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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마이 러브>: 구체적이지 않은 개인의 서사REVIEW/Dance 2017. 11. 2. 14:38
전미숙(Jeon misook Dance Company), <아듀, 마이 러브(Adieu, My Love)>
▲ 전미숙(Jeon misook Dance Company), <아듀, 마이 러브(Adieu, My Love)>ⓒ박상윤 [사진 제공=전미숙 무용단] (이하 상동)
무대 폭을 완전히 가린 두꺼운 붉은 천을 뒤집어쓰고 전미숙이 앞으로 가는 첫 장면은, 과정을 생략한 절정이라 할 수 있다. 무게는 그를 옥죄고 온전히 끄는 것은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곧 잔상을 남기며 흩어져 버리는 기계음(노이즈 사운드)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는 물리적으로는 저 먼 곳에서 시작되어 근접했다 사라진다. 형벌 같은 천은 사운드와 맞물려 각각 일종의 옷감이라는 구체적 지표로, 봉제공장의 재봉틀 소리로 치환되며 둘은 서로를 지시하고 보충한다(재봉틀로 천을 박음질한다). 그 천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 바깥이 현실을 벗어난다는 것을 상징한다.실제 무대에는 단 한 명만이 존재하고, 그럼에도 무대는 온전히 채워져 있어 물질과 존재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며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데, 결과적으로 거대한 세계 속에 미약한 한 개인의 끝이 없는 투쟁의 서사로도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천 위에 놓인 거대한 상 위에 매달리는 모습은 <모던 타임즈>(1936)의 거대 기계의 한 부속이 되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을 오마주하는 듯하다. 사운드는 계속 누적되며 가상의 부피는 증가되는 느낌을 주는데, 곧 개인이 견디기 힘든 무게는 심리적 긴장을 일으키는 사운드와 맞물린다. 상을 정면으로 놓으면서 이는 제사상으로 변환되는데, 제사상에 깔린 음식들을 던져버리고 제사상을 엎어버리는 그야말로 전복적 행위는 이 작업을 페미니즘의 서사로 완전히 확증하는 듯하다(‘여성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
이어 나오는 ‘댄서의 순정’이라는 노래는 전미숙에게 온전한 춤을 선사하는데, 곧 몸에 가해지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신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며 더딘(‘끈적거리는’)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이는 상투적 노래 가사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의 목소리로써 기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서 생기는 처연함의 분위기에서 ‘인생이란 ~했다.’는 식의 자기 고백의 서사(단지 상투성 자체를 차용한 것으로 보기에는 “댄서”라는 기표가 너무 뚜렷하다)로의 전개는 너무 확연하면서 앞의 서사들의 세세한 부분들을 지워 버린다. 곧 이는 거대 서사(‘사회 속의 나’)에서 개인의 내면(‘자화상’)으로 소급돼 버린다.
여기서 극의 끝이 가리키는 바는 자못 의미심장한데, 상이 무대 가에 반쯤 걸린 채 있고 전미숙 역시 그 끝에 이른다. 앞서 쌓아간 서사의 부족분을 해결할 수 없었던 것, 나아가 지시하는 것으로서 끝은 걸쳐져 있다. ‘나는 세계의 끝에, 곧 벼랑 끝에 서 있다.’ 그러나 그 이유는 묘연하다. 아니 망각된다. 그리고 그 망각은 선택된 것인지, 아님 어쩔 수 없는 체감인지의 선택지에서 아무래도 후자에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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