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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천개의 눈>: '존재의 틈으로서 미로'REVIEW/Theater 2013. 9. 26. 14:52
▲ <천개의 눈>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천개의 눈>의 역사적 배경은 딱 해설에서 나온 짧은 정리 문구의 정도에 불과하다. ‘자로’의 심중 자체가 은유적 차원에서 미로이며, 이는 앞선 ‘타로’의 미궁이라는 환유적 차원에서 실제 지배되는 것에서 연유했음을 알게 될 때 이 미로는 관념의 차원으로 소환 가능한 그 무엇이다.
미궁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처럼 단순히 끊어 버리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미궁에서 나오기 위해 그만큼의 섬세한 실 뭉치의 매듭을 다시 풀어야만 한다. 미궁은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대상 차원이 아니며 나를 옭아매는 나를 전적으로 둘러싸고 있는 어떤 불가능성의 차원에서의 장을 가리킨다.
타로의 등골에 칼로써 간극을 벌일 때, 베기보다 서서히 그 심연의 틈을 더듬어 어둠의 아가리를 벌릴 때(이는 정확히 그렇게 묘사되고 있다. 즉 타로의 등골께는 이 미궁의 보이지 않는 문을 여는 어떤 손잡이 장치처럼 느껴진다) 자로는 미궁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다. 이는 정확히 능동적이기보다 전적으로 수동적인데, 자로가 타로를 죽이기보다 타로가 스스로 죽음을 자로에게 내어줄 때가 그 때이기 때문이다.
▲ <천개의 눈>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동시에 미궁에서 놓여남은 타로의 경우에서는 스스로를 그 미궁에 얽매인 의식으로부터 자르거나 또는 자로의 경우에서는 단지 외부에서 그것을 용인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 된다.
타로는 칼날의 두께가 없다고 했다. 칼이 무언가를 벌릴 때 그것은 마치 칼이 자름으로써 작용하지 않는, 곧 ‘부재로서의 배임’을 통해 베는 그런 차원으로 작용함을 일컫는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시공간의 층위를 열 듯.
실제적인 미궁으로부터의 벗어남에서 다시 정신적인 차원에서의 미궁, 곧 영원한 의식의 얽매임으로 오면, 구체적으로는 자로의 왕위의 몰락 이후로 오게 되면, 이 미궁을 벗어나는 길은 어둠 속 보이지 않는 천개의 눈을 응시하는 것이라는 해법이 제시된다. 타자를 넘어 대타자의 시선을 보는 것이 그것인데 어둠이 살갗에 스미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촉각적이며 신체 전체를 뒤덮는 무엇이다.
▲ <천개의 눈>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역설적으로 시선으로서 거리두기가 불가한 이 붙잡힘은 미궁이다. 그러나 이 미궁 자체가 특수한, 특정한 하나의 시공간이 아닌 하나의 숙명이며 오히려 그것에 대한 긍정이 이 미궁을 벗어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천개의 눈>은 미궁을 속박에서 숙명으로 그리고 다시 긍정의 의지로까지 도약하는 지점으로 둔다.
자로를 가둔 타로, 타로를 이미 가둔 익공, 미궁 속 이야기를 갖고 돌아온 자로는 타로를 분한 박완규 배우가 맡고 있다. 자로와 타로는 일종의 거울상인 것이다. 그 안에 미궁의 설화가 굳게 자리한다.
왕이 외부의 불가침한 영역이며 거리를 두는 (대)타자였던 시기는 현재는 그 주술이 풀려 왕은 우리를 대변하는 하나의 개인으로 다뤄지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주인공은 개인이며 이 개인화는 모든 존재를 포섭한다. 정확히 아우성치는 백성이나 나라의 실제적 어려움은 이 장소의, 그리고 왕의 형국의 빈곤함을 제외하면 드러나지는 않는다. 천개의 눈은 관념화된 주술이며 또한 계급적 추상이 아닌 감각에 새겨지는 현존의 상징적 증표와도 같은 것이다. 이 점이 <천개의 눈>에 대한 긍정의 매혹과 사라져 버리는 환영의 찰나를 동시에 선사하는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728x90반응형'REVIEW > Thea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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