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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크라이 마미> : 청소년 성 범죄, 엄중 처벌이 능사인가?
    카테고리 없음 2012. 11. 26. 15:06

    처벌의 유무는 근본적 해결책 아니다!

    암울한 현실 반영의 결말?

    <돈 크라이 마미> 보도스틸 [사진 제공=데이지엔터테인먼트] (이하 상동)

    <돈 크라이 마미>의 마지막은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영화의 짜임이나 형식을 떠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며 시작한 영화가 내세우는 마지막은 청소년 성 범죄율의 통계치란 디스토피아적 현실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가 마지막 현재의 고문 피해자들로 엔딩 타이틀을 채우며 현재 해결되지 않은, 지속되는 과거로서의 현실 참여를 요청하는 것과 비교해, <돈 크라이 마미>는 해결할 길 없이 확대된 성 범죄의 기사 스크랩을 블랙아웃의 화면에 자막으로 채워 넣는 가운데 대안 없는 암울한 현실에 대한 인식을 종용한다.

    이미 ‘딸을 잃어버린 애끓는 모정의 복수 드라마’라는 식의 콘셉트에 의하면 이 영화의 내용은 대강 다 드러나 있다. 여기에 얼마만큼 영화의 아니 우리의 현실이 끔찍한지를 보여주는지, 또 거기서 배우들의 연기가 절절하게 드러나는지가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 관건이 될 것이다.

    장르 영화의 혼종적 섞임

    <돈 크라이 마미>는 현실을 비추는 극히 리얼리즘에 가까운 영화라고 생각되기 쉽지만, 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무거운 계몽영화라 생각되지만, <돈 크라이 마미>는 기실 여러 장르적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장르 영화에 가깝고 그로 인해 재미를 획득한다.

    무엇보다 극한 설정에서의 연기는 모녀 관계로 분하는 유선과 남보라라는 배우 모두의 극대치의 연기를 가능케 한다.

    딸(은아)과 엄마(유림)의 평화로운 나날은 재앙 영화의 전주곡을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고, 순진한 딸이 유린당하는 장면은 제멋대로 돌아가는 카메라 워킹을 보여주는 공포 영화의 클리셰가 묻어난다. 딸을 잃은 어머니의 딸을 회상하는 신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헤어 나오지 못하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닮아 있다.

    여기에 기존의 법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현실 속 사투는 법정드라마라는 장르를, 그리고 법의 테두리를 드디어 벗어나게 되고 폭력으로 나아감은 서부 영화의 악당을 처단하는 것과 닮았다.

    관객의 시선으로 전이되는 어머니의 시선

    이 여러 장르적 혼합을 통한 다이나믹한 영화 전개는 매끄러운 이야기 흐름보다 사건의 접합들을 통해 속도를 내는 것에 가깝다. 또한 이는 한 보통 어머니에게 불어 닥치는 갖가지 끔찍한 일상의 사건과 그녀의 극적 변화에 이 영화가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어머니가 마주치는 끔찍하고 거기에 비정하기까지 한 현실에서 겪는 공황 상태를 마주하게 된다.

    청소년 성 범죄자들은 엄격한 법적 처벌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 그들에게서 잘못을 뉘우치게 할, 그리고 멈추게 할 어떤 도덕적·법적 장치도 부재하다는 것, 단지 자신의 딸을 잘못 관리한 못난 어머니의 책임으로 모든 게 돌아간다는 것은 끔찍하게 관객에게 전이된다.

    사유할 수 없는 악의 경계

    경찰서에서 그녀의 딸에게 몹쓸 짓을 한 학생들이 그녀가 씩씩대고 오는 것을 보면서도 움츠리며 자숙하는 태도 대신 ‘네가 뭔데?’라는 식으로, 일말의 뉘우침이나 어른에 대한 공경이나 예의가 없는 것을 보며 관객은 분노하게 된다.

    여기서 악은 비인간의 전형이 된다. 절대 악으로 도무지 교감할 수 없는 존재자들이 된다. 그렇다면 이들을 저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법은 단지 계도나 윤리적 측면에서의 반성이 아닌 성범죄자들에게 전자 팔찌를 치우는 것과 같은 강제적인 장치로서만 비로소 유의미하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법은 더 이상 윤리적인 측면의 범주와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내용과는 별개로 이미 공동체 사회의 기반을 잃어버린 우리 현실에 대한 숙고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곧 현재의 사회에서 개인은 커다란 사회의 구성원이자 공동체의 일원이 아닌 개체화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는 가령 자신의 부모가 있듯 어른이 이야기할 때 자신의 부모를 가정하며 그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가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드라마 속에서 이러한 사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전형적으로 다뤄졌다. 가령 놀이터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을 저지하자 ‘당신이 뭔데?’라는 식으로 반항하는 장면들.

    모두가 동등한 세계, 상호 이해의 윤리관의 필요성

    이러한 단순히 세대 간의 갈등으로 치부할 수 없는 사회 현상들은 더 이상 공동체 안에 담긴 권위주의적인 측면에서 성립하는 도덕은 받아들여지기 힘든 세계를 가리킨다.

    당장 영화 속 끔찍한 현실에 제동장치를 걸기 위해 청소년 성범죄자들을 다루는 법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사회의 직접적 관계 맺음이 단자화된 사회의 추상적 관계 맺음으로 바뀌는 현 사회에서 어떻게 우리는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유대관계를 가져갈 수 있냐의 문제다.

    우리가 청소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또 소통하느냐의 문제는 일방적인 방향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동시에 청소년과 어른을 나누는 것에서도 해결될 수 없다. 모두가 동등하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동시에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나 악이 자행되지 않는 새로운 윤리의 재발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돈 크라이 마미>를 보며 막막한 현실에 대한 나름의 대안을 도출해 본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이 영화의 대안 없는 창구에 대한 관개의 능동적 수용 자세가 아닐까 한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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