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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SIDANCE] '아시아-아프리카 댄스 익스체인지' 「여행자」리뷰 : '몸과 몸의 교환, 문화의 재전유 전략'REVIEW/Dance 2011. 10. 10. 12:19▲ photo by Zhang Xiaoshuo [사진 제공=서울세계무용축제 사무국]
이들의 무대는 무엇보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을 건다. 무대를 현재로 가져오는 것은 한국말을 천연덕스럽게들 한다는 것.말릿 우펜드라는 스리랑카의 춤을 가르쳐 달라고 하며 문화를 현재로 이전한다. 그러니까 다른 나라 문화는 이국적 취향에 분리된 수용자의 경계 지점을 그리는 대신에 현재 우리의 눈앞에, 우리의 몸으로 매우 가깝게 감각될 수 있음을 가리키는데, 이는 그 피부색과 나라/문화가 달라도 한국말을 쓰고 한 사람과 똑같은 자격/위치로 말을 거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멈추게 하며 공간에 울려 퍼지는, 그치지 않는 노래, 모린 로의 끼가 대단하다. 「Ben」 노래의 전유는 멈춤의 포즈, 꿈틀거림, 직선의 뻗음과 분절을 통해 구현된다.
무대는 제 4의 벽을 소거함에 따라 현재를 공유하며 열린 가능성을 상정하는데, 이 어둡고 내밀한 무대의 원래적 공간은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 환영의 여지로 남겨 놓는다. 안수영 안무가의 어머니를 개석에서 비춤으로써 또한 무대에 부르기까지 함으로써 무대 바깥에서 그의 삶과 무석에서의 모종의 무대로의 은밀한 거래/교환이 작동하며 객석과 무대, 현실의 경계를 지우는 사태, ‘삶에 예술의 사태’를 빚는다.
어머니를 무대에 놓고 김광석의 “세월은 그렇게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이 김광석의 노래는 얼마나 처연한가, 또한 그 가 닿지 않는 안수영의 춤은 얼마나 처연한가. 현실에서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어떤 추상의 도해를 그리는 무용이 직접적인 존재의 상정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이 간극과 삶·예술로의 통합은 감동을 주는데(눈물이 나는데) 왜 그의 어머니는 무대 한 가운데서 그를 보며 눈물부터 쏟아 냈던 것일까.
안수영은 그의 어머니 아들이라기보다는 그녀에게 있어 어떤 배우자의 존재로서 노래를 상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역할의 전환이 현재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안수영은 가족으로 자신을 확장하지만, 무용 공연에서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없는 사적 커뮤니티로 직조된, 엄청난 편중된 호응과는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다.
「무시로」, 모린 로의 짝이 없다는 상투적인 설정에 역할로서 말릿 우펜드라의 남자 친구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위치를 전유하는데, 이런 연기와 같은 현재의 펼침은 잘 짜인 극 구조를 이끌기보다 그저 단순한 사건들의 조합/봉합에 가깝다. 「밤안개」로의 급작스러운 전환, 이어 “가나에서 왔다. 가나에서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를 역시 전유한다.
이 밝은 표정에 가벼운 움직임은 이어진 김광석의 처연한 노래에 어떻게 조응하는가, 그 몸의 떨림과 급격한 떪과 신체가 떨판으로 재편되는 움직임, 그 발산과 외로움의 징후는 또 그 밝음과는 다르게(밝음의 이면으로) 또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 공허한 응시의 눈빛, 들여다볼 수 없는 딱딱한/막막한/투명한 동공에 어떻게 그 노래가 기입되고 또 그 노래가 체현되는가, 이 노스탤지어 어린 눈빛은 그치지 못 하게 하는(그 공고한) 눈빛은 어떻게 이 노래를 과연 만날 수 있는가, 이런 측면은 놀랍기도 하고 또 해석의 여러 여지를 남긴다. 문화는 진정 무대에서 접변接變될 수 있는가.
「흐린 가늘 하늘 아래 편지를 써」, 김광석 노래에 맞춘 군무, 이 군무는 또 어떻게 노래와 조응할 수 있는가. 이 처연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노래에 이들은 어디쯤에서 만나고 장단을 맞추고 있는가, 이 목소리는 곧 현시고, 여기서의 움직임은 조응과 그것의 표현/외재화가 아닌 그저 한갓 움직임일 뿐이다. 이는 움직임으로 완전히/온전히 나타낼 수 없다. 움직임은 증발/소거되는 움직임일 뿐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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