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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진엽 개인전 <춤 그녀 미치다>: 정면을 마주하며, 감각을 의식하기
    REVIEW/Dance 2015. 1. 5. 14:13


    ▲ 차진엽 개인전 <춤 그녀 미치다> ⓒKIMWOLF (이하 상동)


    한국 춤계에서의 인지도나 나이 측면에서나 여러모로 어떤 현재적 지표가 될 만한 점에서, 그리고 독자적인 안무가-무용수로서의 입지를 시험·시현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차진엽의 공연은 춤계에서 무엇보다 이목이 집중됐다고 보인다. 5시 평일(수요일) 공연에서도 관객석은 80퍼센트 이상 찼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나 명확했고 단단했다. 여러 아이디어와 무대의 짜임을 시험했고, 하나의 춤의 결로 소급되는 움직임을 구축하려 했고, 내용/서사 면에서도 완결성을 갖추려 했다. 시간도 길지 않았고, 각 신들은 모두 정확한 이유를 갖고, 명확하게 감각되는 움직임들로 짜였다. 또한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자기 목소리로써-처음 인사말부터- 기입하는 연출은 개인전이라는 공연 특성상, 곧 차진엽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음에도 그 감정과 움직임을 극 바깥, 차진엽의 속살에 닿는 친밀함을 가져가면서도 극적인 부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식으로, 극의 완성도를 거의 훼손 않는 연출로 적절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튀지 않게 영리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흠집이 없었다는 식의 생각들을 갖게 할 만했다. 그러니까 소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굉장히 똑똑하게 스타일리시했다.) 


    차진엽은 어둠 속에서 무대의 전등이 흔들리고 다리를 하나의 축으로 고정시켜 전등의 진동이 빛과 어둠의 전체적 진동의 흔들리는 시지각으로 이전되는 것과 맞물려 커다란 힘을 그 안에 예비시켜 놓는다. 곧 흔들리지 않는 중심으로서의 몸. 어둠이 밝아지며 또 하나의 붉은 계열의 빛으로 몸이 드러난다. 두 팔을 양쪽으로 뻗어 수평축과 수직축을 직교시켜 상체를 놀려 기계체조를 하는 여전사 느낌을 준다. 동시에 유동하는 공간 판에 고정된 채 단단한 어둠 가운데 흔들리는 빛으로 명멸한다. 



    이 신체는 앞으로 기울여 어둠 가운데 튀어 나오며 그것과 함께 타오르는 듯한 위태로운 이미지이기도 해서 시각을 그것과 맞출 수 없어(관객과 대면하기보다는 그 어둠을 뚫고 어둠에서 빛으로 새기는 움직임에 차진엽은 진력한다.) 비인간non-human의 이미지-가령 사이보그 같은-도 주는데 물론 의도(?)된 것이다. 곧 차진엽은 이 무대와 신체의 완벽한 힘의 긴장과 물리적 기울기를 고려하며 그것을 감각케 하려는 것이다. 


    이 시작은 전초전으로, 전체적으로 왜곡된 시각장으로 다가오는 이동형 무대 패널의 이동에 따른 수축, 전도, 기울임 등과 표현의 달라짐의 기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곧 공간 전체의 이동과 신체의 다른 짜임, 한편 꼿꼿한 이 춤은 움직임의 잠재된 힘을 체감케 하고, 반복된 동작들의 명확한 시각적 리듬을 주는 감각들로 이뤄진 안무에 대한 단서 역시 제시하는데, 곧 일정하게 움직이며 호흡을 조절하고, 버리지 않으면서 ‘벼’리는 움직임을 추측케 하는 것이다. 


    사실 어둠 속에서 무대 이동 중에 몰아쉬는 숨들은, 격렬하게 자신의 움직임에 빠지지 않는 몸짓들의 연장선상에서, 더 자신을 소진하는 ‘진정성’을 느끼게 하려는 것의 측면보다는, 그녀가 자신의 신체를 고르게 가져가기 위한 신중한 배려의 측면과 함께 또 현재에 맞는 안무를 고안해 가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려는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자연스럽게 읽히는 바가 컸는데, 모든 동작은 그런 점에서 어떤 차진엽의 몸짓을 구축하는 데 있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해 가려는 도 다른 몸부림이기도 해 보였다. 그러니까 춤의 모색과 구축, 무대의 변전과 그와 맞물림은 형태/움직임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거기서 드러나는 ‘그녀’의 진정성을 도한 조감하고 있었고, 이는 한편으로도 다양한 면의, 춤 내용적으로, 차진엽 그 자체로도 겹겹이 드러나는 흥미로운, 또 흥미롭게 하는 그런 무대였다. 


    한편 그녀의 춤이 명확했던 이유는 어떤 ‘지연’delay도 없었다는 점에도, 가령 ‘안무가=무용수’이기에 가능한 그런 측면이었다. 이는 한편으로 무용수가 일종의 안무를 실현하는 안무의 체현적 대상이 아니라, 춤을 새롭게 고안해 내고 현장에서 조절할 수 있는 이점을 최대한 가져갈 수 있는 측면에서 차진엽이 춤의 현장성을 발휘했다는 의미도 된다. 도무지 ‘저 동작을 왜 하나, 도 무슨 생각으로 춤을 추나’ 따위의 생각을 할 수 없이 그녀는 춤추고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또 인식하게 했다. 



    이는 이 무대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했던 ‘정면’의 원칙에 의한 것이기도 한데, 그녀는 관객을 직접 마주하는, 그럼으로써 직접 말 걸고, 춤을 숨기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그녀 스스로가 무대가 되는 처음에 전등 신을 제한다면, 관객의 시선은 그녀의 신체로, 시선으로 체현될 수 있었다. 가령 그녀가 남자 무용수와 어떤 추어올릴 수 없는 자신(차진엽?)의 흔들림을 과거의 기억, 사람에 무게가 실린 현재를 그려낼 때, 둘의 관계에 있어 정면은 성립되지 않고, 다만 차진엽의 시선은 관객이 보는 관객의 시선이 된다. 곧 차진엽을 보기보다 차진엽이 보지 않는 남자의 시선에 직접 동화해 차진엽에 마치 나의 신체에 닿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신을 지탱할 힘을 잃어버린 여자와 그녀를 추어올리는 동작들은 현대 춤에서 내용/동작 면에서 익숙한 것이긴 한데, 차진엽은 그것을 관객과의 대면, 또 관객 자신의 시선을 그녀 바깥 면에서 닿게 하는 방식 속에서 아주 명확하게 그녀 안에 관객을 가둬두는 것이다. 


    그녀가 의식을 잃은 듯 고개를 흔들리며 팔다리를 돌리고 소파에서 거꾸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동작은 처음 공간의 뒤틀림 등의 감각의 연장 차원이기도 하지만, 그 움직임의 운동적 밀도보다 그 침잠되는 순간 자체에 대한 어떤 묘함의 성격에 가깝다. 동시에 차진엽의 몸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장면이자 그녀 춤의 어떤 무늬를 만든다. 그리고 춤을 보는 의식의 지점을 설정한다. 동시에 이 묘함은 처음부터 간주로 끊임없이 반복/재현되며 나오던 나미의 ‘빙글빙글’의 음악이 전체 무대 내용과 합쳐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빙글빙글은 그 춤이 하나의 무늬 구현으로서 비판적 의식, 미친 삶에 대한 문제의식과 상응하지는 않는데, 곧 빙글빙글 도는 삶의 판의 흔들림을 춤이 환유하기는 하지만, 애초 그녀가 말했듯 춤을 추지 않고서는 그 빙글 또는 삶을 이겨낼 수 없다는 데서 춤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식은 어떤 공유된 흥미에 가깝고, 춤의 당위성의 일회적 근거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 춤이 사회 비판, 나아가 그 대안 제시의 춤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불필요하거나 지나치게 가벼워 보이며, 그러한 쉬운 비판의 제시를 춤이 한 것에는 의문이 든다. (개콘의 문제제기의 정도에 가까운 것이다. 여기서 물론 대중과 고급 예술의 분별을 전제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공연은 나미의 빙글빙글의 몸을 현상학적으로 구현하는 무대의 측면에서 적합했다. 한편 그 노래 역시 레트로의 느낌을 많이 주는 건 사실이나, 그 노래를 자신의 옷장에서 꺼내고 결국 그녀 삶에서 자연스레 나온 것이라는 극적 단서를 심어주는 바람에 내용적으로도 차진엽을 지시하는 측면에서도 맞아 떨어졌다. 결과적으로 ‘빙글빙글’은 그녀의 신체를 탈의식화하는 제동 장치이자 주문/워밍업이며 그 와중에도 좌표를 찍으려는 몇몇 움직임, 축 자체가 되는 시작, 격렬하기보다 호흡을 조절하며 안정적으로 움직임을 제어하는 기술 등을 통해 춤의 중심을 잃지 않는 동시에 춤의 발현의 측면을 생동감 있게 가져가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대가 밀려나고 전도되는 광경은 중간에 밝은 조명 아래 드러나기도 하는데, 또는 어둠에서 이뤄지기도 하는데, 이러한 측면은 동시대 무용에서 흔한 전경이기는 하지만, 무대의 사용된 변형 자체가 내용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고 있었기에 이는 의도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대의 이동 또한 그 걸음걸음에 스태프가 아닌 무용수의 어떤 호흡을 얹은 움직임이었고-정확히는 그녀를 보조하던 남자 무용수의 움직임이었다- 딱 한 번 그녀가 온전히 노출하지 않을 때, 단지 변형되어 그녀의 춤과 시공간을 결부시키는 장면에서도 그 이동 자체가 하나의 인격적 움직임을 체현하는 점에서 군더더기가 아니었다. 이런 무대의 시지각적 변화의 짜임은 삶의 단면들을 다르게 가져가는 가운데 그녀 삶의 유동적인 면모, 무용수로서의 삶의 의식들을 구축하고 연장하는 그런 감각들을 가져가게 했다. 


    이번 무대는 1시간 정도의 시간을 차진엽과 함께 뒹굴고, 마주하고, 그녀를 들었던 그런 정신없이 흘러간, 그러나 뚜렷한 감각들로 기억되는 시각적 긴장이었다. 그래서 피로보다는 정신이 없었다는 게 더 가깝다 보인다. 치우침 없이 명확한 이 무대는 어쩌면 그 무대의 변형됨만큼이나 명확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었던 반면, 전체로서의 그 부분들이 다른 무대로 변형·확장되어 감을 미리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향후 가능성을 점쳐보는 차진엽의 현재적 미래의 판이기도 했다. 



    ‘춤 그녀 미치다’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소급해 보면, 일견 ‘춤에 미친 그녀’라는 식으로 춤을 삶에서 제할 수 없는 요소로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빙글빙글 도는 춤의 무의식의 결과 실제 도는 춤의 즉흥 파편들이 갖추는 형태들로 공연에서 나타나며 구현되고, 그 가운데 피아노 스타카토와 맞물려 빙글빙글 돌면서 정면의 좌표를 찍으려는 노력을 통해 관객을 정면으로 대면하는 자신감/용기를 보이는 점에서, 춤에 미치려는/닿으려는 노력/의지 그 자체를 현상한다고 보인다. 곧 이 제목은, 춤과 그녀와의 ‘간극’ 만큼이나 춤이 그녀에게로, 또 그녀가 춤에게로 미치는, 그녀 춤의 시원을 시험해 보고 무늬를 확인해 보려 하는 것을 꽤 적확하게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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