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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단 DNA(김용배적 감각): '적절한 그릇에 담은 전통'
    REVIEW/Music 2017. 7. 25. 14:55

     

    ▲ 박은하․김정희․김복만․원일 ‘장단 DNA’(부제: 김용배적 감각) 공연 모습[사진 제공=국립극](이하 상동)

    2017 여우락 페스티벌의 개막 공연인 <장단 DNA(부제: 김용배적 감각)> 공연[연출: 적극, 출연: 박은하(꽹과리, 춤), 김정희(장구, 꽹과리), 김복만(징, 꽹과리), 원일(북, 피리, 꽹과리), 김영길/윤서경(아쟁)]에는 본론의 끈덕진 길을 가는 데 있어 두 개의 초입이 자리한다. 15분 정도 빈 무대에 김용배의 사주를 음악 평론가 강헌이 푸는 것에 따라 스크린에 김용배의 사주 명식에 레이저 포인터의 빨간 빛이 표시되는 것[목(木)-여시아문: 고(故)김용배 원국풀이]이 첫 번째고, 이어 원일 예술감독이 신시사이저로 홀로 앉아 스크래치되는 연속적 기계음들이 하나의 구멍으로부터 분출되고 다시 그 구멍으로 소급되는 듯한 디제잉[화(火)-응달에서]을 선보였는데, 이때 봉앤줄 안재현의 6미터 장대의 차이니즈 폴 묘기가 결합됐다.

    사주의 기본적 원리가 (음양)오행이듯 공연은 목-화-토-금-수의 순서로 진행된다. '토(土)-웃다리풍물(별신굿 장구)'에 이르러 진귀한 풍경이 나타난다. 두 개의 출입구, 입(언어)과 귀(내면)의 두 구멍이 연 초입 이후 본론은 매우 거대하다. 어두운 무대는 햇빛을 거두고 사막 같은 공간을 만든다. 싸 하고 밀려오는, 두 개의 다른 세계가 왼쪽[김복만(꽹과리), 박은하(징)]과 오른쪽[원일(북), 김정희(장구)]의 두 연주 그룹으로 나뉜 사물놀이에서 유래한다. 하나가 끌어주고 하나가 뒤따른다. 그렇지만 이는 시간적 선후일 뿐 공간은 두 개로 극명히 분간된다. 뒤따르는 쪽 역시 비켜나며 자신의 길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밀고 가는 것과 밀려오는 것이 명확하게 하늘과 땅의 높낮이로 구별된다. 관객의 땀과 신음이 땅에서부터 일어나며 공간에 섞여 들었다. 뒤늦게 당도하는 것이 바닥을 훑는다면 미리 앞서 나가 있는 것이 부상하고 흔적으로 아련하여 곧 두 개의 시간과 지리가 생겨난다. 두 개의 레이어에 대한 복층적 체험은 따라서 늘 현재형이며 또한 뒤늦은 인식의 결과물이다. 

    '금(金)-영(靈)신(神)금(金)굿'은 악기로 변모하는 방짜의 주조 과정을 담은 영상과 방짜를 무대에 가져다 놓는 과정 중에 만들어진다. 만들어지는 것을 위한 연주, 만들어지기 전의 것들(잠재태)을 듣는 것, 또는 그것들을 재주조하는 연주는, 소리(연주)가 맺히는 반영의 사물이라는 방짜와 함께 진동한다. 곧 시청각적 맞물림이 이중으로 서로를 복속한다.

    마지막 '수(水)-꽃상여·천도재(遷度齋)'에서는 김용배가 창단한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사물놀이팀의 초창기 멤버로 설장구가 장기인 박은하의 춤이 생명이다. 이는 현재를 위해 연습되었다기보다 현재에 과거의 멋과 흥이 되살아 난 춤에 가깝다. 추모의 무거움으로 빈자리를 애무하는 대신 망자와의 지난 시기의 흥겨움이 펼쳐져 어떤 구김도 없다고 해야 할까. 박은하는 너무 천진난만했고 그 춤은 감동적이었는데 이는 반드시 춤이어야 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일회적이어야 했다 아니 영원이어야 했다. 아니 사라져야 했다. 이것은 서구적 개념의 안무(의 기원)의 대립적/부정적 기표의 의미로 포획되지 않는다. 그 안무의 이상향적 구현이라 할까. 그보다 그저 어떤 시간의 물결을 일으키는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서 '춤'은 두 개의 주체(안무가와 퍼포머) 또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 짓지 않는 일이다. 굳이 이렇게 비교와 차이를 갖는 것도 이상할 정도인 어떤 춤의 현현.

    앙코르 무대는 웃다리 풍물 중 '짝쇠'로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된 박수를 보내는 관객에게 같이 일어서 춤출 것을 종용하는 원일 감독의 멘트 이후 성사됐다.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여백의 시간에서 신이란 게 났다. 연주되지 않지만 연주되고 있는 어떤 시간, 함께 그 흥을 즐기고 바라는 어떤 시간을 원일 감독은 장구채를 허공에서 치며 만들어냈다. 진짜 흥이 나고 있었다. 이 정도 판이면 김용배에 대한 제의로서는 충분하지 않을까. 김용배의 사주에서 보이듯, 예술적 혼(丁火)을 꽹과리 곧 쇠(庚金)로 적당히 피운 것 아닌가. 모두가 금속음에 녹아나고 그 사이가 되고 뜨겁게 달구어진 판 위에 있는 시간이 성사된 것 아닌가 싶은 감동이 큰 무대였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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