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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탁, 연극 <성북동갈매기>: '연극과 현실의 경계에 대한 재환기'
    REVIEW/Theater 2013. 8. 16. 03:33


    ▲ 극단 성북동비둘기, 연극 <성북동갈매기>(연출: 김현탁)


    <성북동갈매기>는 기존 원작에 대한 재현 도식과 재현하고 있음의 메타 의식의 재전유 전략이 공존하며 실재와 가상의 경계를 끊임없이 전도하며 지속한다는 것에 유의해서 볼 수밖에 없다(이것은 포스트모던 이후의 연극의 한 대표적인 그리고 성공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을까).


    ‘트레프레프’는 무대 주변부를 어슬렁거리는 ‘니나’라는 짐을 떠안으며 무대 밖에 구질구질하게 정박해 있는가 하면 빈 무대를 두고 와 뜀박질로 그 부재를 오히려 드러내는 방식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강과 일상이라는 원작의 공간 관련한 알레고리는 무대와 (관객과 영역/무대를 공유하는) 무대 밖이라는 좁은 현실로 치환되는 듯싶다. 적어도 사각 프레임의 무대 바깥은 해안이라는 경계는 된다. 강은 이 무대 너머에 있다.


    이들의 ‘내밀한’ 대화가 진행되다 무대에 다른 인물들이 오르자 이 무대에 걸 앉아 곧 관객이 된다. 이 관객이란 곧 제4의 벽을 전제하는, 엄밀히 무대와 현실의 경계 지점에서 무대를 들을(볼) 수 있지만 이는 그 안에서는 보이지 않는 특이한 존재의 양상을 띠게 된다. 한편 이는 이중 텍스트의 기입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무대와 무대 밖의 손쉬운 전도, 나아가 그것을 어느새 허물고 하나의 공유된 현실로 돌아오는 변전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앞선 이 메타 연극적 의식을 치루는 지점은 특히 무대 밖에서 관객의 위치에서 연기하고 무대 안의 관객은 다시 우스꽝스러운 배우의 몫을 연기하는 것 같은 광경에서 그 정점을 찍는다.


     이미 관객이고 연극을 보여줌이라는 전제가 이 안에 공유된 상태에서 연기는 천연덕스럽고 그것을 보는 이의 태도 역시 분명한 연기의 규칙들을 따른다. 예컨대 어떤 관습적인 반응들을 보여야 하며 또 잠깐의 연극 이후에 삶의 더 커다란 영역에서 이들을 대하는 태도를 인지한 상태에서 나의 적절한 반응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며.



    막이 닫힘은 끝이 났다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역할’에 상응하는 이들 관객의 모습이 비가시권이 되며 배우의 시선에서 그들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어떤 역할 모델이, 우리를 기괴하게 비추는 저 연극이 사라진 뒤에 대신 블랙아웃의 실재를 우리가 배우의 입장에서 공유함을 의미한다.


     그 이전에 이미 관객을 연기하는 관객인지 관객을 연기하는 관객에게 연기하고 있음을 선보이는 피사체 같은 배우인지 모를 혼돈이 이 ‘의자’ 라는 불순한 대상과 존재의 침입이 자리하고 있었지 않은가.


    이 막이 닫힘은 그만큼 기이한 것이다. 마치 이 막은 어찌할 수 없는 피동적인 닫힘, 나아가 그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그것을 우리가 행하는 것 같은 환각을 주는 것 같은 것은 정말 착각일 뿐일 것인가.


    동시에 이 막이 열리자 이들은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잉여를 만드는 속임수는 예측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실제적이며 곧 새롭지 않기에 새로운 순간이 주어진 것이다. 동시에 (사후) 해석적으로는 유치한 장난에 직접적으로 당한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하는 가운데 이 극의 메타적인 간극의 시선을 일종의 증거로써 예측 불가능하게 제시한 것 같은 생각을 안긴다.


     한편 이 무대는 조명의 밝음에서 어둠으로 조도를 다르게 하며 빛이 쓰인 무대라는 곳의 환영적 장소/순간, 빛이 사라짐의 실재, 그리고 인물조차 사라지는 완전한 어둠이라는 무의 지점, 한편 ‘붉은 태양’이라는 극의 메타포를 살리며 ‘(아래로) 직립한 조명들의 집합적 시선’으로 기괴한 풍경의 몽타주를 형성한다.



     이 경계의 지점은 가령 휠체어를 탄 소린이 무대로 오르는 지점에서 아르까지나가 올리려고 안간힘을 쓰지만(실은 올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고 또 이미 포기된 행동으로 보이지만) 걸려서 올릴 수 없는 지점에서 이 무대와 무대 밖의 경계는 실제적으로 드러나고 또 휠체어는 온전히 일어날 수 없음의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극 중에서 가장 명확한 증거인 동시에 이 행위들의 무용함 나아가 연극 자체의 무용함에서 출발하는 유희적 측면을 갖는 계열체라는 점을 가리킨다(결국 원작의 재현이라는 점, 원작과 시차를 벌리며 원작을 의식적으로 변용한다는 점). 


    또한 이 멈춰 있음의 ‘순간의 실재’, 정확히 문턱에서 걸쳐 있게 되는, 오르지도 내려가지도 않는 균형의 상태에서의 시간이 흐르고 있음이라는 무의 실재를 선사하는 점에 유의할 수밖에 없다. 이는 최근작인 <혈맥>에서 라면을 들고 있는 시간을 실제적으로 잉여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상응한다.


    한편 무대와 무대 밖의 가상과 리얼의 구분은 무대 밖 마이크의 유무와도 긴밀히 상응한다. 무대에서 배우는 연기를 연습하고 무대 밖 마이크를 잡은 그 역할을 또 배우를 꿈꾸는 순간 립싱크하는 배우로 그것을 드러낸다. 이 무대라는 가상의 이면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배우와 그 말투에 중독되어 버린 또 다른 목소리 없는 배우에게서 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곧 무대를 보지 않고) 무대 밖을 보는가, 아님 무대 밖이 또 하나의 그것을 따라하는 가상임을 보며 그 목소리를 빼앗는 무대 밖 대신 다시 무대를 선택하는가.


    이 기묘한 욕망의 모호한 변주는 또 다른 혼란에 빠뜨린다. 



    갈매기가 아닌 니나가 트레프레프를 탄 것처럼 말이란 동물은 마치 이 무대 바깥의 너머에 묘연한 희망처럼 오히려 갈매기를 대신해 그것을 치환해 등장하는 듯싶다. 이 말은 실은 우리말에 이르러서야 성립하는 장단음(발음)으로 구별되는 ‘외관상’ 같은 단어로써 전반에 포진해 있는 셈이다. 이 장음의 말(언어)과 단음의 말(동물)이 어느 순간 모호하게 의미로 파악되는 순간이 이 동물 말과 극의 절합인 셈이다.


     “1분간 휴식”이라는 규칙을 연극 내부에서 알리며 메타적으로 (관객이) 연극을 전유하게끔 한다. 이어 선풍기에 대고 말하며 바닷바람을 환유하며 이 좁은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동시에 ‘침묵의 외침’으로 자연과 합치되는 이들 존재의 미약함과 운명에의 예속, 그리고 자연에서의 자유로움 등이 뒤섞이게 된다.


     ‘글을 쓰고 있는 자’는 ‘절실히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자’이다. 곧 무대 바깥에서만 발화하는 무대를 가상으로 바꾸는 또한 (배우로는) 설 수 없는(극에서는 배우만이 현존한다) 무대에서 그는 진정 무대와 무대 밖(관객)을 매개하는 입장의, 가상이 아닌 배우가 되는 한편, 이 극(너머의 삶)을 쓰(려)는 그래서 불가능성의 경계에서 일종의 작가로서 또한 무대 밖 배우로서 무대를 마주치며, 또는 이중의 텍스트의 긴장에서 배우와 작가의 간극에서 출현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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