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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현대무용단 <여전히 안무다>
    REVIEW/Dance 2015. 9. 16. 12:30

     

    대부분의 안무가들에게는 텍스트와의 길항 작용이 느껴졌다. 이는 ‘실험실’이라는 진공의 비움직임적 장소에서의 생각들의 나눔이 나은 하나의 결과로 볼 수 있는 부분인가? 어쨌건 간에 두 시간을 전후로 나눈다면, 점점 흥미진진해지는 전반전에서 후반전은 꽤 지루해졌다. 그 정점은 아마 윤자영의 <변신-아버지>의 후반부 이후여서였을 것이다.

    진향래 안무가는 객석 입구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관객을 줄 세우고 좁은 텐트 안으로 통과시키기를 종용한다. 극장을 소수를 위한 매우 좁은 문으로 바꾸고, 정신없는 요설로 관객을 안무화한다. 곧 여기에는 안무도, 고정된 관객도, 극장도, 아무것도 없다. 무대 역시 없고 다만 가상의 우주여행을 하는 상황으로 퍼포머를 관객의 자리로 바꾼다. 정신없는 중계 상황은 혼란스런 카메라 워킹으로 연장되어 극장 바깥(의 바깥)으로 입구 너머의 관객의 의식을 교란시킨다. 이러한 장난 같은 안무 이후 텐트 안 ‘테크닉-감정-유연성’이라 적은 종이를 읽기를 통해, 관객을 세뇌시킨다. 사실상 우주라는 드넓은 공간으로의 도피·모험의 담대한 영역을 쇼 차원에서 가져가는 듯 보이나 실은 안무가로서의 고민과 체화된 의식들을 드높인 속도를 통해 버무리며 동시에 소진하는 데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토록 안무가 쇼로서의 흥미로운 차원을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로 귀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실은 70년대 아방가르드 연극에 대한 기시감을 부르는데, 사실 하나의 외양으로 육화되는 이 광경이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거. ‘더 재미있는 쇼를 달라!’에 대한 소진된 감상과 같은 잔여적 느낌으로의 귀결.) 그렇지만 그 안무의 활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은 춤을 추지 않으며 관계를 엮는 과정에서 동반되는 춤에 근접하는 최대한의 어떤 기술이자 효과인 것인가.

    최은진 안무가는 ‘대칭성 인류학’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텍스트를 이야기로 엮으며 인간과 동물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로부터 시작해, 춤이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가로 환원되기 이전의 종교적 기능을 하던 원시적 시대의 제의로서의 춤을 이야기하는 데 이어 ‘최초의 관객’이라는 왕과 (그가 보는 광대로서) 백성이라는 이분법적 도식 이후 일제강점기의 예술이 사라진 시대를 거쳐 블랙박스의 현재에 당도한다. 이야기는 꽤 매끈하고, 그에 맞춰 분배된 선-레이어들을 따라 가는 역할에 따른 관객 참여형 안무의 방식은 디자인적인 한편, 매우 단조롭다. 풍부한 텍스트와 밋밋한 움직임의 조합은, 가령 관객 참여를 통해 완성하고 전체 안무 지형을 그리는 배치로 인해서다. 그 매끈한 이야기에는 (실은 엄밀하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띄기에 오히려 그 ‘매끈함’이 어쩌면 가장 큰 오류로 보이나 그럼에도) 꽤나 재미있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가령 약간 흘리면서 했던, 동양의 신은(사실은 ‘신’이 아니라 스피리트spirit를 가리키는 개념일 것이다) 서양의 신과 달리 하나의 신이 아니다라는 것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그리스 신화의 인격화된 신들을 단적으로 보자, 그리고 동양의 신이 다신이라는 데 오면, 그것이 일종의 운동 작용으로서의 (귀)신 혹은 정령의 차원에서 신申이라는 것을 간과하고서 하는 말로 보이나 실은 '신'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정의가 내려지진 않고 있으며, 마지막 곧 근대 이후를 제한다면 동양과 서양, 한국에 대한 분별을 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소위 인류학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러한 가정을 충분히 포함하고 읽힐 수 있는 말이다. 오히려 신이라는 개념 자체를 조금 더 엄밀하게 정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곧 대칭성 인류학이라는 하나의 책을 렉처식으로 가져오는 데서, 그것을 매끈하게 다듬는 과정에서 역사의 굴곡과 다양한 사상적 견지가 생략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생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는 잘 다듬어져 있고) 어쨌거나 군더더기 없이 빠르게 가속되는 말과 움직임들의 맞물림 가운데 렉처는 꽤 재미있었다.

    권령은은 안무 콩쿠르에 통과하기 위한 춤을 춰야 했던 이상훈 무용가의 목적을 위한 기능적인 춤과 함께 살을 빼기 위해 해야 했던 손을 입에 깊숙이 넣어 위를 게워내는 과정을 실제 한다. 마지막에 ‘Fantastic Baby’에 맞춰 어두컴컴한 곳에서 정신 줄 놓은 춤을 추는 광경은 시대의 불길한 징후처럼 ‘승화’됐다. 그 점에서, 이는 정서가 컸다. 어쩌면 이는 세대적 정서로 치환·수렴될 수 있는 부분이라 판단 유예한다. 하지만 그 점에서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즐길 수 있는 유행가를 가지고 추었다는 점이 아니라 거기에 함축된 어둠의 정서, 곧 배면의 항거할 수 없는 경험에 대한 깊숙한 재현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반면 두 번째 선보인 무대는 지루했는데, 전체 판의 흐름 안에서 중복되는 경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오프닝 형식처럼 곽고은 안무가는 최은진의 무대 이후 테이프를 뜯는 것에 맞춰 춤을 추고 들어갔다 다시 하나의 무대가 끝난 후 등장해 다시 춤을 추는데, 이어폰을 끼고 개량 한복 같은 투명 저고리를 더해 퓨전식 의상을 선보인다. 이러한 접붙인 의상 아래 춤이 바로 최은진의 무대에서 미처 다 드러자니는 않았던 일제강점기 이후의 어떤 춤의 전형과 같을 것이다. 어떤 꺾기와 같은 활발한 생명력이 현대인의 재현적 표상 아래 자연스레 드러나는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듣지 못함으로 인해 자율적인 질서를 가져가게 되는데, 곧 관객이 안중에 없다는 것 같다. 다시 말해 나는 춤을 잘 추겠다는 것으로 비친다.

    장홍석은 ‘이것은 무엇이다’라는 문장과 동작으로 안무를 짰는데, 실은 그 전 자신의 출연작이었던 임지애 안무의 무대에서 모티브를 따 온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냥 단순하게 그것을 잇는 방식으로만 끝까지 간다는 점이 그의 스타일로 전환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도상과 (문장) 기표는 서로 결부가 잘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이는 가장 단순한 안무 프로세스를 고안해 냈다는 점에서 깔끔하지만 실은 그 재미가 어떤 물음의 강도를 크게 주어주진 않았다. 장홍석이 문화역서울 284에서 보였던 안무라는 벽, 기존의 안무 사회라는 벽에 대한 저항과 같은 메타적 비평의 몸짓이 갖는 울림은, 오히려 움직임을 장면으로 짜며 몽타주 역학을 짜는 점에서 어느 정도 공통되는 황수현, 임지애의 안무(와의 연대)를 거쳐, 그리고 김승록의 연대적 몸짓들의 분배와 코미디적 효과 창출의 생기 넘치는 장을 구성하는 것과 어느 정도 접붙어서, 말과 움직임의 교호하며 배반하며 비동시적인 동시성을 이루는 움직임의 지속을 가져가는데,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동어 반복적 움직임의 표면적 몸짓들로 축소된 감이 없지 않다.

    이어 윤자영 안무가의 작업은 배꼽과 변기라는 메타포를 초반에 꺼내며 깊숙한 구멍으로부터 신화적 원형으로 점프한다. 생각 없이 배꼽을 파는 행위는 선글라스를 낀 (눈 먼) 아버지와 딸을 더블로 뒤섞는 한편, 그와 동시에 태어남을 인계하는 탯줄과 그 경계의 죽음으로부터 심청전의 문화적 원형을 파생시킨다. 이는 단지 ‘심청-심청-심청’ 하는 이상한 변기 속 울림 같은 잔향으로 빙글빙글 느리게 돌아가는 원형原形적 의식으로 인해 그 물을 상상케 한다. (여기서 ‘심청’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깊이(심)와 맑음(청)으로 다시 읽히는 측면이 있다.) 곧 변기를 보여주지만 물은 무대에 없었고, 심청전의 다른 어떤 토막도 소개되지 않은 가운데, 곧장 그러한 이야기의 실재로 건너뛴다. 이러한 도약으로서 비약이 갖는 합리성, 혹은 합목적성은 다른 어떤 안무가도 보여주지 못한 부분이다. 첫 공식 작에 (모두와 다르며 모두를 단순에 뛰어넘는) 그와 같은 기량을 보여 준 부분은 정말 놀랍기 그지없었다. (신화를 현재의 것으로 보여주는 이는 사실 안무 신에서는 그것을 설사 추구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이루기 어려운 성취이며 따라서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다른 안무가들은 가장 컨템퍼러리하게 복잡한 안무적 질서를 메타적으로 곧 인식적으로 재단하는 영리한 전략을 깔끔하게 구사하며 결과적으로 할 수 있을 법한 새롭지 않음을 낳았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 전반적인 현상을 그처럼 두서없이 엮는 가운데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는 모티브의 조합들과 전반적으로 그려지는 그림이 2000년대 한국 소설의 묘사를 충실히 재현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느낌을 지우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여러 사회적 공간의 층위들을 오가는 가운데, 중년 남성과 여자의 일상의 공기를 사실적으로 전하는 2000년대 소설의 어떤 경향의 견지에서 보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부터 전체 신은 하강하는 인상을 줬다. 인어공주 도상으로 딸과 아버지를 전치하는 식이나, 그 전에 물을 잔뜩 묻힌 여자의 젖어가며 살갗이 신선하게 익어가는 광경을 배치하며 구멍의 서사적 해결이자 무대 위에서의 파열을 가져갔으나 조금은 어리둥절하게 나타났던 것 같다. 한편, 이러한 깊숙한 구멍은 또한 장기 매매와 같은 현재의 텍스트와 중첩된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의 다시 쓰기는 그것의 재현보다는 단순히 잇기를 통한 어떤 효과 창출을 우선으로 한다는 점에서만 어떤 의미를 준다. 그 점에서 크게 신화에 침잠되거나 그것에 의존하며 신비주의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 차원에서, 자신만의 이야기 잣기와 안무적 짜임에 있어 엇나가지 않는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텍스트들의 의도적인 중첩과 함축을 넘는 공명의 차원이라는 긍정의 지점에서 하부에 있는 세세한 텍스트들이 이어지는 맥락을 어느 정도 더 구체적으로 표면화할지에 대한 부분이, 이후 작품으로 인계되어야 할 물음 같다.

    임진호 안무가의 <리어왕>은 아르코예술극장 바깥으로 나가 시민 친화적 무대로 확장한다. 텍스트를 이용했지만, 다른 안무가들과 달리 이를 하나의 매끈한 재현적 몰입 극의 형태로 바꾼다. 그리고 고블린파티의 특유의 자잘하면서도 단단한 동작들의 리듬을 구현한다. 가령 빵 쪼가리를 먹을 때 이층 칼국수집에서 칼국수를 먹는 여성과 동작을 맞춘다는 식으로 꽤 공간을 연장해서 잘 사용한 작품이다. 다만 다른 작품들과 결이 많이 다른, 곧 ‘컨템퍼러리’ 자체에 대한 물음을 해소하거나 그것으로부터의 도발적 몸짓을 선보이지는 않는데, 야외에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어 반응이 가장 좋았다. 리어카를 몸과 유기적으로 엮어 사용하는 점에서 조금 연식이 된 작품, 몸꼴의 리어카를 활용한 작품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텍스트-리서치로의 연계, 컨템퍼러리 형식을 띠며 그것을 (메타-)메타적으로 비평하는 데까지 이르려는 다른 작업들과는 결이 매우 다르다는 점에서, 전체 안무랩의 측면에서 읽어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p.s. 글에 대한 약간의 수정을 가했는데, 약간 보충한 식이다. 전체적으로 소소한 것들을 수정했다. 그것은 악의적인 비판으로 여겨질 수 있는 부분들이나, 사실 나는 작품을 읽고 그저 생각한 대로 썼으며, 그 장점들을 문장 안에 집어넣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비판의 여지를 마지막에 제시하는 것을 택함으로써, 그리고 그 사이에 향신료 같은 문장들을 끼워넣지 않음으로써 비판적인 입장으로 귀결될 수 있는 차원을 약간 손을 봤다. 예술가의 작업은 하나의 과정적 작업인 반면, 엄연한 하나의 결과물이다. 그것은 이미 공개되며 공유되고, 예술가 자신의 텍스트 차원에 머물지 않게 된다. 하나의 평가적 차원의 입장이 평론가의 지위로 수렴되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평론가의 입장으로 '아트신'에 글을 쓰지는 않는다. 다만 실제 이번 랩에 참여한 안무가들의 작업을 어느 정도 충실하게 봐왔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견지에서 조금 더 비판적으로 쓴 부분이 있다. '다음 스텝'의 기약은 내가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비판(이자 애정)이다. 내가 (그들을) 봐왔던 것은 그들이 안무의 어떤 가능성을 가져갈 수 있는 존재라 생각했기 때문이며, 어쩌면 그래서 이번 안무랩은 이미 신진의 차원을 넘은 그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지 그들 작업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후 한국 동시대 안무 신의 어떤 이정표이자 바로미터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하지만 그와 같은 지점을 글에는 물론 쓰지 않았다). 이번 작업이 단지 그들의 하나의 생산을 통한 부속물이 아니라면 이는 그들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며, 어느 정도 대다수 안무가들의 작업을 봐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글에서의 비판은 내가 취해왔던 거리두기라기보다, 관계 친화형 글쓰기를 지양하는 나로서는 너무 가깝게 위치했던 것에 가깝고, 그것이 과오라면 과오다. 어떤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음 스텝에 대한 요청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예술가를 위한 봉사 차원에서 글을 쓰지 않으며, 예술가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다. 만약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으며 작업을 빛내 주는 글을 찾는다면, 그것은 엄연한 창작의 영역이며 예술가의 또 다른 입장이 되므로, 그것은 분명 대가가 요구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윤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들은 그 정도의 글은 아니다. 이 글들은 이후 엮일 어떤 텍스트들에 대한 하나의 전거이며 또한 이 글들 자체가 나 스스로에게 하나의 비판의 지점이다. 이 글들은 그런 차원에서 연속선상에 있으며, 하나의 작업이기도 하다(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결과물이 아닌 발전해 나갈 작업으로 봐달라고 요청한다면, 나 역시 나의 글들을 하나의 연속선상에서 그려지는 작업의 일환으로 봐줬으면 한다. 하지만 나는 물론 그것을 요청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분명히 이 글들은 현재의 상황에서 현재 내가 갖게 된 관점하에 그 예술을 함축하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풀어보는 차원에서 하나의 결과물로서 응결된다. 그래서 이 글(의 문제점)을 수정하기보다 그냥 재비판의 여지를 남겨두고 보존하기로 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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