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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리카 메시티, 《릴레이 리그(Relay League)》: 번역의 수행적 확장REVIEW/Visual arts 2018. 3. 2. 12:55
▲ <릴레이 리그(Relay League)>, 2017, 3채널 비디오 설치, 8분, [사진 제공=아트선재센터](이하 상동)
3개의 스크린이 막으로 구분되어 설치된 <릴레이 리그>는 마치 회전문처럼 분할되는 공간에서 소리의 간섭으로써 또 이전 영상의 잔해로써 스크린-공간을 접합한다. 이 문은 물론 돌아가지 않으므로 세 개의 분리된 스크린을 지나야만 입구를 출구로 대체할 수 있다. 3개의 영상은 공통되는 원본에 대한 번역으로서 또(는) 그 번역의 또 다른 번역으로서 존재하는데, 그 번역의 원본이라 할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 이것은 영원한 침묵에 앞선 우리의 마지막 함성”은, 1997년 1월 31일, 130여 년 만에 해양 조난 통신에 사용되던 모스 부호의 종언을 알리며 송출한 프랑스 해군의 마지막 전신의 기의이다.
▲ <수신자_전원에게_알림(Appel_a_Tous_Calling_All)>
이를 장단음의 분리로써 (하나의 고정된 기표들로서) 시각화한 전시장 입구에 있는 사운드-조각 <수신자 전원에게 알림>(2017)과 같이 번역은, 원래의 의미를 감춘다. 이는 다시 첫 번째 영상(이라 안내되는 영상)에서 악보로 번역돼 연주로 펼쳐진다, 붓/드럼 스틱/오동나무 꼬투리 등을 번갈아서 심벌과 베이스 드럼 등을 두드려 각각 단음과 장음을 표현한다. 다음 영상에서는 스튜디오에 앉은 두 남녀 무용수를 비추는데 여자 무용수는 시각 장애가 있는 남자의 신체를 붙잡고 어떤 움직임들을 지각하게끔 유도한다. 이는 다음 영상에서 앞선 연주의 사운드트랙을 틀고 그에 맞춰 춤을 추는 남자를 비추고 그 곁에서 앞선 두 사람의 모습이 언뜻 언뜻 드러난다.
작가는 번역을 시각, 음악, 움직임이라는 다른 매체의 표현형으로서 구현할 것으로 요청하며, 원본의 질을 떨어뜨리는 대신 원본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난다. 애초에 마지막 모스 부호는 메시지보다는 전달(했음) 자체에 의미를 둔, 자기 선언적인 메시지로서, 한편으로 완결시킨다(는 것을 알린다)는 점에서 수행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사실에 대한 투명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시적이다. 종결을 알리는 “우리”라는 주체가 지정하는 “수신자”는 곧 “영원한 침묵”으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우리’로 묶이게 된다. 하지만 또 다른 발신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는 제한된 플랫폼으로서 예술의 발신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 <릴레이 리그(Relay League)>, 2017, 3채널 비디오 설치, 8분,
작가는 매체적 번역을 통해 흡사 매체 자체에 대한 실험적 탐구를 끝없이 벌려 나가는 듯 보이지만―그에 대한 욕망을 갖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실은 모든 예술적 표현의 과정은 발신과 수신으로써 연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피드백의 고리를, 그 과정을 보여주는 역할에 머무는 데 그친다. 여기서 마지막 모스 부호의 ‘우리’는 발신의 주체가 아니라 이미 그것을 인지하는 현재의 ‘우리’라는 점은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수신에 따라 발신이 재위치될 수 있는 것은, <릴레이 리그>의 피드백 고리가 구성하는 바다.
수신이 오히려 발신을 앞서 있는 것. 모스 부호가 음악의 순수한 표현형으로서 질적 신체를 획득하며 확장되는 것과 같이, ‘눈 먼 이’―실제 그의 시각이 어느 정도 세계의 틈을 허락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만 저 앞의 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전제 아래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설명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다―에게 현재 보이는 것을 몸으로 전달하는 표현―(발신으로부터의) 발신과 수신―은 시각의 부족분을 메우려는 부분보다는 움직임의 감각 자체가 직접적으로 다가오며 생생하게 세계를 구현하며 원본 가치를 새롭게 격상시킨다. 그러니까 눈 먼 이의 눈은 감각이 깨어나고 있다는 어떤 표현형으로 반응하고 있다고 보인다.
그가 보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가 앞을 보지 않고 다만 몸에 그려지는 것을 보(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수신은 성공한 것이다. 결국 예술가는 표면적으로는 지령을 주고 촬영만 함으로써 관객은 온전한 승리자가 된다. 예술가는 수신자의 위치를 점함으로써 순수한 발신을 매개하는 위치를 점한다. 하지만 발생하지 않은 건 또 다른 ‘발신’이고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은 그에 대한 ‘수신’이 된다. 이미 작가가 수신적 발신의 위치를 취하고 있으므로.
▲ <시민 밴드(Citizens Band)>, 2012, 4채널 비디오 설치, 21분 25초
네 개의 스크린으로 구성된 3층의 전시 <시민 밴드>(2012) 역시 개별 영상을 따로 따로 감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하나의 스크린은 하나의 존재 혹은 하나의 관계 맺음을 상정한다. 물론 이는 모두 다른 장소와 차별적 존재들로 구성된다. 카메룬 출신인 제랄딘 종고가 파리에 있는 한 실내 수영장에서 선 채 두 손으로 물을 퍼커션처럼 다루는 영상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파리 지하철에 탑승한 알제리 난민 모하마드 라무리가 라이 음악을 키보드 연주와 함께 부르는 영상으로, 다시 몸을 90도 돌려 시드니 뉴타운의 길목에서 몽골에서 온 부크출롱 갱보르게드가 마두금을 연주하며 흐미 창법으로 노래를 하는 영상에서, 수단에서 이민 온 아심 고레시가 역시 호주 브리즈번에서 택시를 몰다 휘파람을 부는 영상으로 존재와 음악은 옮겨 간다.
▲ <시민 밴드(Citizens Band)>, 2012, 4채널 비디오 설치, 21분 25초
롱테이크로 이를 잡음으로써 동시에 퍼포머가 카메라에 대한 인지가 없음을 전제로 하는 클로즈업으로써 퍼포머에 흡착하게 된다―예외적으로 종고의 움직임은 목소리가 아닌 물질과 접면하며 파생되므로 일관된 프레임 속에서 담긴다. 고향의 음악을 타지의 장소에서 구현하며 음악은 매개/번역된다. 하지만 수신자의 반응을 지움으로써―예외적으로 라무리의 음악에는 많은 수신자가 있지만 이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비수신자의 지위를 획득한다―또 다른 장소의 수신자를 현재 접합한다. 여기서 원본은 애초에 원래의 장소로부터 구현되지 못한다. 단지 또 다른 수신과 그에 따라 (재정의되는) 발신이 있을 뿐이다!
▲ <시민 밴드(Citizens Band)>, 2012, 4채널 비디오 설치, 21분 25초
이들 연주 이후에는 마치 고레시가 있는 밤의 도시 불빛들이 산란되며 뱅글뱅글 돌며 네 개의 스크린을 접합하게 되는데, 여기에 앞선 음악들이 분절되어 종합을 이룬다. 네 존재의 다성부 음악은 혼란스럽고 곧 어떤 위치에 포획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동할 뿐인데, 사실 이는 영상 상영 순서에 따른 종합이 주는 매개에서 이미 선취되어 있다. 그것이 속도로써 더 급진적이 될 뿐인데, 또 그 방향은 의도적으로 거꾸로 간다. 따라서 이동은 매개에 따른 효과일 뿐이며, 존재는 음악의 위치와 같이 이동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존재와 그로부터의 음악을 인지한 우리는 그 네 개의 존재를 따로 또 같이 인지한다―물론 여기에는 또 다른 예술의 의도된 효과가 있는데 네 개 영상의 소리는 옮겨 가며 겹쳐지고 모두 같은 음량으로 일관되게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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