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현위치>를 관통하는 '토시키 오카다'식 불안으로서의 형식
    REVIEW/Interdisciplinary Art 2013. 3. 22. 05:03

    프롤로그 : ‘디스토피아가 만연한 사회’

    현위치(現在地), 이 말을 단순하게 ‘현재’로 바꿔본다면, 종말론은 그것을 믿는 자의 어리석음, 나아가 광기의 표식으로서 부인하며, 건강한 삶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정의하는 시기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한 발 더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아니 종말론은 이미 ‘세계의 끝’이라는 말이 친숙하리만큼, 매체의 파급력을 입어 디스토피아에 관한 그야말로 ‘디스토피아적(창의력 없는) 상상력’으로 우리 의식의 일부로 들어오는가 하면, 소통과 힐링(healing)을 부르짖는 사회 현실 속에 그 외피를 살짝 벗기면 거기에 한층 가까이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듯 보인다.

    ‘대재앙’이라 불릴 만한 대지진을 비롯한 일련의 실제 사건들이 토시키 오카다의 의식을 강타했던 것일까. 한층 무겁다. 이 무거움은 배우들의 신체 움직임이 꽤 줄어들었음에서 올 뿐인데, 내용 역시 종말에 관한 세계관들을 건드리는 데서 오는 메타적인 차원으로 드러나기에 실은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일 수도 있다.

    ‘멸망이 온다면’

    ‘당신은 내일 당장 멸망이 온다면 사과나무 한 그루를 심을 것인가?’, 단순히 말하자면, 이러한 물음의 재질문이 아마도 <현위치>가 아닐까 싶다.

    ‘멸망할지 모른다는 소문을 믿는다.’, 이것이 극에 등장하는 첫 번째 입장이다. ‘소문과 사실은 관계없다.’, 이것은 두 번째 입장이다. 이제 이 입장들을 조금 면밀하게 확장시켜 보자.

    전자는 이 멸망의 징후-극에서는 가령 물고기들의 죽음이 목격됐다거나 하는- 동시대적 감각의 일환에서 온다. 후자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증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데, 다만 나에게 감지되는 현재의 사실들만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 극이 가리키는 ‘현위치’가 아마도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후자 역시 ‘나는 믿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다.’의 또 다른 주관적 입장 아닌가. 전자의 나는 어쨌거나 몇몇 증거와 소문과 분위기를 통해 믿는다는, 불확실한 상황 아래 차라리 믿음을 택하는 것에 비한다면, 후자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점에서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객관적이라 말할 수 있는가?, 이는 결국 신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신은 없다고 믿는 것임을 부연하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리고 세 번째 다른 입장이 등장하는데, 이는 소문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기로에 서 있는 입장으로, 이는 소문이 사실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 동시에 이 믿음을 순전히 외부의 영역에 돌린다는 점에서, 첫 번째 입장의 유사계열을 이룬다. 동시에 이 믿음의 차원은 믿음 자체에 대한 믿음과 관계된다.

    ‘탈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믿음(들)의 문제로부터 토시키는 곧 ‘현위치’(지금 여기 우리)에서 수행적 차원으로서 노아의 방주를 띄우며 한층 더 문제의 중심에 우리를 위치시킨다.

    멸망은 기약할 수 없으니 일단 노아의 방주에 타는 게 상책이라는 전제가 (수행적 차원의 효과로) 곧 압박하기 시작한다. 여기에 그간 등장 않던 드럼이 긴장감을 돋우며 ‘잔잔한 스펙터클’을 드리운다. (멸망에 대한) 불안을 거세하고, 아니 역으로 용감함으로 향하지 못하는 곧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을 떨쳐 내지 못하고 (노아의 방주에 탑승 않고) ‘현위치’에 남는 자가 우리가 사는 현재에 있을까? 

    ‘불안해하지 않기’

    이 멸망의 징후에 동요하는 것을 불안으로 파악하는 것은 두 번째 입장의 강력한 기호 해석이다. ‘나는 하지 않겠다.’(바틀비) 곧 ‘나는 불안의 믿음을 갖지 않는다.’, 이는 ‘내가 불안하다.’, ‘불안하지 않다.’의 차원과는 또한 관계가 없다. 오히려 불안이 있건 없건 나는 그 불안을 믿지 않는다는, 갖지 않겠다는 어떤 의지의 입장에 가깝다.

    불안에 휘감긴 첫 번째 입장의 대변인을 '불안을 강력히 거부하는 여자'(두 번째 입장)는 목 졸라 순식간에 죽이는데, 결론에서부터 말하자면 이를 살인으로 무턱대고 정의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이 ‘살인’(죽음)은 불안이 어떻게 죽음과 직결되는지, 불안이 의지 없는 매혹에 휘감기는 것인지를 증명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이 죽음은 (부연하자면) 사건의 판본에서 이야기의 판본, 그리고 멸망의 그림자를 증명하는 메타적 기호로 다시 또 등장한다.

    이러한 부분은 꽤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모른다. 사건이 그저 극 중 극식 메타포로 편입되는 광경, 이야기의 한 조각이 되고 마는 현실. 토시키 오카다는 등장인물이라는 환영 대신 실재하는 인물들의 무미건조한 회화만으로 메타 담론의 흐름을 가져갈 수 있게끔 장치한 결과, 사건은 등장인물의 어떤 행동의 모티브가 되기보다 그저 어떤 순간으로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

    불안을 다루는 형식, ‘잉여적 구문’

    일단 토시키 오카다는 불안(종말)을 내용적으로 다루지만, 형식적으로 불안은 말과 겉도는 ‘이상한 몸짓’들로 거듭난다.

    우리는 이 변화 없이 무미건조하게 내뱉는(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한 피상적 소통의 현대사회의 징후를 일차원적 의미에서 표현한다) 회화(會話)들에서 몇 번의 사건과 어떤 실재의 기호들로 향하는 어떤 파국의 질서들을 보게 된다.

    가령 노아의 방주는 우리를 단두대란 바이킹(놀이기구)에 태우지만 이는 사실 가상의 상상적 놀이에 더 가깝다면, 우리는 대신 전혀 보이지 않았던(그저 지나갔을 수 있는) 그러나 분명 감지됐던 첫 번째 입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극의 시작에서 한 명(첫 번째 입장)이 등장하고 또 다른 한 명(두 번째 입장)이 그를 따라 등장하는데, 이 둘은 ‘마주하되 마주치지’ 않는 회화를 구성하게 되고, 다른 모든 이는 일제히 거기에 시선을 향한다. 둘은 마주보지 않는데 그 대화에 참여 않는 이들에게 그 둘은 일종의 ‘구멍 난 스크린’이 된다.

    이 구멍은 어둠 속에 뻗어나가는 은근한 빛(조명)에 의한 것인데, 이 구멍은 일종의 경계를 가리킨다. 일렬로 분포된 책상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원근법적으로 수렴되는 곳에 하나의 점이 아닌, 두루뭉술한 그 입구가 있다. (종말과 연결 짓자면) 우리에겐 어떤 메시아적 차원의 입구가 거기 있다. 한편 이 어둠을 집어삼키는 빛으로 보이는 커다란 어둠이 있다(빛으로 보이는 입구는 사실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둠으로 가는 입구인 것이다). 여기 동원되는 사운드는 사막처럼 건조한 듯하다(분명히 이는 이후 펼쳐지는 음악과는 조금 다른 긴장도를 갖고 있다).

    이 첫 번째 입구가 특별한 것은 이후 이 긴장이 갑자기 조명이 어두워지며 현재로 소급되며 사라지고 만다는 것에 또한 있다.

    ‘불안의 실재’

    이런 말이 극 중에 나오는 것은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내가 (종말에 대해) 무서워하지 않게 되는 것도 무서워”, 곧 이를 “(종말과 관련해) 불안하지 않게 되는 것도 불안해”라는 말로 정확히 바꿀 수 있지 않겠는가. 곧 내가 불안을 완전히 부정한다고 생각했을 때 사실 이 불안을 주재하는 대타자를 뛰어넘으며 나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에 이는 현실에서 찾을 수 없는, 곧 거의 실재(계)에 대한 공포까지 야기한다.

    그리고 이는 앞선 첫 번째 입구에 당면한 우리의 입장과 정확히 상응하지 않는가. 사실 앞선 ‘불안을 벗어나기’는 불안을 (미래에 대한) 매혹으로 감싸안기나 불안을(회피하지 않고) 기꺼이 수용하는 차원과 관계 맺지 않는다는 점에서, 또 다른 불안을 낳는 역설의 차원에 속한다.

    여기서 “진실이 뭔지 모르니까 그것을 묻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라는 극 속의 말은 (진리에 대한) 회의주의자, 다른 말로 불가지론자(나는 진실에 대한 믿음이 아닌 믿음에 대한 믿음만을 생각하는 세 번째 입장)와 ‘진실의 시차적(示差的) 생산 대신 단지 나는 내 현실만을 성실하게 추구할 거야’라는 식의 현실의 의지주의(意志主義)자(‘불안해하지 않기’의 또 다른 이름) 사이에서 단지 백지장 같은 차이로만 소급된다. 회의주의자는 희망주의자이면서 동시에 염세주의자의 가능성을 안게 되는 것이다.

    고향이 멸망과 불안과 관련해 또 다른 입장을 낳게 되는데, 믿지 않는다는 입장은 고향을 옹호하는 이에게는 ‘노아의 방주 대신 소중한 내가 사는 여기에 남는다.’는 입장으로 변형되어 드러난다. 여기서 노아의 방주는 더 이상 진리와 구원의 유일한 자리를 가리키지도 않으며, 단지 세기말적 불안에 휩쓸려 가는 하나의 가상의 상징으로까지 전락하고 만다. 이러한 입장 차에 의한 진리와 가상 간 뒤집기라는 사실로부터, 종말이 아닌 종말론을 데리다식 기표의 끊임없는 무한계열의 담론 속에 담그는 이 작품 자체를, 나는 함부로 믿지 않는다는 식의 회의주의적 입장의 견지에서 태동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극 전반에서 불안을 관통하는 형식’

    이러한 애매함 속에 여러 입장들의 교차 그리고 확장은 어디에도 동조하기 어려운 입장을 선사한다. 토시키는 이 회의에 대한 회의가 교차하는 무질서의 엔트로피를 몸의 잉여적 몸짓(불필요한 구문)으로 소환시키는데, 이는 곧 이 말들을 명확하게 하며 말들의 혼란에 ‘빼기’를 감행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잉여적 몸짓’을 도대체 무엇이라 할까. 이 독특함은 ‘내가 말을 하고 있다’의 의식 너머 ‘나는 단지 일부만을 말하고 있다’, 더 정확히는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감추며 그 일부만을 말하고 있다’의 무의식이 ‘나는 말하고 있다’속에 걸러지며 남는 그러한 잉여를 말하는 것일까.

    이 말을 하는 주체를 곧 수행적 주체로 내세우는 대신 나의 현존은 나의 부분 신체로, 가령 나의 시선 바깥의, 내가 통제하지 않는 신체에서 오는 것, 아니 더 정확히는 이 부분 신체를 확인하며 동시에 그 온전한 신체 전체를 부인하려는 몸짓의 끄트머리에서 따라오는 것 아닐까.

    곧 앞선 수행적 주체는 제인 오스틴의 수행적 담화에서 연유하지만, 토시키 오카다는 뚜렷한 주체를 내세운다기보다 오히려 부인하는 몸짓을, 또는 발화되지 않는 무엇에 끊임없이 집착하며(이는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다) 이 말들 너머에서 곧 이 말들을 형식으로 내세우며, 오로지 드러나지 않는 내용의, 가장 강력하고도 따라서 해석되지 않는 형식들의 기호를 드러내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불안을 믿지 않기’는 실은 토시키 오카다의 경우에는 ‘더 큰 불안으로부터의 부인’은 아닐까. 여기 바틀비식 의지는 마치 새로운 대안을 주는 차원의 담론으로만 귀결될 수 없는 애매함으로 거듭난다.

    에필로그 : ‘농담 하나’

    마지막으로 극 속에 등장한 재미있는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거기 서!”에 응수로서 멈추는 대신 “조금만 기다려”라는 대답을 남기는 숱한 사례, 이를 이렇게 바꾸는 게 가능할까 “미래야 멈춰!”(‘미래야 너의 모습을 드러내! 내지는 미래를 알려줘!’)에 대해 “조금만 기다려 (, 그럼 알게 될 테니까)”라는 매우 당연하지만 어리석게도 되풀이하는 불안으로써 미래를 예단하고 또 믿는 인류의 당연한 어리석음, 아니 인간임을 증명하는 어리석음이 거기 담겨 있는 듯하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