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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신후, 〈두 다리, 몬스터와 인간들〉: 존재에 대한 공고한 거리로서 미학적 완수
    REVIEW/Performance 2026. 7. 2. 13:56

    이신후, 〈두 다리, 몬스터와 인간들〉 2025.04.04.ⓒ이지영, 이동웅[사진 제공=서울시립 서서울미술관](이하 상동).

    이신후의 〈두 다리, 몬스터와 인간들〉(이하 〈두 다리〉)은 얽힌 두 신체와 이를 강탈하는 두 신체의 대립 쌍으로 이행되는데, 이때 전자는 항거하지 않으며, 후자는 전자를 사물처럼 다룬다. 막의 구분은 장소의 분기를 따르는데, 1막 주차장 공간의 “연인”에서, 2막 옥상의 “댄서”로 전자가 하나의 희생 제의의 제물의 자리를 ‘순환’하는 가운데, 3막 전시실에서 이 모두가 한데 종합되어 끝이 나는 구성이다. 이 세 개의 막에서 사용되는 오브제는 모두 고유하고 또 다른데, 그것은 공간의 특질을 함입하는 신체의 지지체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신체는 절대적으로 그 지지체에 묶이고 결속된다.

     

    1막의 연인은 한데 얽혀 ‘정지’되어 있고, 이는 그 앞의 커다란 괘종시계와 동기화되는 초침 소리와 이를 파고드는 맞은편, 가장 뒤쪽의 수동 타자기 소리의 긴박함으로 ‘조여진다’. 신체는 그것과 동조화되며 연장된다. 곧 신체의 지지체는 직각삼각기둥([위]+직육면체[아래]―옆면은 곧 직각부등변사다리꼴을 90도로 기울인, 곧 윗변-아랫변과 나머지 대변의 위치를 역전시킨 형태이다.―)의 급격한 경사면의 끄트머리에 남자의 발이 걸리며 아래로 머리를 향하며―거꾸로 누워 있다.―, 이를 오른팔로 받치고 왼팔로 목에서부터 얼굴을 감은 채 또는 눈을 감긴 채 아래로 다리를 둔 여자―바로 누워 있다.

     

    그렇게 두 얼굴이 반전되며 나란히 놓여 그와 결착되는 물리적 구조물의 단면 자체보다는, 이를 포함해 공간을 진공 상태로 만드는 단속적 소리 자체가 심리적 경계의 막을 형성한다. 이 소리가 지정하는 소리 자체의 배경이 이 공간으로 ‘매끈하게’ 연장된다고 믿는 것은 아마도 관객이 주차 스토퍼들이 임시적으로 경계를 수여하는 커다란 직사각형 안을 비정형적이지만 바트게 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안’으로의 구심점을 갖는 것인데, 그것은 어둡고 음습한 이 공간의 바깥으로부터의 방어기제를 떠안고 있다. 어쩌면 소리는 시한폭탄의 그것을 연상시키는데, 괘종시계의 실제 소리가 아닌, 그것을 의태한 소리는 괘종시계 뒤편에 부착된 불빛이 나는 전자 회로 장치가 실제 사운드를 거기에 부착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무엇보다 비가시적인 인공물로서 공간을 한정된 단일 차원의 ‘점’들로 바꾼다(‘그 기원은 숨겨져 있고, 따라서 위험한 사물로서 우연히 발견된다.’).

     

    자세히 보면, 여자는 눈을 감지 않고 남자의 눈을 감기고 있는데, 트럭을 몰고 와 내린 두 기사―수산물 시장에서 일하는 직원이나 경호원에 더 가까워 보인다.―가 이 둘을 옮겨 수조에 넣고 물을 호스로 투여할 때, 그리고 다시 천막에 싸서 바깥을 빠져나갈 때까지 어떤 항거도 하지 않는다는 건,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신체와 의식이 괴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기사의 두 신체의 사물화된 연장의 측면은 사지 불능의 이 마비된 신체를 이 둘이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이입을 차단하며, 곧 이 항거하지 않음과 항거할 수 없음의 차이를 무력화한다.

     

    이 둘은 횟집 수족관의 활어가 되는 셈인데[각주:1], 그러니까 왜 이들은 물신화되는가. 왜 그들에게는 말이 없는가. 왜 모든 것은 솔기 없는 단차원적 시간의 질서로 수렴하는가. 바닥의 천막에 먼저 이 둘을 옮기고, 그 옆의 수조에 앞선 두 머리가 맞닿는 지점으로 가라앉힐 때, 이 둘은 그 수조로부터 불투명한 이미지가 되며 물의 하강과 함께 잠겨 가게 된다―수조는 여성의 목께까지 오는 높이의 중간 칸막이로 두 칸으로 나뉘며, 각 칸에 남녀가 분배되는데, 이때 여성의 칸부터 채워지다 그것이 넘쳐 남성의 칸을 채우다 종료되며, 애초에 그 둘은 완전히 잠길 수 없는 구조이다.

     

    참고로, 여기서 결정적인 소리-공간의 성격은 속도와 밀도의 조응으로써 합성된다. 그러니까 변화의 분기는 소리의 조절과 맞닿는다. 곧 소리는 사건과 동조되는데, 이후 물이 수조를 거의 다 채울 때 박자가 더 빨라진다. 엄밀히 두 강세의 박 안에 작은 박이 끼어 늘어진 간격을 만들다가, 이후 2박을 유지하게 된다. 이때 수조의 물을 공급하는 트럭의 모터 소리도 그 소리의 강도와 즉물적인 차원으로서 연관된다.

     

    공교롭게 기사는 수조에서 연인의 긴밀한 관계를 연장시켜 주는데, 이는 그 둘이 하나의 시간적 단면에서 ‘포박’되어 있음으로 소급되는 지점에서, 하나의 운명적 연결 고리와 비가시적인 초월적 존재자의 의지로 분기되며, 그 이전의 관계로 연장시킨다. 그러니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퍼포먼스의 약속 구문에서 나아가 희미한 시나리오 형식 안에서 그 넷을 동등한 당사자로, 곧 피지배자로 재처리한다. 〈두 다리〉는 “기사”와 “몬스터” 사이의 간극을, 그 둘을 하나의 존재자에 대입해야 하는 모순을 결코 해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결정적으로 그 둘 사이에서 퍼포먼스―매개자로서 투명성과 능동성―와 (연)극―서사 지형에서의 부정성과 수동성―을 절합시킨다. 〈두 다리〉는 이 장르적 혼합물로서 ‘몬스터’를 출현시킨다.

     

    표면적으로 기사의 신체를 보존, 처리하는 힘은 신체를 다루는 역량에서 연장되는 셈이며, 거기에는 그 둘의 대상이 되는 존재자들과 마찬가지로 어떤 의지 없이 신체를 매개하는 존재자의 위치에만 머무름만이 있는 셈이다―그것은 초월적 존재자의 개념, 더 큰 (극적) 서사를 요청한다. 이때 묶인 두 존재는 타자가 아니며, 그에 대한 구원과 해방을 우리에게 요청하지 않는다―“그 무심함에 일종의 두려움과 편안함이 동시에 느껴진다.”(2022). 이런 단순한 옮김―수조로의 옮김 역시 고통을 수여하려는 것이 아니라, ‘임시적으로’ 위치성을 전도시키는 것에 가깝다.―의 기술로부터 매개되는 건 신체 자체라기보다 신체와 결착되는 장소, 곧 신체-장소이다.

     

    〈두 다리〉에서 장소 특정적 퍼포먼스의 특질은 신체가 하나의 장소라는 것으로, 신체는 고정되어 국지적 장소로 ‘거의’ 환원된다―이동되어지는, 이동하는 과정(의 장소)에 놓이는, 물컹하고도 단단한, 가변적인 대상이 된다. 2막에서 고정되는 건 두 대상을 묶을 때부터이다. 상의 기준으로 흰색과 검은색으로 대비―이러한 색의 대비는 그 둘의 캐릭터성을 설명하기보다 그 둘의 설명되지 않음에 대한 편의상 구별의 성격을 드러낸다.―되는 그 둘은 댄서로, 원형 단상에서 그 가를 뱅뱅 돌다, 서로를 마주하며 Osváldo Pugliese의 〈Desde el Alma〉 음악 아래 탱고를 춘다.

     

    이때 그 둘은 기사의 검은 로프에 묶이고 그 둘과 함께 도는데, 이때 밧줄은 그 둘의 만남을 저어하고 또한 도는 동작에 조응하여 그 둘을 칭칭 동여매게 된다. 이윽고 기사는 다시 포대에 싸서 직각삼각기둥 구조물을 눕혀 계단―밑면의 길이가 원형 단상의 높이와 합치한다.―을 만들고, 빈 카트를 올리고 다시 그 둘을 로프로 묶고, 싣고 내려 이동한다―그 이동의 경로는 앞선 이동의 과정에서처럼 시각적으로 분리, 차단되어 있다.

     

    이제 세 번째 마지막 장소에 도착한다. 거기에는 거대한 4단 비계 구조물이 중앙에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4대의 CCTV가 설치되어 하나의 모니터에서 동시 송출되고 있다. 처음의 연인은 찢어져서 4층과 3층에 각각 의식을 놓은 채 놓여있고, 기사는 댄서 둘을 비계 아래 매트에 먼저 옮기고, 한 명씩 안전그네를 다리 밑에서부터 배께에 채우고 후크를 걸어 천장에 걸린 도르래로 옮기고 난 이후 발목에 사슬을 채우고 내려온다.

     

    이후 몇 가지 증폭된 효과가 발생하는데, 드론이 비계 주변을 맴돌다 낙하하고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 블라인드가 내려가고 조명이 나가며,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다, 김윤아의 〈증오는 나의 힘〉이 스피커로 터져 나온다. 세 막에는 공통된 경계의 자리가 부여되는데 “관찰자”(안담)의 이 자리는 수동 타자기를 들고 이 현장을 그야말로 묘사하듯 재현하는 것이다. 이 목격의 자리는 현장을 장면으로 치환하는 관객의 자리를 선취하며 또한 지시한다.

     

     

    이는 극의 폭력성에 대한 수동적 수용의 자세를, 또는 폭력의 규율을 규칙으로서 승계하는 모호하고도 떨떠름한 예술에 대한 초과적 인식을 과잉 기표로서 산출한다. 하지만 그것은 실은 결여된 기표로서, 현장을 언어로 바꾸지만 그 언어의 한계 안에서 시험된다. 따라서 관찰자는 공백을 탈은폐한다. 〈두 다리〉는 제목에서처럼 “두 다리”로 (“몬스터와 인간들”이) 소급되는 자리를 만드는데, 몬스터/기사가 바닥에서 긴 사슬을 잡아당겨 두 사람의 다리 한 짝씩을 띄운다.

     

    수동적 신체의 부상은 신체를 파지하고 옮기기의 차원에서 벗어나 신체의 위치를 순간적으로 국소 조작하고 변용하며 고취시킨 것과 같다. 이러한 차이는 무엇일까. 하강적 폭발에 대응하는 유일한, 힘없는 이 반등은 신체의 죽음을 철회하는 대신 영속화한다. 반면, 실질적 결말은 현실로 돌아와 관찰자가 끝까지 잔여와 흔적을 기록하는 것인데, 그것은 관객이 모두 나가기 전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요한 건 그 내용보다 그 거리인데, 이 공고함은 우리의 개입이 의미 없음보다는 우리의 (비)개입이 모든 것을 완성한다는 것, 이 현장의 확장된 지지체라는 것을 기입한다.

     

    김민관 편집장 

     

    서서울미술관 지하 2층 주차장, 지하 1층 전시실 1, 옥상정원

     

    라이브 퍼포먼스

    4. 3.(금) 17:45

    4. 4.(토) 17:45 

    4. 5.(일) 17:45

     

     

    연출: 이신후
    조연출: 김승현, 박진아
    무대 감독: 이효진
    퍼포머: 서규리, 채동혁, 김승록, 임은정, 신지효, 조경란, 안담
    제작 감독: 황효덕 (코스모스)
    조명 디자인: 공연화
    괘종시계 프로그래밍: 구의진
    특수 효과: 청년급수 (김경훈)
    촬영 감독: 김진표
    드론 조종사: 김이중
    그래픽 디자인: 고준호
    프로덕션: 범의 공작실

    1. 1. 이는 페스티벌 봄에서 열린 홍성민의 〈Revolving Sashimi: 먹어도 좋다는 신호〉(2008)를 상기시킨다. 회전초밥집의 구조와 인간-사시미의 환유적 수행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일관된, 신체 그 자체를 날 것으로 전면에 투여시키며 얻는 기이한 물신적 전이 지점에 대한 그 드물고도 예외적인 차원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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