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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틀리스 무용단(Restless Dance Theatre), 〈노출된(Exposed)〉: 재현 불가능한 혹은 재현 너머의 현존REVIEW/Dance 2023. 11. 6. 15:00
테크닉은 신뢰와 직결된다. 자연스러움과 매끈함이 동시에 충족될 수 있으며 하나의 계열이라는 믿음이 그것에 따라붙는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있는 레스틀리스 무용단의 〈노출된〉은 그러한 전제로부터 요동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몸짓 자체를 추종하거나 그 몸짓이 향하는 의미의 계열을 구성하기 위해 몰입하지만, 그 몸짓을 의심하지는 않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레스틀리스 무용단에서 움직임은 그런 차원에서 몸짓에 선행하는 것, 곧 몸 혹은 감정이 몸짓 앞에 있다고 선언한다, 또는 드러낸다(exposed).
따라서 극단적으로는 몸은 멈추거나 해서 강조되고 감정은 연기되는 데서 나아가 폭발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몸은 몸짓에 선행하고 감정은 몸짓을 앞지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무용수가 옷을 걷어붙이고 맨몸을 드러내는 것을 길게 가져가는 것은, 그 몸 자체가 메시지임을, 가장 주효하고 강력한 메시지임을 주지하는 데 가깝다―반대로 시작은 흐릿한 막 뒤에서 옷을 입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곧 그것은 비의로 감싸여야 한다!). 굳이 그것은 그렇게 길 필요가 없는 부분일 수 있다. 동시에 그들의 무용수 같지 않은, 또는 무용수와는 다른 것처럼 보이는 몸은 그 몸의 다름이 같음 혹은 유사함으로서는 줄 수 없는 몸의 메시지이며 동시에 그런 이유에서 다시 한번 강조할 수밖에 없는 궁극적인 메시지로서의 몸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곧 몸으로의 환원은 도돌이표 같은 자기애의 환원이다.
반면 그 ‘자기’라는 것은 누가 정의하는가. 안무라는 것은 누구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는가. 아니 누구를 (적확히) 반영할 수 있는 것인가. 그들이라고 여겨지는 것과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확하게 측정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가능성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이 할 수 있을 것과 그들이 해야만 하는 것을 근접한 거리로 좁힐 수 있는가. 그사이에서의 타협은 종종 쉽게 이뤄지고 그 판단은 윤리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치부될 수 있지는 않은가. 미션이라는 것은 의무나 과도한 성취를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을까. 애초에 그들의 의지와 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노출된〉은 커다란 은박지가 무대 전면을 차지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결국 비워지게 되는데, 이러한 커다란 오브제가 구조적 장을 구성하는 건 집단의 환경(-바깥)을 창출하고 서로를 그에 속한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효과가 있다. 존재 사이에는 모종의 소통이 있고 그 소통으로부터 불화가 발생한다. 따라서 최소한의 무대 장치는 서사의 중핵이 된다. 곧 이 오브제는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의 은유이자 그 공동체의 결락을 만드는 개별자들의 두께로 인한 단단한 사이(=간격)를 동시에 은유한다. 나아가 그것은 가볍게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 감정은 휘발되는 임시적인 것임을 또한 드러낸다.
극적인 흐름은 감정이 돌출되는 지점을 쌓기 위한 충돌과 반목의 소소한 융기에서 시작되며, 그것이 점점 축적되어 해소되는 지점을 향하며 결말이 가까워지는 셈이다. 감정의 나타남과 사라짐, 연결과 불화, 그리고 재연결은 다소 급하고 불충분하며 결과적으로 부자연스럽다. 곧 옷을 입히는 장면에는 다수가 가하는 소수에 대한 강제가 있고 또 그 이상의 거부가 있다. 그리고 감정은 연기로, 곧 드라마로 환원된다. 그것은 감정을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연기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연기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 맥락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니라 그 감정 자체가 존재와 뒤섞이는 가운데서 절대적인 것으로 부상한다. 곧 그들은 이해받기 어려운 어떤 대상, 특별한 감정이 어린 파토스를 분출하는 존재가 된다.
곧 그들이라는 현존으로서의 (비)드라마라는 결말은 그들을 재현하는 드라마 혹은 그들이라는 캐릭터를 창출하는 드라마의 서사적 비개연성과 멀리 있기는커녕 오히려 닿아 있다. 말이 없는 서사는 말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를 세밀하게 쓰지 않(으려)는 차원에서 캐릭터 차원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와 현존은 분리 불가능한 것이 된다. 서사의 전략을 벗어나면, 결국 몸짓이 남는다. 결국 무용수들은 가상의 (어떤 자기로의) 현존을 수행한다. 그 몸짓은 그것을 수행했다 또는 수행한다의 차원이 강조되는 지점에서, 의무의 미션을 걸친 채 지연의 행위로서 나타난다. 일반적인 경우에서처럼, 완벽한 몸의 통제로 인한, 몸과 몸짓의 간격이 지워진다―몸이 사라진다―는 환상과는 거리가 있으며, 몸과 몸짓 사이에서 몸짓은 몸을 향하고, 몸은 몸짓과 함께 드러난다.여기서 캐릭터가 갖는 자기-의식은 결코 무용수 자신의 자연스러움이 강조되거나 나아가 무용수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며 수행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사실 그렇지 않다가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드라마의 주인공을 재현하는 데 있어 철저하게 메소드 연기의 방식을 적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몸짓을 수행하는 데, 곧 그것을 틀리지 않게 수행하는 데, 또 유사하게/적합하게 수행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그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의 부족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무언가를 수행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여전히 떨쳐버리기 힘들다는 상황에 있다. 곧 무대의 전략은 애초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언어로부터 무대가 연장되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무대임을 잊어버리게 만드느냐에 자리했어야 할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일시: 09/17(일) 5:00pm
장소: 대학로극장 쿼드
소요시간 : 50분
〈스태프〉
감독: Michelle Ryan Director
어시스턴트 감독: Larissa McGowan
음악 작곡 및 구현: Hilary Kleinig & Emily Tulloch
무대/조명 디자인: Geoff Cobham
의상 디자인: Renate Henschke
창작 PD: Roz Hervey
무용수: Darcy Carpenter, Jianna Georgiou, Michael Hodyl, Alexis Luke, Maddy Macera, Michael Noble, Charlie Wilkins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 2023) 개요]
⬛ 일시: 2023년 9월 1일(금) - 9월 17일(일)
⬛ 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대학로극장 쿼드,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서울남산국악당, 연희예술극장
⬛ 규모: 한국포함 총 9개 국가 참여, 국내·외 무용단 26개 작품 소개
⬛ 후원: 서울특별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한 이탈리아문화원, 주한 이스라엘대사관, 주한 호주대사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 협력: 서울문화재단 대학로극장 쿼드, 서울남산국악당, 서울무용센터728x90반응형'REVIEW > Da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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