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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톺아보기] '텍스트에서 콘텍스트로의 전환', <오디세이>
    PREVIEW/Theater 2012. 10. 17. 11:42

    텍스트(비디오테이프)에서 텍스트의 부정(비디오테이프 곽)으로

    ▲ 연극 오디세이 [사진 제공=한국공연예술제]

    폴란드 연극 <오디세이>(연출 크쉬슈토프 가르바체브스키)의 ‘귀뚜라미 소리가 환유하는 자연’과 ‘그림자가 비치는 불투명한 스크린이 가리고 있는 환영의 현실’이라는 배경은 혼재된 세계와 매체의 반영을 의미한다. 비디오테이프 곽들이 흐트러져 쌓여 있는 이미지가 주는 아날로그 매체의 반영과 그 안에 담겨 있지 않은 비디오들이라는 콘텐츠 없는 껍데기들은 '표피로만 존재하는 현실의 재현들'을 의미한다.

    <오디세이>는 이처럼 매체를 통한 혼재된 세계와 표피적인 세계 반영의 하이퍼텍스트적 차용을 통한 오디세이의 자기 지시적이자 끊임없이 원본에서 미끄러지는 텍스트의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이러한 원작을 고스란히 따르는 텍스트의 재현 방식에서 원작을 해체/조합하고 현재적 의미들을 덧대는 식의 차용 방식을 활용한 콘텍스트로의 이동은 재현 상이 벌어지고 그를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시선을 유지하는 식으로 놔두는 식으로 '재현되고 있음'을 명징하게 드러내거나, 내지는 무대 앞뒤를 나누어 무대 앞 중앙 모래판에서는 옛 신화의 흔적이 서려 있는 곳 등으로 여러 변화를 두며 표상되며 '원작을 해석'하고, 또 무대 뒤에는 반투명 스크린을 두어 여닫는 식으로 무대가 바뀌고 달라짐을 드러내며 현대적 신화로 '오디세이'가 '변용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여기에 연주자와 밴드 대신 무대와 경계를 이루는 한 남자는 아이패드로 게임을 하는 평범한 현대인의 한 전형으로 표상된다. 그로 인한 아이패드로 구현하는 십자가 내지 교차로의 형태 아래 중앙으로 모여드는 또 그 중심 바깥으로 벗어나는 분자들의 입체를 이차원으로 압축한 얼룩짐의 표상은 건조한 전자음악의 중독성 있는 사운드를 만드는 것과 결부된다.

    현시(신화적 세계)에서 재현(현대적 신화의 세계)으로

    신화적 세계와 근대의 경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으로, 누드의 남자가 노란 빛 조명을 받으며 카펫으로 덮어 놓은 무대 중앙의 모래판에서 반복된 움직임을 만드는 가운데 그 뒤에서 역시 누드인 이를 바라보는 아들이 겹쳐진다. 후자는 하나의 노출의 측면, 곧 술 취해 비틀거리는 퇴폐의 측면에서 앞의 생명력을 현시하는 존재와 완전히 상반되는 측면에서.

    평화롭고 완만한 곡선의 교향악적 호흡과 산만한 팝이 상반된 호흡의 그래프를 그리며 커졌다 작아졌다 변곡점에서 그 최대치의 호흡을 드러내며 중첩된 지점을 이룬다. 내용물이 없던 비디오테이프 집에서 이제는 릴에서 뽑아낸 테이프들을 뒤에서 불태우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는 이미 충만한 신체와 달리 현재에는 내용들을 불태우며(부정하며) 곧 텍스트의 흔적만을 좇으며 또 다른 텍스트를 쓸 수밖에 없음을 말하는 것도 같다. 깜빡이는 형광등과 건조한 현재, 그리고 현대의 무대는 건조하다. 붉은 빛을 띠었을 때 이는 핏빛 파토스를 그대로 드러내기보다 오히려 정육점의 인위적인 생명력을 제어하고 분리하는 건조한 공간에 가 닿는 듯 보인다.

    곧 무대 앞쪽과 달리 무대 뒤쪽의 공간은 매우 현대적이며 또 신화 속 등장인물들이 자리하는 경우에 있어 현재의 흐름을 가져간다. 이 신화적 인물(오디세우스)의 현시에서 가랑이 사이에서 피가 나오며 이를 얼굴에 문질러 대며 텔레마쿠스가 태어남을 드러낸다.

    아버지의 흔적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이 작품이 ‘오디세이’ 원전의 하이퍼텍스트적 차용을 이뤄 나가는 것과도 유사한데 아버지를 부정하기 위해 아버지를 신이 아닌 인간의 자리로 강등하고 다시 부자의 관계로 소환해 내기도 한다.

    또는 ‘오디세이’라는 신화적 위치를 부정하기 위해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재현 식으로 구성해 내는 가운데 오디세우스와 아르고스의 위치를 같은 곳에 두고 명령 받는 존재자들로 묶어 내며 이 일시적인 모사물 속 오디세우스에게 오디세우스가 아니라는 식으로 그 고유성을 부정하며 오디세우스의 부재하는 자리를 선명하게 자리하게 한다. 이는 결국 오디세우스는 명명될 수 없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말들에서 도무지 진실일 수 없는 말들이라는 말 곧 현실에 접근하기 전까지 유예되는 말들, 무의식적으로 쏟아내는 의미 없는 말들, 그렇지만 그럼으로써 의미 있는 유일한 말들의 의미를 주지시키며 이 메타적인 언급들의 홍수 같은 전반을 자기 지시적으로 나타낸다.

    페미니즘 역할극으로 영웅 신화 해체하기

    “그래요.”라는 맥락 없는 움직임의 진행 버려진 무대 환영이 자리하던 무대는 빈 공간으로 잠깐 틈을 보인 이후 여자 독백을 날리며 페미니즘적 콘텍스트를 온 몸으로 만들어낸다. 사실 이 여자는 아르고스처럼 처음부터 무대에 버려져 있던 존재인데, 오디세우스와 같은 영웅, 전형적인 남자의 한 여자로 머물러야 하는 여자인 페넬로페를 비롯한 모든 여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연극의 역할들은 일종의 역할에 따른 고정된 배우가 있기보다 이 역할-되기의 과정 아래 메타적인 측면에서 연극을 재현하기 때문에 역할들에 대한 개인적 혼선이 있었던 점을 전제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오디세이를 읽은 적 있지만, 서구의 신화 자체가 친숙한 앎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역시.

    가슴을 ‘젖탱이’로 언급하고 (모든) 즐거움은 남자의 즐거움이며 그 즐거움을 위해 여자는 희생해야 한다는 것, 이는 꽤나 의미심장한 경구로도 드러나는데, ‘큰 거울 안에 표정은 안 그려진다’는 곧 자신은 이 바깥을 나갈 수 없으며 동시에 조망할 수 없다는 근대의 갇힌 현미경적 세계관을 여성의 약자적 위치의 전유로 조망해 낸다. “그래요.”는 그런 현실들이 진실임을 확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체념적으로 인정하며 매우 저항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이다.

    끝으로 영화 <매트릭스>에서 앞을 내다보는 할머니 오라클과 주인공 네오의 만남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에서 오디세우스의 미로를 헤맨 삶의 역경에 관한 부분을 언급하며 오디세우스에게 위로를 던지는 할머니에 이어, 듣지 않는(끝없는 여행 중에 있는 오디세우스를 작품은 부재하는 오디세우스로 처리하고 있다) 오디세우스에게 그저 허하게 한번 던져보는 “어땠습니까?”라는 후세 사람의 사료 연구적 맥락(렉처 퍼포먼스와 같은 무대에 극 배치가 앞서 이뤄지고 있었음을 주지한다면)에서의 말이 꽤 포근하게 무대에 안착된다.

    이는 오디세우스란 인물을 타자로 바꾸며, 이야기 속 주인공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디세우스란 이야기가 온전히 있는 게 아니라 이를 듣는 수용자가 먼저 위치한다는 것으로써 이 무거운 신화에 대한 해체적 읽기의 작품을 만드는 방식의 전제를 드러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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