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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기웅 연출, <랭귀지 아카이브>: 언어가 구획하는 사랑의 이름들
    REVIEW/Theater 2017. 12. 23. 00:25

    ▲ <랭귀지 아카이브>(성기웅 연출, 줄리아 조 작, 마정화 번역/드라마투르그)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이윤재, 안다정 [사진 제공=K아트플래닛](이하 상동)

    사라지는 언어를 아카이브 하고자 하는 언어학자 조지(이윤재)와 그를 곧 떠나려는 마리(전수지)의 사랑, 인류의 사라지는 언어인 엘로웨이어를 쓰는 단 두 명, 노부부 레스텐(박상종)과 알타(백현주)의 사랑, 그리고 엠마(안다정)의 조지에 대한 짝사랑, 언어와 사랑이 교착되는 지점을 그리는 듯한 작품은, 처음과 끝에 서사극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관객을 접속시킨다. 막이 오르면, 조지는 혼잣말로 화자가 되어 대사를 전달하며 제4의 벽 바깥에 있는 관객을 가상의 관객으로 상정한다. 조지는 보이지 않는 지문의 내레이션과 대화를 서로 주고받듯 무대에 있으면서 내레이션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커튼콜에서는 레스텐과 알타의 영원한 사랑, 곧 사랑으로 종결되는 삶 자체를 화자로서 전달하며 극을 하나의 이야기로 전환하고 커튼 너머로 흡수시켜 버린다. 곧 성기웅 연출은 “희곡의 특성을 살리고 ‘서사극’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지문의 일부를 말하는 방식으로 연출”하고 나아가 언어가 지탱하는 세계의 문제, 사랑 자체를 발화하는 언어라는 중핵의 문제라는 줄리아 조의 원작에 관객을 직접 향한 언어, 극과의 거리를 가리키는 언어를 제3의 언어로 더한다.

    ▲ <랭귀지 아카이브>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안다정, 백현주

    원작이 다루는 ‘세계를 뒷받침하는 언어’는 인류 공통의 언어인 에스페란토어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배우는 엠마를 비롯해 에스페란토어를 창시한 자멘호프 박사로 분한 박상종 배우가 직접 관객에게 에스페란토어를 가르치는 시간이 있기도 한데, 거꾸로 우리가 쓰는 언어는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쓰며 세계를 인식하는 틀이라면, 에스페란토어는 이미 각자의 틀을 갖고 있는 전 인류의 공통된 세계를, 바깥을 만들고자 하는 사랑의 이념형이자 이데아적 언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이러한 실험은 실패로 끝났고, 이러한 의지는 엠마가 조지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한 ‘사랑합니다.’의 에스페란토어가 여러 언어에 능통한 그에게만 작동될 수 있음으로 전유된다.

    결정적으로 사랑의 언어는 노부부를 제하고는 모두에게 전달되지도 전달될 수도 없다. 애초에 떠나려던 마리가 필요로 한 말을 결국 하지 못한, 이미 효력을 잃어버린 말을 찾으려던 조지, 마리를 붙잡기 위한 말을 임시방편으로 건네려는 조지를 보내며 말을 삼키는 엠마, 그런 엠마로부터 어떤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빵집을 연 마리로부터 거절당하는 조지의 모습들에서 사랑은 계속 미끄러진다. 조지의 사랑(의 언어)이 이미 지나가버렸다면, 엠마의 사랑(의 언어)은 한 번도 오지 않은 것이다.

    ▲ <랭귀지 아카이브>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전수지, 이윤재

    사실 한 번도 조지는 마리의 언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둘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삶보다 늦게 도달하는 사랑의 언어를 구사하는 건 레스텐과 알타로 보인다. 그들은 평생 치고받고 싸우기만 하는 걸로 보이지만, 그들의 진정한 언어는 그 둘에게만 공유된다. 한편으로 그들의 언어는 유일한 공동체를 구성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죽음은 그러한 공동체의 세계가 종결됨을 의미한다. 언어는 존재이자 세계가 되는 이 둘의 언어는 우스꽝스럽게도 엉터리 국어처럼 드러난다(한편으로 주문과 같이 신비로운 그들의 세계를 드러내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그러니까 영어를 아는 그들이 아니고서는 번역될 수 없는 언어를 번역할 수 없는 역설은 인식 가능한 언어로 구성되는 연극에서 파편적인 인식의 근거를 뒤섞어 놓는 것으로 나타난다.

    ▲ <랭귀지 아카이브> 공연 장면, (사진 좌측부터) 배우 박상종, 이윤재, 백현주

    영원한 사랑, 죽음과 함께 종결하는 사랑을 드는 작품은, 조지가 마리가 적어서 여기 저기 숨겨 놓았다고 생각했던 쪽지들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정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던 것일까. 언어는 시간의 효력을 상실하며 사라진다는 신비로운 역설은, 언어는 사랑의 일부가 아니라 사랑의 중핵이며(조지와 엠마의 늦었거나 늦는 언어와 같이, 나아가 언어의 죽음과 함께 사랑의 죽음을 맞는 노부부의 삶과 같이), 사랑을 유일하게 성립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의미하는 듯 보인다. ‘언어에 대한 보존’이라는 제목은 실제 두 존재의 공통분모로만 의미를 갖는 사랑의 언어에서 의미가 상실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 <랭귀지 아카이브> 포스터, (사진 좌측부터) 배우 박상종, 전수지, 이윤재, 안다정. 백현주

    [공연개요]

    ㅇ 공연기간 : 2017.12 . 1(금)~ 17(일)
    평일 8시 / 토 3시, 7시, 일 3시(월 쉼)
    ㅇ 공연장소 : 예술공간 서울 
    ㅇ 러닝타임 : 110분
    ㅇ 제작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ㅇ 기획 : K아트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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