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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벌초」 : '근대와 군대를 잇는 구획 짓기의 폭력을 성찰하며', 『고래, 시간의 잠수자』REVIEW/고래, 시간의 잠수자 2011. 8. 24. 05:53
카메라 시선의 불확정성, 학교 안, 대상을 더듬어가는 느린 발걸음의 시선과 발의 궤적, 자연 안의 공간-학교-역사를 품은 공간, 근대를 갖는 공간, 건물을 따라 올라가는 시선.
안부라는 타이틀을 씌운 뒤 카메라는 동상 앞에서 꽃을 추모하는 듯한 정념을 품고 가는 남자의 움츠린 초라한 모습의 쓸쓸함의 감응을 전하다가 돌연 가지고 온 꽃으로 동상을 깨뜨리기 시작한다. 카메라가 그 파련화되는 충격에 말려 움츠리듯 뒤로 물러나고, 유동하는 떨림을 안고 카메라는 앞서 왔던 시공간을 거슬러 돌아간다. 계단을 쭉 내려 운동감 있게 내려가고 빙 다시 돌아와 그를 비추다 멀어진다.
깨지는 소리만이 난무하고 현상의 짐작은 가능하지만 파악이 불가능한 상항에서 치닫는 소리는 약간의 불쾌감과 공포를 준다. 카메라는 시공간의 터널을 보여주고 엄밀히 공간을 거슬러 시간의 궤적을 상기시키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옴으로써 이 공간의 획정성을 하나의 구조로 치환해 버린다.
멀쩡한 동상들을 비추기 시작하고 얼굴 위쪽 앵글에서 가깝게 얼굴을 내려 보는 카메라가 그 동상들을 존재로 출현케 하는 힘이 있다. 분명 깨지고도 더 되었을 동상은 왜 계속 깨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없는 이 공간의 시선과 짐작되는 존재는 근대성을 뛰어넘는 무언가의 존재‧목소리를 느끼게 한다. 그렇지만 이는 정보를 비워버림으로써 오히려 해석의 여지 그리고 존재의 여지를 불투명하면서도 더 인식의 작용에 들어오게 하는 바가 크다.
혼자서 공동묘지에 와서 춤을 춘다. “너는 왜 아직도 모르는 거야”, 「너는 왜」 노래에 맞춰 산 속의 소리에 목소리는 덧없이 입혀지고 춤추는 동작 역시 그러하다. 근대 문명은 덧없는 것일까, 이런 혼자서의 흥취는 오래가지 못 한다. 춤 역시 기약 없고 답답하고 지루하다.
군대의 구호가 나오고 예초(刈草)병이 예초기로 풀을 깎는다. 이 전시 같은 인위적인 구성 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한 광경으로 다가온다. 소리 자체의 화면에서 현실의 공간으로 옮기는 것, 파편을 튀게 만드는 애초기의 무서운 형세. 이 구획된 장소에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듯 네모난 구획을 넘지 않고 깎아 들어오는 ‘소리 없는 소리’, 강한 압박, ‘근대와 군대’
이미 구역을 정해 놓고 그 구역 바깥의 적의 위협까지를 가정하는(경계선에 있어서는 하나의 통치의 전제가 되는) 매우 엄밀하면서도 한편으로 신화적인 경계선의 군대라는 곳, 그 획정된 장소, 이 단단하게 서서 그리고 손전등으로 가만히 비추고 있는, 마치 이게 적인 듯 아니면 그것이 엄연한 경계 태세의 일부임을 가리키는 듯한 모호한 제스처의 서 있기.
이는 그 공간의 구획이 전제된 것에서 다시 구획을 다듬는 과정이 군대라는 개념을 상기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 『고래, 시간의 잠수자』포스터[출처=국립극단 홈페이지]
한편으로 그 초라한 듯 딱딱한 일상으로 세상으로 대표적으로 표상되지 않는 국방의 의무가 실은 근대화로 표상된 경계 긋기와 공간 구획에 더해 폭력적인 수행과 종속적인 신체를 통해 근대화 동력을 표방하는 국가 권력이 작용되는 시기를 군대의 모습으로 비춘다. 이는 군대라는 것의 움직임 역시 재출현시킴은 물론이다.어느덧 예초기의 물결은 감자 뿌리를 캐는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손전등의 조명은 꺼지지 않는 가운데 그의 행동은 움츠러든 채 초라한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그 부끄러움을 담은 수치심의 문화를 상정시킨다.
숫자로 치환되는 개체(모나드)가 되는 그리고 숫자의 점증을 통한 삶을 사는 군인의 삶이 현재와 이어지지만 무엇보다 근대를 비춘다. 그 폭력적 개발의 동력까지 드러내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 『고래, 시간의 잠수자』전단 [출처=국립극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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