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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5분의 1초>, ‘넘어짐의 기술’로부터
    REVIEW/Dance 2015. 12. 22. 19:03

     

     

    <1/75초> 연습 컷 @ 프로젝트 뽑기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넘어짐의 연습'에서 '걷기의 육화'로 나아가는 과정 전반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표현 과정은 매우 자유롭고 또 구체적인 한편, 일종의 일반적인 신체 자세와의 상관성으로 현실적인 감각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뗄 수 없는 맥락의 초점은 '세월호'라는 것으로, 공간 자체의 흔들림, 어떤 하나의 좁은 공간의 상정 등으로써, 지난 작품에서 어둠이 켜지며 눈을 덮는 것과 같이-곧 어둠이 있기에 눈을 감는다가 아닌 눈 자체로 어둠이 옮겨간다- 잠겨가는 신체에 대한 유비가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의 연장선상에서, 현실의 맥락이 투여, 연장되는 바 있다.

     

    메리홀의 무대와 객석 사이를 무대로 재구축해, 벽의 질감이 평면으로 곧장 들어오고 그로부터 출발하고 멀어지는 흐름을 만든다. 세 명의 무용수들은 처음에 세 개의 선에서 옆으로 자세를 취해 걷는데, 시선은 정면을 향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것은 곧 나의 자세에 따라 직결되는 바로 앞을 본다가 아니라, 하나의 장면을 본다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곧 그 하나로 연결된 장면에서 눈을 뗄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 거대한 장면은 무엇인가. 마치 이들은 그 장면 자체로부터 동결되어 버린 듯하다. 곧 시선은 장면에 붙들려 있다. 여기서 신체는 부차적이다.

     

    그 뒤로 그 선분에서 기우뚱하기도 하고 넘어지되 그것은 고통의 유비를 갖지 않는데, 이는 그것을 하나의 다른 움직임의 실험으로 가져가기 때문으로, 당연히 어떤 이야기의 해석 지점으로 가는 걸 지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넘어짐이 공간 전체를 유동하는 비평형적인 몸의 기울기로 확장되어 나타나는 순간으로 나아가면서 그 넘어짐의 의미는 새삼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들은 걷기를 관객석까지 침범해 거기서부터 걷기를 시작함으로써 관객 스스로가 미끄러지는 감각을 주며 우리로부터의 내재적인 기우뚱함을 안기기도 하는데, 셋의 비균형적인 움직임이 초래하는 공간 전체의 흔들림은, 일전에 정영두 안무가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펼쳤던 공간을 쓸어 담으며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광경의 어마막지한 모습의 연장이면서 그것과 다르게 언캐니한 신체들의 현전을 일견 보여주며 드러난다. 곧 이들은 장면에 붙잡힌 인형, 그리고 반복된 움직임으로부터 실패하며 움직임을 완성하는 어떤 인형으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실상 음악의 사용은 초점을 안과 바깥을 전환시키는 역할을 명확히 하는데, 중간에 사운드가 맺히며 어두워짐으로써 바깥 어둠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전환하게 한다. 곧 그동안 우리가 어떤 흔들리는 표면의 안에서 우리 역시 그들의 몸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면, 이제 우리는 순전히 안에 갇힌 그들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유롭게 동시에 이탈하여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어떤 우정과 연대의 측면에서 맞물리며 걷기의 연습을 해 나간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은 정말 어떤 연극적 장면의 명확함이 부여되지 않은 채 펼쳐지는 것이며, 어떤 대사나 묘사의 포즈를 재현하는 바는 없다는 것으로, 단순히 미묘한 시점의 전환이 공간의 맥락을 재배치하며 재구성하는 점에 의해 극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사실 세 사람이 하나의 인형들로 생각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의 선분 위에서 그 규약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체적 사유의 역량이 빠진 것처럼 보이며 그 셋은 전혀 어떤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셋은 이제 어떤 전적인 좁은 안에서 선분의 규약 대신 흔들림 안에서 걸어 나가는 법, 살아가는 법 자체를 시도, 시행하는 것처럼 바뀌게 되며, 셋이 맞물려 움직이는 부분들에서 역시 기우뚱한 자세들이 나타난다.

     

    양옆과 다른 자세를 취하며 팽팽하게 맞물려 원심력을 유지하는 부분은 신선하다. 또한 둘씩 돌 때 서로를 보는 미묘한 시선에 어떤 따스함 등이 인격에 대한 감각적인 측면으로 해석을 옮겨가게 하는데, 경계 없는 커다란 안에서 어둠으로부터 갈라지는 안, 그리고 한층 좁아진 안에 대한 관찰은, 과연 무엇을 상상하게 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의 실험은 사실상 처음 걷기 실험의 인형적 육화의 모습보다-곧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무용의 움직임 창출의 한 단편들이라면- 한편 실제적이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말도 안 되게 웃음이 현전하는 순간 등을 전함으로써 연대의 측면이 급격하게 드러나면서 가상적인 이상을 구축하는 듯 보인다. 그것은 선의 규약을 넘어서면서, 그리고 이미 우리는 그 안에 있지 않음으로써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이밀어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 스스로에 대한 의심으로 나아가야 하는, 가상을 실제처럼 경험하게 하는 것, 이러한 무형적인 배치의 장치는 얼마 전 공연된 <비포애프터>와는 달리 직접적으로 세월호를 다루지 않으면서-사실 직접적인 하나의 방식과 동시간적 시간의 경험을 통한 간접적인 방식 모두로 접근했지만- 그것의 유비를 가져가는 일면이 있다.

     

    이는 안무가의 직접적 해석의 일면으로서보다는 무의식적 처리의 한 부분이라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어쩌면 해석의 부분보다 감각의 측면을 회복하는 측면이, 그리고 그러한 해석의 지점을 분명히 겹쳐지지 않게 둠으로써 역사 자체를 비추거나 승화하거나 역사 그 자체에 속하지 않는 가운데, 역사 자체에의 어떤 움직임과 시각 등의 감각을 분할하고 재조립하며 어떤 기이한 움직임들을 만들어 간다. 그것은 걷기의 육화라는 어떤 도약으로의 먼 연습이며 그에 대한 뒤늦은 성공이다. 걷는 것이 이리 힘들다니. 그것이 은유하는 지점, 공간 자체의 흔들림과 버티는 것 자체의 어려움 등을 통해 어떤 신체 자체가 공간에 낯설어지는 지점을 낳는 측면이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공연은, 실제 역사의 실패와 부정(不正)을 (가장 쉬운 비판의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그 역사 속에서의 한 시각을 (의도치 않게) 육화하고 있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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