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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유진, 《안티바디와 싸이킥에너지》: 근미래에 대한 도착적 희망REVIEW/Visual arts 2021. 11. 8. 00:01
비계 같은 골격과 이음부 구조로 확장되는 대부분의 설치물은 연결된 전자 회로 기판에 의해 제어되며 움직인다. 거기에는 되게 슬로건 같은 문장이 따라붙는다. 이러한 구조적 설치의 형태는 (인간의 정상적인 몸을 바디로 칭한다면) 안티바디의 메타포로 여겨진다. 이러한 안티바디는 각자의 전자적 원동력을 통해 바디의 입구를 탐색하는 듯 보인다. 여기서 “중증근무력증이라는 자가 면역 질환을 앓고 있는 작가”의 경험은 기계 장치의 신체로 체현되기보다는 언어적으로 발화되거나 은유적으로든 재현된다.
제목에서 이 안티바디를 “싸이킥에너지”로 연결하는 것, 곧 안티바디의 “신체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상쇄’시키는 싸이킥에너지를 도입한 것처럼 안티바디는 싸이킥에너지과 같은 도약의 순간을 마련함으로써 또는 그와 같은 순간을 마련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짐으로써 바디와 안티바디는 근본적인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며, 안티바디 역시 생명의 원동력이라는 더 큰 차원으로 수렴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장치/구조물은 작가의 신체를 직접적으로 보족하는 기관이기보다 단지 작동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복잡한 다양체로서의 하나의 생명이라기보다는 어떤 생명의 최소 단위를 표상하며, 기능적으로 프로그램 언어로서 작동한다는 점에서는 실험실의 장치에 가깝다. 인간보다 큰 각각의 구조물들은 단지 기계적 변증법의 차원, 곧 정보를 수용하고 이를 피드백하는 구조로 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언어는 외재화된다.
따라서 전시는 일종의 새로운 기계 장치들을 보여주는 박람회의 외양 아래 인간의 언어로는 즉자적으로 해독이 불가능한 기계의 언어를 갖고 침묵한다. 그것들은 반응하거나 이미 반응 중에 있다. 이러한 기계 장치들을 읽을 수 있는 또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작동 자체를 심미화하거나 그 옆의 전문용어들이 나오는 언어를 통해 작가의 증상을 거꾸로 복원하는 것이다―따라서 기계는 말이 부족하며 전시는 설명적이다. 이러한 분리적 구획 아래 전시는 그 둘을 적절히 수용하는 듯 보인다.
먼저 〈사라진 기관들 (Our) Lost Organs〉은 태어날 때 존재해서 서서히 몸에서 퇴화해 가는 인간의 흉선이라는 기관을 이야기하는데, 중증근무력증을 지닌 사람의 경우 흉선이 퇴화하지 않고 질병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동시에, 흉선은 T 세포라는 면역 기능을 가진 림프구를 형성하므로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항체가 공격하는 면역체계의 오류 증상으로 나타나는 중증근무력증의 병태생리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증근무력증 환자의 흉선제거술은 애초에 근본적인 모순을 가지고 시행된다고 할 수 있다. 흉선의 이미지와 이와 같은 긴 글이 프린트된 배너를 통해 이러한 정보를 알 수 있다.
사라진 기관들은 각각 흉선의 퇴화라는 자연적인 과정과 흉선절제술이라는 인공적인 과정에 의해 사라지지 않는 흉선을 사라지게 하는 두 다른 기술은, 흉선의 기능과 사라짐의 분화가 속한 기원 자체를 되묻게 하는 동시에 중증근무력증의 발발 원인을 가늠할 수 없다는 사실 자체에 고착하게 만든다. 가령 흉선절제술은 자연의 방향성을 취하는 시도인가, 중증근무력증은 근본적인 자연의 오류인 것인가.
정보 배너와 달리 슬로건으로 지시되는 (또는 여러 덩어리가 구분돼 놓인 〈사라진 기관들〉에서 각 구조물을 구별하며 지시하는 일종의 작품명이 되는) “신체에 대항하며, 신체를 보호하는 double vision을 가진 존재/안티바디로 거듭나기”라는 텍스트는 흉선과 중증근무력증에 대한 관계에서 후자를 극복할 수 있는 전자로부터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근미래에 대한 시점을 가정한다. 의학 연구 역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의 염원과 “안티바디”라는 대안적 몸의 미래에 관한 주창은 학제적 연구와 협업으로 진행된 이 프로젝트의 과정에 상응하며, 단순한 판타지보다는 현실에서의 일종의 연속된 절차들을 상정한다.
동그란 철판 위에 하얀 가루와 이를 현미경 같은 카메라로 화면에 입자들로 번역하는 이 설치에서, 스크린의 입자들은 의학 연구실에서의 신체 내부에 대한 의사-재현의 코드를 갖는다―가루에 미세한 움직임을 부여하는 환경에 따라 입자 역시 움직인다. 배너 옆 동그란 철판 위 중앙의 공간―여러 도형의 이미지가 안에 있고 그 위에 투명 유리 덮개가 덮인 것―에 손을 댔을 때 스크린의 입자들이 요동치게 되는데, 그 부위가 인터랙션을 가져오는 접합부로 잘 인지되지는 않는다. 이는 “관객의 터치에 반응하여 진동을 시각적으로 전환하는” “사이매틱스” 장치의 일환이다. 이는 그 옆의 구조물, 건반이 연결돼 있고 “만능의 결합”이 쓰인 구조물에서는 예술의 구조가 손의 접촉을 통한 자의적 질서의 구조가 아닌 이상적 조합을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분자 단위의 재현과 분석은 그 작동 원리와 제어 가능성을 상정한다는 판타지로 연장된다. 그렇지 않다면 이를 뭐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어떤 접촉을 통한 인식만으로 힘을 발생시키는 마법적 인터랙션의 구조에 대한 믿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기술적인 부분을 순전히 테크닉적 차이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는 것 역시 쉽지 않다. 무엇보다 다른 형태와 다른 움직임, 다른 작동 원리는 매체로, 심미적 이미지로, 미학적 메타포로 즉각 번역되지 않는다. 대부분 이러한 기술적 차이를 읽지 못하는 수용자는 이러한 대상 앞에 머뭇거리게 된다.
〈사라진 기관들〉은 흉선절제술의 기계 장치를 재현하는 〈스테로이드 전신 요법 Systemic Steroid Treatment〉으로 연장된다. 모터가 달린 다섯 개의 리니어 액추에이터로부터 다섯 개의 삼각형 PCB 조각은 중심을 향해 움직인다. 오각형 구조는 꽃의 만개와 같이 심미적 이미지로 연장되기도 한다. 반면 신체의 대상 일부에 근접해 이를 도려내는 기계의 절제술을 시연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다섯 개의 조각이 정확히 한 점에서 동시에 만나지 않음으로써 그 이상적 만남의 여러 실패(?)를 실제 보여준다. 이는 기술의 실패보다는 자연의 이념과 그 구현의 오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마치 흉선이 퇴화되지 않고 남아 있거나 중증근무력증 같은 경우와 같이. 어떤 미끄러짐을 부각시키는 이러한 기술은 완전함과 완성에 대한 강박을 지시한다. 거꾸로 이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면, 안티바디, 나아가 정상적인 범주로 자리하지 않는 신체에 대한 긍정 역시 가능할 것이다.
〈녹지 않는 것들 Never-Melt〉에 대한 메타포는 오래전 TV 모니터와 뿌연 화면에 등장하는 녹지 않는 빨간 아이스크림이다. 소멸되지 않음에 대한 욕망은 자본주의적 열망으로 연장된다. 〈우주적인 춤의 신 Cosmic Dancer〉이 그 옆에 위치하는데, 그 앞에는 “사람이 그렇게 단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라는 슬로건이 위치한다. 〈녹지 않는 것들〉과 〈스테로이드 전신 요법〉에 대응하는 이러한 말은 유한한 신체나 미끄러지는 욕망, 그리고 기계에 의해 침입되고 재구성되는 신체는 시간적이든 물리적이든 단단하지 않은 것과 연결된다.
두 번째 전시장의 〈우주적인 춤의 신〉은 첫 번째 전시장의 〈사라진 기관들〉과 〈(나의) 유전자 (My) Gene〉 사이의 바닥에 자리한 시적 텍스트와 연결된다. 자궁을 빠져나와 무덤으로 향하는 춤은 인생에 대한 비유이면서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서 언급된 구절을 차용한 것이다. 주어가 나(I)로 시작되는 문장들의 나열은, 여성 작가의 자전적인 일기처럼 보이기도 하며, 자궁(womb)과 무덤(tomb)의 운율을 맞춘 부분은 시적이며, 자궁에 대한 언급은 보편적 인간에서 나아가 여성에 대한 알레고리로도 읽힌다.
문제는 〈우주적인 춤의 신〉이 공간을 달리함으로써 뒤늦게 도착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곧 먼저 제시된, 그리고 두 작품 사이의 통로에 위치해 밟지 않도록 조심하거나 밟고 지나가는 것까지를 의도한 것 같은 설치 텍스트가 선취된 이후에 도착한다. 〈우주적인 춤의 신〉은 다른 작업들이 실험을 위한 도구, 또는 재현을 위한 장치처럼 보인다면, 그리고 〈사라진 기관들〉이나 〈(나의) 유전자〉과 피드백을 통해 구현된다면, 그 자체로 자족적으로 완성된다.
이는 다분히 총체예술적인 형태를 띠는데, 초록색에서 빨간색으로 조명이 변하는 구조에는 진공관 같은 투명한 유리 안 음향 장치들이 동시적으로 소리를 낸다. 음가가 같은 단순한 소리들의 총체는 그것이 특별한 멜로디의 구조를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하모니와는 조금 다르며, 독특한 기계음의 반향은 전시의 클라이막스로 상승하며 결말에 다다른다. 소리의 구조적 변경, 곧 연주의 단위가 완성되는 지점은 조명이 켜지는 순간이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에 맞물려 초점화된 소리의 양상은 퍼지며 음역대가 떨어진다. 초록색과 빨간색을 오가는 무한한(?) 순환은 유기체의 구조적 작동을, 또는 생명의 신비 같은 알레고리에 상응한다.
〈(나의) 유전자〉는 타인들과 고양이 등을 포함한 다른 생명체들과 작가의 얼굴을 이미지 분석을 통해 유사성의 정도를 검출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신체 각 부위가 다른 존재의 다른 신체 부위와 연결됨을 보여준다. 유전자의 개념과는 다른, 기이한 연결―가령 귀와 입이라든가 개체적으로도 관련이 없는 신체 부위가 다른 존재의 타 기관으로 연장되는 것―들을 통한 유사성의 재현은 관계없는 존재와의 복잡한 관계성의 정도를 신비하게 표현하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관람객 역시 카메라 모니터를 통해 작가와의 유사성 정도를 검출할 수 있다. 관람객은 모니터를 보며 작품에 포함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감지하지만, 이미 놓인 연결들의 지도는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이어서 여기에 포함되지는 않는다. 여러 얼굴이 전면에 드러난 작업은 표층적으로는 작가의 분신들과 연결된 작가의 너른 존재들의 개방적 수용과 공공적 세계관으로 수렴하는 듯하다. 반면 세계에 편재된 작가와 연결되는, 확장되는 타자의 차이들은 어떤 고정된 연결점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체에는 근본적 의미가 확정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개체의 정체성을 절대적인 것으로 두지 않는데, 휴머니즘적 닮음―’타자의 얼굴’―이나 주체의 개성이 아니라 단지 기계적인 분석에 의해 점들로 해체되고 모인 어떤 어렴풋한 그리고 그럴싸한 얼굴로 수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공공적 세계를 완성하기보다 엄밀히 그러한 이념을 흐릿하게 만든다. 우리의 의도와 실제적인 관계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누군가와 닮음을 곧바로 인식할 수 없이 닮아 있다. 이는 관계로 연장되지도 않으며, 관계에서 촉발되는 것 역시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인간이 가진 관념의 근거를 희박하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바디를 해체하고 바디의 관념을 재주조하는 것으로서 ‘안티’바디에 다가서는 〈(나의) 유전자〉는 ‘자궁에서 무덤으로’ 가는 인간의 여정을 지나 삶의 기원과 죽음 이후의 신비로운 질서에 상응하는 세계와 연결된다.
곧 ‘초자연적인 에너지’를 뜻하는 제목의 싸이킥에너지는 신성한 “샤크티”에 대한 개념으로 발현된다. 이는 그 옆의 슬로건인 “근본적 취약성”의 신체와 결합해서 전능한 신체에 대한 염원을 보여준다. 안티바디(로부터)‘의’ 싸이킥에너지는 곧 작가의 증상을 지시하는 여타의 작업과 함께 좌절감이나 무력감 같은 감정을 발생시켰을 실제적인 작가의 현실적 제약 조건을 거꾸로 잠재성의 기원으로 상정하는 데에는, 나아가 안티바디에 대한 긍정에는 작가의 소망이 투사돼 있는 듯 보인다.
〈안티바디와 싸이킥에너지〉의 기술적 시연과 시도는 존재의 예외적 증상에 대한 의학적이고 과학적 기술(技術), 그리고 신화적이고 초현실적인 기술(記述) 모두를 연결하려는 욕망을 지니며, 인간학적 유비를 벗어나 기계 질서가 그리는 형상의 미감을 안티바디의 새로운 단위들로서 긍정한다. 물론 거기에는 바디에 대한 욕망의 잔여, 안티바디의 미완성적 결여가 모두 담겨 있지만, 이는 예술의 시작(모티브)을 충족하며 예술의 분석적이고 비판적인 지점 역시 보여준다. 어쩌면 작가는 무엇보다 이러한 기계 질서나 형태를 완성해 가는 과정에서 근미래에 대한 희망에 앞서 치유와 회복의 단계를 밟아나갔을지도 모르겠다.
김민관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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