 점에서―이는 부산의 내외를 교차시키는 언어 전략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비엔날레》의 장소들에 직접 전이되며 지역의 시간들을 대화, 강연, 저널, 그리고 전시 등을 통해 뒤섞었다는 점에서 명확하게 구현된다. 장소성과 장소에 대한 감각에 메타 인지―물결 위에 진짜로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지할 수 없을 것이다.―가 중첩되어 있는 이 같은 이미지가 《비엔날레》를 잘 설명한다고도 하겠다. 


    부산, 지역, 근대화, 여성, 생태, 인류세, 국가와 개인, 이주 등 다양한 키워드가 《비엔날레》와 맞물린다. 몇 개의 작업들이 결부되며 상사와 차이를 드러내며 종합된다. 그럼에도 거기에 이르기가 쉽지 않다. 비엔날레에 대한 피로감을 다양한 방식으로 부산을, 전시를 연장하는 《비엔날레》의 과잉적 제스처로 치환하며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한 번에 다루는 형식을 매개하기에 대한 어려움이 그 구성의 정교함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매개’가 요청되며, 따라서 조금 더 더딘 과정과 다양한 언어를 필요로 한다. 작은 기획들, 각기 나누어진 그것을 잇는 비평은 자연스러운(?) 생태계 내에서 창출되는 언어‘들’ 아닐까.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전시 개요]

    주제: 물결 위 우리
    기간: 2022. 9. 3. - 11. 6.(65일간)
    전시감독: 김해주
    장소: 부산현대미술관, 부산항 제1부두, 영도, 초량
    규모: 25개국 64작가/팀(80명)
    주최: 부산광역시, (사)부산비엔날레조직위원회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