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록×손현선의 〈없는 시간〉이 추구하는 매체는 곧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손현선의 작품을 하나의 과제로 받아들이는 김신록이 있고, 그 결과 존재와의 유기적인 결속을 위한 배경, 오브제 정도로 현재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무대 위에 자신을 ‘드리운’ 손현선의 작품들을 어떻게 다루느냐, 희곡의 세계 안에 포함시키느냐의 차원에서 그것이 순수 배경이 되거나 온전한 출발점이 되지 않고, 다소 이질적인 양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협업의 불가능성이라기보다 협업의 어려움을 다분히 드러낸다.
처음 〈투명-몸〉(투명 필름 위에 젤 미디엄, 2024, 가변 크기.)에 관한 텍스트는 일종의 추상적 시에 가까운데, 이는 다시 작품의 재귀적 성격으로 어느 정도 수렴되는 걸 의도하는 듯 보인다. 〈투명-몸〉 앞에서 이를 발화하는 김신록의 내레이션이 ‘투명하게’ 녹아 있는 김신록의 몸을 지시하고, 결과적으로 〈투명-몸〉에 대한 번역, 설명, 표현으로서 존재하는 몸은 〈투명-몸〉의 캡션 정보에 대한 발화로 끝맺음 되며, 〈투명-몸〉 자체로 귀속되고 그것을 대리, 대체하고자 한다. 곧 〈투명-몸〉과의 간극을 지우고 몸 자체를 투명한 것인 양 취급한다.
이는 작품에 대한 존중을 증명하는, 작품에 대한 수행이기도 하지만, 다분히 도착적인데, 그것이 텍스트에 대한 발화로 드러난 이상, 캡션의 마지막 명시는 물론 “김신록”으로 갈음되어야 할 것이다. 작품 제목이 스스로 자신을 읽었다는 결론은 물론 김신록의 유령성, 김신록의 유령-되기에 의거한다. 여기서 더 정확한, 완전한 캡션은 캡션의 시작이 “손현선”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빠져 있다. 캡션 읽기를 협업의 동등한 입장을 전제하기 위한 하나의 면피로 보는 건 과장된 것일까.
불완전한 캡션이 손현선의 작품을 명백한 것으로 두기 위한, ‘작품’으로서 구분하기 위한 수행이라면, 아마도 “김신록”과 “손현선”의 부재하는 이름은 〈없는 시간〉이라는 작품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는 손현선의 작품이, 김신록의 연극이 작품이 아니라, 손현선과 김신록 자체가 하나의 작품임을 드러내는 증상의 결정적 단서가 아닐까. 사실상 이 작업 자체가 그렇다기보다 이 작업이 위치하는 바깥의 맥락은 스타성을 띤 ‘김신록’ 자체를 향해 기울어져 있지 않을까. 중요한 건 따라서 김신록의 예술가, 창작자로서의 역량이 어떤 궤적을 펼쳐 왔느냐, 그 궤적 안에서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띠느냐를 판단하는 것이 될 것이다―처음에 제시했듯 〈없는 시간〉은 손현선의 작품을 과제로 떠안은 김신록의 무대로 연장된다. 손현선의 작품들이 결정적이라고 해도, 그것을 순수하게 퍼포먼스로 연장하는 건 김신록이 된다.
〈투명-몸〉은 마지막에 한 번 더 반복되며 극을 닫는데, 엄밀히 극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투명-몸〉의 텍스트가 가진 순수성은 보존된다. 곧 매끄럽게 혼합되지는 않는다. 그 중간에 자리한 건, 대부분의 시간을 가져가는 건, 결정적인 텍스트는 김연재 작가의 희곡 텍스트이다―그것의 이름은 〈없는 시간〉일까, 나아가 협업은 동시대의 한 홍보 양식을 에두른 것은 아닐까. 이 희곡 텍스트는 파편적이며 또 그렇게 다루어지는데, 이는 공간 이곳저곳을 산포하는, 손현선의 작품들이 극장에 산포된 것과 같이, 배우들의 수행에서 연유한다. 무대가 없다는 건 결정적인데, 이 연극의 ‘없는 시간’을 노정한다. 가설된 하나의 무대가 세계의 다층성을 구성하는 대신에, 산포된 오브제들과 그 사이, 극장 전체의 빈 곳들을 떠도는 몸들이 무대를 이루므로, 곧 몸이 무대를 대리하는 가운데, 〈없는 시간〉은 그 제목과 같이 스스로를 지우는, 스스로의 증발을 목격하는 시간이 된다.
여기서 희곡을 긴밀하게 다루는 것이 크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이는데, 이는 그 내용의 순수한 구현보다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차용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손현선의 작품들이 가시적 과제라면, 김연재의 희곡은 비가시적 과제가 된다. 그 과제는 배우, 연기 그 자체에 대한 증명 같은 것이다. 그것은 몇 가지 기술로 요약되는데, 말을 먼 곳으로 천천히 던져본다는 시뮬레이션에 입각한 말하기 방식이나 신체 이완과 연장의 급격한 저울질에 따른 말하기 방식, 비일상적 어휘 등을 구음의 형식으로 구체화하는 발화 등이 그것이다. 연출의 몫으로 표시되지만, 김신록은 자신의 연기(술)의 영역을 다른 각자의 배우의 몫의 차이들을 가져가며 시험하는 것으로써 확장된 배우의 몫을 우선하는 다른/희미한 연출가의 자리에 있다고 보인다.
대략적으로 인물들은 시간의 너른 지층, 오래전 기억의 지층을 공유하고 있고, 그것이 공간에 산포되며 또 다른 관계의 희미한 연관이 물리적으로 구현된다면(본래적으로 산포된 텍스트인지, 텍스트의 산포를 위한 파편적 취함에서 비롯된 결과일까는 궁금한 부분이다.), 직접적 연관은 몸과 몸의 긴밀한 상호 얽힘으로 드러나며 엄격한 대비를 이룬다. 이 기억은 시간의 도약을 통해 제시되고, 이 시간의 급격한 압축에 혼란을 겪는 게 처음 등장한 조연희 배우라면, 그것을 인지하지 않은 자는 여전히 과거의 시간을 유지하는데, 대표적으로 어린아이 김신록의 현재성은 어린아이의 정체성을 포함한다. 따라서 김신록의 타자성은 각 인물들을 특이하게 반향한다.
개장수에게 폭력을 당하던 그의 아내가 김신록의 친구로, 그 사실을 안 김신록이 평소 그를 유혹하고 매달리던 개장수를 죽이고, 친구와 함께하는 대략적인 서사의 내용은 그다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가상은 눈앞에서 명백하게 목격됨으로써 그 가상성을 자신의 몫으로 주장한다―제4의 벽이 너무 가깝고 뚜렷한지라 내용을 대체한다고도 하겠다. 곧 캐릭터들 각자의 몫이 어떻게 처리, 수행되느냐의 차원에서 서사의 단편들은 전개되기보다 물리적으로 각인되고 곧 사라진다.
〈없는 시간〉은 여러 협업의 몫을 기워 하나의 희곡을 해체하고, 그 앞뒤에 반죽처럼 다른 몫을 덧댄다―중간에 드라마투르그로 참여한 손나예가 김신록의 바통을 받아 희곡 텍스트를 낭독하는 건 이 연극 전체를 낭독의 그것으로 다시 명명한다고도, 나아가 새삼 그것이 낭독극이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캐릭터이기보다 텍스트를 발화하는 이들이 자리하는 낭독극으로서 이 극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동시에 연기의 수행성이 앞세워지며 이 희곡에 대한 재현으로서의 몫이 한층 강조된다.).
거꾸로 말하면, 물리적 파편으로서의 시각예술 작품에, 희곡을 하나의 자취로, 흔적으로, 파편으로 길게 덧붙인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 실험은 왠지 실험적이기보다 익숙한 인상을 주는데, 연기 양식, 협업, 시각예술 작품의 도입 및 과제의 몫 모두 그 자체로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라기보다 그 모든 것들이 무언가 하나의 몫으로 모이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협업이 유기적인 상관물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굳이 시각예술 작품‘임’을 명시하지 않는 게 더 나았으리라 보인다. 또는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었다면, 희곡은 다시, 다르게, 독자적인 다른 몫을 가정하고 쓰였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그것은 활용의 문제인가, 또 다른 소통의 시차에서 비롯된 문제인가. 투명한 텍스트와 불투명한 텍스트―물론 모든 걸 투명하게 하는 걸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는 만나지 않는다. 인위적 기움이 솔기를 남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 일시: 2024.08.02(금) 19:30 / 08.03(토) 15:00, 19:00 / 08.04(일) 15:00 공연 장소: 세종S씨어터 러닝타임: 70분
크리에이티브 Creative 콘셉트·구성·연출: 김신록 전시 작품 및 텍스트·설치: 손현선 희곡: 김연재 드라마터그: 손나예 무대감독: 장연희 조명 디자인: 김형연 사운드 디자인: 목소 조연출: 이유진, 연구원, 고은결, 김강태, 김여은, 서민혜, 손나예, 유의정, 유지수, 이 선, 이재남, 이효정, 정수경, 홍한별, 출연, 김민주, 김신록, 박경찬, 정유미, 조연희 제작: 세종문화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