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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젠가(ONE DAY, MAYBE)>: 우리는 5.18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
    REVIEW/Theater 2013. 9. 11. 12:20

    (※주의: 공연이 진행 중이고, 작품의 미지에의 조우가 무조건적으로 중요한 공연이다. 작품의 내용에 초점을 전적으로 맞춘 것은 아니지만, 작품을 보지 않았다면, 공연 관람 이후 읽기를 권한다.)


     ‘언젠가’, 되돌아온 미래와 반복되는 과거 그리고 뒤늦은 현재


    ▲ <언젠가(ONE DAY, MAYBE)>ⓒ남지우(Jee Woo Nam) [사진 제공=아시아나우(AsiaNow)] (이하 상동), 참고로 실제의 차용과 인용 따위는 이 한 장면 외에는 오히려 없다고 봐야 한다. 이 작품이 5.18을 간접적으로 다루고자 했다기보다는 그것에서 미끄러질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새로운 시각에서 출발하고자 했음에서 이는 연유했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라는 물음이 남는다. 나는 무엇을 보기는 한 것인가. 이 공연을 하나의 신체가 장소의 기억과 시간의 누층에 접속되어 닿고 만나며 머무는 과정이라고 할 때 나는 보았기보다 수많은 시차 속에 상이한 공간적 경험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물음은 이 묘연한 공연의 흐름을 통과하는 가운데 ‘5.18’을 ‘끔찍한 역사적 풍광의 현시’(顯示)와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현실 곧 선과 악의 비대칭적 잔존의 분노로의 수렴’, 그리고 ‘동시대적인 후대에 주어진 의식적 환기의 몫’(교육적 이념)과 ‘보편화되지 않는 산 자들의 슬픔의 목소리가 갖는 정동’(affect)에서 어떻게 5.18을 ‘참혹’‧‘분노’‧‘의무’‧‘슬픔’의 태도와는 다른 태도, 그리고 인식을 주체적으로 가져갈 수 있느냐의 것이다.


     5.18을 다루는 데는 늘 과도해서 우리의 신체와는 먼 곧 과도하지 않은 무엇으로 남곤 했으며 역사의 기억을 훼손할 수 없다는 지점에서 재현의 덫에 걸리곤 했다. 역사와 현재, 주체와 타자의 간극이 그 안에 있었다.


     장소 특정형 연극을 주로 작업하는 영국의 연출가 트리스탄 샵스는 죽은 자들과 결부된 산 자들의 슬픔, 민주주의를 이루는 데 중요한 초석이 된 그것의 혁명적 의의, 우리가 갖는 의무와 동시에 그것의 무력함 등을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죽은 자들이 과거와 현재를 현시하며 우리는 그들을 통과해 곧 그들의 몸을 빌려, 내지는 그들과 한 무리가 되며 새로운 신체적 경험을 장소 특정적 기억으로 재호출하는 예술적 공작을 펼친다.



     연출은 결과적으로 구부러진 허리에 카트를 끌고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하는 할머니의 인도를 따라 이 죽음 그러나 정치‧문화‧역사적 지형의 재환기되는 사실로서의 죽음 대신 잠재된 측면에서의 죽음, 곧 죽지 않았음으로서의 죽음을 보여주며 이 할머니에게서 친숙한 낯선 몸의 기억을 듣게끔 한다. 


    다양한 광주 또 5.18 관련한 단편들은 장소의 옮김, 여러 장소들의 재현과 삶-죽음의 경계 영역의 통과를 통해 구현된다. 관객이 일종의 ‘관람객’으로 변화하는, 곧 공연 전 표를 끊는 곳 앞의 강당 입구에서의 체험에는 해설자가 자리한다. 문화전당의 후원이라는 5.18 관련 조각을 소개하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 강당을 나와 또 다른 건물의 커다란 강당에 닿는다. 거기에는 배우들이 아니 5.18의 역사적 대리물로서의 신체들의 합산됨 동시에 투쟁의 영원한 한 순간의 포착이 있다. 


    광주의 현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의 요약은 진부한 사실들의 열람이고 말하지 않는 신체들을 두고 갖는 얄팍한 교란이다. 해설자의 목소리는 강당 전체의 오디오로 연장되며 해설자의 신체를 떠나고 이는 무미건조한 방송의 표피적 현실로, 곧 저 먼 사실들의 나열로 드러나고 여기에 한 할머니가 악을 써 그 판을 뒤집는다. ‘안전한 관광’의 집단을 상징계적 군중으로 본다면 그것에 구멍을 내는 할머니의 외침은 불편해야 하나 사실 그렇지 않다. 



    이는 마이크에서 스피커로 옮겨 간 그리고 할머니의 악에 소리를 줄인 음향적 조작의 전형적인 공연의 공모가 따르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은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에서 윤리적이며 또한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레 알고 있다. 사뭇 눈길이 더 가는 것은 문화적 디엔에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한 대타자의 시선은 표피적 현실과 길항하는 보이지 않는 신체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이 불특정 군중은 역사적 신체가 밀려 나간, 할머니가 그 뒤를 좇는 문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입구의 통과 의례적 의식은 미지의 것과의 조우에 대한 두려움을 일정 정도 가지고 있다. 해설자는 일시적인 접속으로서 드러남이고 어떤 인도에 따른 이동은 공연 내내 없다. 


    우리가 마주한 곳은 군중을 다시 자유로운(?) 관광객으로 바꾸는 스펙터클한, 아케이드의 축소 버전이다. 더 이상 보여주는 것과 보는 것의 경계는 사라진다. 배우는 갖가지 상사의 점원이 되며 관광객은 PC방에서 전투를 시뮬레이션하는 폭력적‧무비판적‧비윤리적 게임의 조작자가 되는 한편, 옷을 고르고, 커피를 사 마신다. 실제 화폐 교환 행위들이 발생한다. 선글라스를 2만 원에 산 아저씨도 있으며 대개가 5백 원‧1000원 정도의 커피를 사 마신다. 보는 것의 긴장은 입고 마시며 열중하는 촉각적인 신체 행위로 전이되었다.


     이는 이 현실로의 자연스런 안착과 더불어 혼란스런 경계로의 접어듦을 야기한다. 도대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보고 있는 것인가. 스펙터클의 현실을 재현하는 데 스펙터클한 돈이 쓰인다,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현실은 현실의 시간까지 어느 정도 잘라내 온 것이다. 극적 장면이 아닌 현실의 체험이 불현듯 연장되면서 이 끝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 (시간적‧공간적) 끝은 어디인가의 물음이 여섯 개의 상점을 지나 이곳이 다시 예전의 학교였음을, 학교 안의 상점들을 환영적으로 조각해 낸 것임을 (그제야) 인지하는 순간 달콤한 상투적 유혹자로서 해설자의 권능은 가령 현실의 시스템 자체를 이루는 힘의 빙산의 일각이었음을 또한 깨닫게 된다.



     곧 이곳은 나갈 수가 없다. ‘우발적 열림’의 경계로서의 체험과 ‘재단된 닫힘’의 감옥 같은 시스템에서의 체험은 이 연극의 구조에 있어 크게 단락들을 만드는 방식이다. 


    한편 열림이 이 장소들의 체험의 시간을 주체적으로 전유하는 비자의적인 선택의 일환과 접합된다면 닫힘은 이 장소를 머물러야 하는, 곧 역사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들에 직면해야 하는 게임의 규칙이기도 하다.


     착각의 일환이지만, UBIQUO는 유니uni클로(여기서 ‘uni’는 유일한, 곧 저마다의 개성을 성취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마치 ‘ubiquitous’의 편재(遍在)하는 자본이란 의미를 전유한 변용으로 비친다. 2층의 이 ‘쾌락의 스펙터클’을 지나가고 3층에 닿자 취조실들을 만나게 된다. 이번에는 광주경찰서장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배우’는 끔찍하거나 위협적인 현실을 또 하나의 스펙터클, 구경꺼리로 바꾼다. 


    이 안전하지 않은 현실에서의 안전함을 강조하며 안보 내지 치안의 가상적 울타리를 만들며 스스로 역시 구경꺼리의 일부로 전락한다. 예전 교실들에 온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이 ‘장소 특정적인 공연’에서 창문을 통해 그 현실들을 마주한다. 



    누군가를 심문하고 있는 상황에서 범인으로 지목된 그가 죄가 있는 것인지, 죄가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기란 어렵다. 그럼에도 취조는 계속되고 반복되며 또 변용되고 서로 간에 연접(連接)된다. 이러한 관람객과 취조실의 분리, 취조실들 간의 분리, 과거와 현재의 분리, 죄-있음과 죄-없음의 분리(간극)에서 우리는 소위 판단 불가한 죄와 심판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참고로 이 취조실 풍광은 배우들이 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앞서 조각에서 튀어나간 그리고 상점의 직원으로 분했던 배우들은 5.18 이후의 현실들을 재현하는 것에 가까울 것이다. 이 어둡고 음침하며 묘연한 심야가 시선에까지 배어드는 가운데 드러나지 않았던 기억, 가려졌던 현실을 보게 된다. 곧 조각의 시뮬라르크로 고착된 유사-역사의 재현물들에서 삭제된 5.18의 끔찍함은 심리적이고 내재적인 실내의 풍광으로 갑자기 이전되고 상품미학에 정신을 뺏겼던 관람객은 이 ‘안전(하다고)한’ 취조실들의 소음이 서로에게 이전되듯 교차하며 폭발에 이를 때 그리고 마침내 취조실을 빠져나와 범인(?)의 쫓고 쫓김의 순간이 벌어질 때 신체는 긴장하게 된다. 


    이는 의식적인 부분이기보다 본능적인 그리고 육체적인 부분이다. 치안이 자리의 영역을 한정하고 그 자리에 자유의 경계를 획정하며 부여하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이 사탕발림으로 감싼 치안이 무너지는 순간, 곧 ‘열림’의 어떤 순간을 보는 순간 우리는 다시 이 3층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갖게 된다. 


    우리는 안대를 하고 이 혼란스런 광경에서 벽에 붙어 ‘안전하게’ 그것들을 들으며 관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또 다른 ‘열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누군가 안대를 벗겨준다. 거기에 서 있는 존재는 ‘타자의 얼굴’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타자의 얼굴로부터 슬며시 빠져 나간다. 5.18 희생자의, 그 영의 ‘현전’이다. 현존하지 않는 부재하는 것의 갑작스런 튀어나옴, 마치 현실의 존재들로 분해 우리를 관망하고 그 주위에서 배회하던 배우들은 이제 정체를 드러낸 것 같다.



     그는 우리에게 시선을 주고 이어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빠져 나간다. 그 시선의 시차는 이 존재를 어떤 따스함의 느낌으로 기억하게 한다. 어쩌면 연출은 (해설사와 동시적으로 또 대척적으로 안내하는) 할머니를 따라가며, 과거의 청산과 슬픔을 간직함 대신 마주치지 않는 그러나 잠재해 있는 가상적인 신체를 현존시키는 것으로 5.18의 기억과 마주함을 대신하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곧 우리가 볼 수 없는, 보려고 하지 않았던 신체에 대한 기억들은 인공적이면서 자연스런 기억으로 이전된다.


     안대를 벗고 재구조화된 공간에 영들은 앞을 응시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멈춰 있음이 아니라 그곳에 배인 기억을 갖고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응시의 형태로 응결된 것이다. 한때 ‘피아노 방’으로 쓰였다는 1평이 채 안 되는 작은 공간들 역시 그들이 서 있다. 가해자도 앞선 ‘현재’의 시간들도 다 사라진 후 심문실의 다음 단계인 고문실로 쓰였을 이 공간에 그들은 주인이 되어 있다. 마치 우리 스스로 이들을 보내줘야 하는 문제는 부차적이다. 이들 스스로가 그 기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에겐 관계 맺을 수 없는 타자가 들어선다. 


    영들을 마주할 수 없는 시선과 ‘영원한 시간’에 정박된 이들로부터 출현한 ‘어디에도 없는 장소’(nowhere)에 휩싸여 있다. 4층에 오른다. 할머니의 인도에 따라 우리는 문상 온 손님이 된다. 30명 정도로 나뉘어 들어간 방에서 제사상의 음식들을 나누고 한 곡조씩을 뽑기도 한다. 이는 다른 방에 곧바로 전달된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5.18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던, 5.18을 겪은 ‘광주 시민’의 체화된 인지의 조각을 들여다보게 된다. 순간적으로 특정한 공유의 정서(affect)가 새삼 낯설고도 친숙하게 밀려온다. 이제는 잘 부르지 않는 그 노래, 아니 잊을 수 없는, 어딘가에서 꼭 반복됐던 그 노래.


    혼들을 위무하며 집단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며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다. ‘잠재된 것들’은 다른 시간대에 중첩되어 있고 우리는 삶의 새로운 에너지로 밝게 그것들을 껴안는다. 앞선 정박된 타자들은 곧 우리 안을 헤매는 불안한, 불완전한 파편의 한 기억이 아닐까. 곧 우리의 한 부분으로서,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이 무거운 기억의 봉인을 해제할 수 없다. 그들은 슬프기보다 어둠을 슬픔을 갖는 하나의 신체가 아니라, 슬픔을 넘어선 하나의 기억이자 어둠을 먹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어쩌면 우리의 기억에서만 일시적으로 점화하는 환시의 조각이었다.


     이제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갈 차례다. 아래층에서 마주한 영상은 광주를 사는 현재 할머니의 모습들, 구부정한 할머니의 신체에는 그런 무거운 기억과 역사의 편린들, 타자의 상처와 그것의 해원에 대한 모든 것들이 들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찾은 곳은 두 개의 방에 걸쳐 있는 5.18 묘지로 국립현충원과 묘지 총 세 개의 묘지이다. 교실 전체를 덮는 커다란 화면은 거대한, 대타자의 시각으로 바라본, 정확히는 카메라의 와이드 앵글로 본 묘지들이다. 할머니가 길을 물어서 그 묘지를 들어서는 입구를 비추던 카메라에 기념비는 한 번에 잡히지 않는다. 카메라가 물러나며 긴 띠를 이루며 펼쳐지는 묘지들과 같이, 기념비 역시 그 끝이 채 잡히지 않는다. 카메라의 시각은 이 기념비의 높이는 하나의 허례의식이나 치장이 아닌 그 긴 행렬의 묘지와 비례하듯 처연한 높이로 자리함을 알린다.


     다음 방에서 역시 묘지들은 할머니의 신체로부터 출발해 넓어지는 앵글에 의해 거대한 죽음들의 산포를 알린다. 묘연한 스펙터클과 마주하며 마치 죽음과 부재와 생과 현존으로 다가오는 듯한 착각은 카메라의 줌 인이 완성시키는 바에 그칠까. 교실 창문을 두고 바라본, 곧 하나의 경계를 갖고 바라본 마지막 묘지의 광경은 영화가 하나의 신체가 되는 방식, 경계를 넘어 관객에게 다가오는 방식을 구현한다. 여기에 불길한 구음과 이탈되는 피아노, 간간이 들어서는 타악이 맞물려 기괴한 정동을 발산한다. 죽음의 죽지 않음, 삶의 살아 있지 않음이 맞물리며 우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 어느 것에도 정확히 위치할 수 없게 된다.


     이 전체의, 그러나 결코 다 경험할 수 없는 숭고함을 일으키는 ‘묘지-모나드들’의 합산의 불완전한 전체는 카메라의 시각을 넘어 생경하고도 거대하게 다가온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온다. 거기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혼을,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는 의식(의식)의 중첩으로 의자들에 놓여 있고, 처음의 조각으로 응결된 신체들은, 그리고 피아노 방에서 고착된 영들은 이 자신의 영이 머무는 공간, 그들을 위무하는 공간이기도 한 그곳에서 배회한다. 우리는 이들을 여전히 마주할 수는 없다. 다만 현전의 양상을 지켜볼 뿐이다. 그들이 멈춰 있던 곳에서 이제 거꾸로 우리가 무의지적으로 뭔가에 이끌리듯 앉아 그들의 하염없는 배회를 바라볼 뿐이다. 이 수많은 영혼들의 합산,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의 전체로서의 비(非)전체에 가닿는 마음은 허전하고도 일견 충만할 수밖에 없다. 그 경계의 어느 한 지점에 닿고, 또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그러한 감각.


     ‘언젠가’, 과거는 그렇게 미래적으로 다시 돌아왔다. 끝을 내지 않고 사라졌다. 명명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억되며, 마치 과거의 어느 한 순간을 착시적이고 환시적으로 목도하는 가운데.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공연 개요]

    ○ 공연일시 : 9월 3일(화) ~ 9월 15일(일) 오후 8시, 일요일 4시

                 ※ 9월 14일(토) 2회 공연 오후 4시, 8시

                 ※ 9월 9일(월) 공연 없음

                 ※ 9월 3일(화), 4일(수) 프리뷰 공연

                 ※ 9월 7일(토), 9월13일(금) 공연이 끝난 후, <연출가와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 공연장소 : 광주광역시 (구)광주여자고등학교

    ○ 티켓가격 : 20,000원

    ○ 관람연령 : 14세 이상

    ○ 관람인원 : 회당 60명 


    제작팀 
    - 작· 연출 : 트리스탄 샵스(Tristan Sharps,영국)
    - 작곡․음악감독 : 장영규(한국)
    - 드라마트루그 : 알리사 김(한국)
    - 조연출 : 박영희(한국), 이쉬모토 카에(일본) 
    - 영상 촬영 및 편집 : 케빈 클라케(Kevin Clarke)(영국)

    공연자  
    - 한국 : 강우정, 권영호, 김덕환, 김두영, 김미경, 김미영, 김우정, 김정주, 김종필, 문승배, 배윤범, 류성철, 신기원, 윤승훈, 이선영, 이정비, 이진아, 정수연, 조아라, 성혁
    - 일본 : 마수다 요시하라, 수쿠지 류, 이시모토 카에, 이토 미추히코, 하마다 아유미,
     미나미 치히로, 야마다 요헤이, 야마모토 에이코, 이노우에 타카코, 이데 키요미, 카나자키 요이치, 키노시타 이주루, 키타가와 유, 키타자와 테루키, 하마카와 아키히데   

    영국 스태프
    - 프로덕션 매니저 : 매튜 오트(Mathew Ort)
    - 기술감독 : 두기 윌슨 (Dougie Wilson)
    - 세트 제작 : 러셀 카(Russell Carr), 다리오 푸스코(Dario Fusco)
    - 그래픽 디자인 : 사라 포포와(Sara Popowa)

    한국 스태프
    - 기술감독 : 최정원
    - 무대감독 : 김학수
    - 음향 : 오영훈  
    - 음향 어시스던트 : 정새롬
    - 의상디자이너 : 이재희
    - 의상 어시스턴트 : 차세련
    - 부 디자이너 : 김희수
    - 디자인 어시스턴트 : 이보나
    - 소품 담당 : 정보미, 최윤서
    - 세트제작 : 우준상 
    - 기술크루 : 구민철, 문태민, 백승광, 최창열
    - A.V : 김현성
    - 무대진행 : 정지철 

    일본 스태프 
    - 기술감독 : 세키 히데야
    - 기술조감독 : 야마다 심페이
    - 세트제작 : 아쉬카가 세이

    아시아나우 
    - 책임 프로듀서 : 최석규
    - 프로듀서: 박지선
    -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 김상미 
    - 홍보·마케팅 : 김은옥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단장 : 김종율
    -전당기획과장 : 신은향
    -사업담당 : 배경민, 표연정
    -아시아문화개발원 : 오세형

    고치현립미술관
    - 책임 프로듀서 : 후지타 나요시
    - 프로듀서 : 야마무라 히사꼬
    -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 이타하라 루미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 
    - 책임 프로듀서  : 곤도 야수요 
    - 프로듀서 : 구로다 유코
    -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 교다 야수요

    드림씽크스피크 
    - 예술감독 : 트리스탄 샵스(Tristan Sharps)
    - 행정감독 : 크리스토퍼 스태포드(Christopher Stafford)
    - 프로듀서 : 루시 갓프레이(Lucy Godf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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