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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정석 <베이포-X와 홈비디오>: 손을 내미는 거리로부터의 윤리적 연대
    REVIEW/Visual arts 2014. 12. 19. 16:58

    흘러간 시간들의 부상


    ▲ 강정석, Simulating Surface B(2014) [사진 제공=인사미술공간]


    되는 대로 찍힌 영상은 전시로 구성하는 과정에서, 작가의 편집적 재구성의 역학을 거친다기보다 관객에게 ‘내맡겨짐’으로 현상되는 듯하다. 몇몇의 홈비디오들은 카메라와의 거리를 인식·측정하기 어려운데, 작가의 시선을 대변·투영하기보다 작가의 손에 들려 그로부터 시선이 딸려 들어가는 것처럼 감각된다. 곧 <2013. 8. 25 ~ 2014. 8. 25>에서 비디오의 시선은 엄밀히 목소리를 내는 주체(적 대상)를 향하지 않고 거리를 향하는데, 이 실제의 시선은 ‘안’에 있는 셈이다. 찍는 자와 찍힘을 당하는 이 사이의 경계가 거의 사라져 성립하는 어떤 경계 없음의 상태를 함의한다. 여기서 한층 중요한 건 찍히는 자의 경계가 풀어졌다는 데 그치지 않고, 찍는 자 역시 그 찍는 행위에 대한 별다른 의식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곧 너와 나의 공통의 장이 이 비디오 안에 기록되는 셈이다. 그래서 바깥을 향하지 않고, 안으로 굽어지는 시선은 ‘타자’를 찍는 대신 그로부터 투영되는 나를 무의식적으로 찍(고 조각하)는 결과를 낳는 듯 보인다. 


    <Simulation Surface A>에서 그가 지하철에서 창가(로 찍다 작가)를 찍는 사이에서 발견하는 작가의 모습은 작가의 ‘자기 지시적 낙관’의 주장이 아니다. 어떤 의지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흔적으로 투사되는 것에 가까운데, 작가는 카메라를 거울과 자신을 경계 짓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나아가, 찍고 있는 풍경에 자신을 투과시키며 매우 투명하게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무엇을 표현하고 호소한다기보다 이 흘러감 속에 흘러감 그 자체가 되는 텅 빔의 상태에 매몰돼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의 광경, 텅 빈 자기-투영적 시선의 풍경들은 그저 그때의 시간으로 남는다. 그 많은 시간들의 일부는 잉여 그 자체로서 그것이 유효한 것이 되는 듯 보인다. 곧 ‘응답하라’ 시리즈가 시대를 재현하며 현전의 효과(와 그 반사 이익)를 냈다면, 이러한 홈비디오들은 그 시간 자체의 되돌아옴에 가깝다. 곧 재현 될 수 없음을 재현하는 대신 상영하는 것이다. 


    ‘되돌아옴=잉여’의 유비는 망각의 자리들이 기억의 자리를 차지함을 의미하며 현재의 의도가 목적성을 띠며 그것이 재구성·반복될 수 없음을 또한 의미한다. 그것을 만들며 부여한 기록의 의미는 망각의 아가리 안에서 현전의 순간으로 다시 기워질 때 의미를 얻는 셈이다(하지만 그것을 트는 것 자체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목적이라면 어쩔 텐가-여기에 이 전시를 보는 어떤 난항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되돌아옴은 되돌림과 (다시) 펼침의 행위에서 작가의 현재의 시점(과 편집점)이 발생할 것이지만, 이는 과거와 현재 두 시간의 이음매를 지우고 온전히 메우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확인하고 그것이 현재로 기이하게 발생하는 순간을 가져오는 데 주력하는 듯 보인다. 그래서 이는 ‘응답’을 요구하진 않지만, 의미화될 수 없는 ‘실재’로 ‘귀환’하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이 지난 기억들의 상기는 망각에 대한 부채를 탕감하는, 현재화하는 추억 행위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연대의 현상학’


    ▲ 강정석거울연습 [사진 제공=인사미술공간]


    강정석 작가는 타자로서의 대상을 찍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곁을 찍는다. 주변의 동료, 친구들에 말을 거는 방식으로 그들을 안으로부터 담고 또는 그들에게 카메라를 직접 맡기기도 한다. <Simulation Surface A>에서 친구의 아침 출근을 매번 배웅하며 가는 모습을 계속 찍는 것은 친구와의 약속과 모종의 연대가 전제되어 있고, 이 연대로부터 누군가의 일상에 비개입하며 관찰할 동기를 얻는다. 이러한 연대는 <나와의 약속 보기>나 <Simulation Surface A>에서 아는 사람(?)에게 카메라를 아예 맡겨 그 ‘나’를 타자의 이름으로 바꿔 나의 범위를 확장하는데, <Simulation Surface A>에서 작가적 날인을 새기려는 의도가 없었던 것처럼 그 비디오는 대체 가능한 작가의 (비-)지위로부터 내밀한 개인의 일상과 내면/목소리로, 담고 만질 수 있는 누군가의 일상으로 확장된다. 물론 작가와의 약속이 그 위에 전제돼 있다, 암묵적 규약으로만. 그리고 ‘찍어야겠다’는 어떤 강제된 의식으로 기록에 대한 ( ‘무의미성’을 담지하는 일상들 또는 어떤 의미로 확정할 수 없는 일상 그 자체에 대한) 성찰을 끌어낸다. 


    ▲ 강정석<수경과의 거울연습> [사진 제공=인사미술공간]


    이 전시는 ‘홈비디오’란 매체 자체에 대한 성찰과는 거리가 있는데, 이런 연대로부터의 자아-확장과 일상의 채집들의 일상적 행위는 찍고 있음, 그 안에 있음 자체의 의미를 뛰어넘기 힘들어 보이기 때문이다. 전체 작품들을 관통하는 커다란 시각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양상에 가깝다. <Simulation Surface B>를 보면 작가는 <Simulation Surface A>가 친구의 뒷모습과 인사하는 모습을 찍은 것(이 틀린 건 아니지만) 대신 친구의 손을 찍었다고 한다. 말을 건네듯 그들의 흔적을 좇았다고 주장한다. 곧 손이 자신에게 현상됨을 찍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수경과의 거울연습>은 일견 거울의 무의식에의 반영과 반사하며 그 자체로 찍히지 않는 거울의 매질을 보여주는 것에서 그치는 대신, 또는 조각난 자아들, 자아의 상관물로서 거울의 조각이라는 정신분석학적 해석으로 갈음되기보다, 하나로 시각화되지 않는 목표 없는 반영의 시각에 그치지 않고, 몸에 거추장스런 장식들을 달고 움직이는 것 자체의 연습이며, 그 연습의 과정과 변화 양상이 곧 더딘 안무의 어떤 연습 과정, 그 변이되는 몸의 현상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2013. 8. 25 ~ 2014. 8. 25>는 쓰러진 할아버지(?)를 발견한 친구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결과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것에 대해, 초지일관 그 친구들에게 ‘나는 (그 할아버지를 비롯해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는 친구에게, 그들이 행한 행위가 윤리적인 것에서 나오는 게 아닌 어쩔 수 없었던 것이라고 온갖 항변을 늘어놓는, 그야말로 시비와 화해의 방향을 향해 다투는 친구들의 진지한 (하지만 그래서) 꽤나 웃긴 영상인데, 윤리적 판단·사고가 아니었음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온갖 이유를 대보지만 꽤 무색한 답변이 될 뿐이다. 곧 거기 사람이 있었기에 그것을 지나칠 수 없었다는 것은 강정석의 홈비디오가 존재하는 자기 근거에 정확히 부합한다. 


    한편 연대는 애초 타자의 경계를 지우는 듯하지만, 실은 나의 경계(가 없는 상태에서 그 경계)를 확인시켜주는 바로, 또 내가 존재하고 나 역시 그 안에 포함되는 지점들로 자리하는 것이다. 이러한 찍기의 관계를 있는 연대 또는 그 약속의 전제는 <2013. 8. 25 ~ 2014. 8. 25>에 이르러 카메라 없는(비추지 않는) 것에 이르는데, 카메라는 거울을 들고 세상의 스쳐가는 이미지들이 그 안에 담김을 또 거울을 들고 무언가 행위하는 이를 찍을 뿐이다. 이러한 목소리와 시각의 이질적 절합의 몽타주는 실상 충돌에 근거하기보다 편집점 없는 불가역적 시간의 흘러감 속에 무화된다. 뭐 하나 조작되지 않는 일상의 현상들의 다르지만은 않은 구경의 잉여로 흘러갈 뿐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각과 목소리의 분절/단절은 작가의 어떤 주요한 문법, 그리고 찍는 행위에서의 편집점인데, 시각을 풍경 안에 내맡겨짐 속에 작가는 말을 하지 않으며 침묵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Simulation Surface A>와 <나와의 약속 보기>의 풍경을 찍는 장면에서 이어지는 듯 보이는데, <Simulation Surface A>의 경우 말의 자리가 원래 비어져 있기보다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대화할 이가 없기에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나와의 약속>에서 강 풍경은 또 다른 나의 풍경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를 기입한다. 그리고 그것은 기입되기보다 공허하게 자신에게 반환된다. 찍는 것과 말하는 것은 엄격히 구분돼 있고 어쩌면 손은 바깥을 보고 있되, 눈은 자신을 향하는 것과 같다. 비로소 풍경은 내면에 외삽된다(또는 그 반대다). 


    ▲ 강정석<밤과 음악[사진 제공=인사미술공간]


    지하 1층에서의 <밤과 음악>는 무도회장에서 친구들과 노는 광경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데, 반딧불처럼 깜빡이고 어우러지는 파편적으로 쪼개지며 포착되는 빛-움직임들과 초점화되지 않는 음성들과 시끄러운 배경 음악으로 이뤄진 바닥-스크린에 상연되는 영상으로, 지하 1층을 홀로 채우고 있다. 텅 빈 무도회장의 열기, 기억들이 환영처럼 전시장에 재생되는 형국이다. 이번 전시는 결국 작가의 곁에 있는 사람과 풍경으로 시선을 이전해 카메라로 지속적인 축적을 하는 가운데, 주로 손 안에 쥐어진 휴대폰으로 그 모습을 담아냈다. 손의 비디오가 시선인 한편, 닿을 것 같은 친구의 손과 팔이 그 만큼의 거리와 감촉으로 현상되는 어떤 이야기들의 서사이다. 그래서 결국 <2013. 8. 25 ~ 2014. 8. 25>의 영상과 같이 아무 이유도 없는 한 친구의 공허에 끊임없이 이유 없이 연대함의 윤리적 과제가 이 모든 이유 없음의 작품의 어떤 공고한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내재적 윤리에 입각함은 이것이,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손을 뻗쳤던 것(카메라를 들이대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을 설명하지 못했던 것에서 설명되며 그러한 차원의 현상학적 존재의 연대들로부터 성립하는 자기의 (무)근거를 성립시키는 것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남는 ‘관심 없음’의 텅 빈, 목적의식 없는 세대의 보이지 않는 신체는 다시 거울의 빈 풍경과 자아와 ‘연대’해 이 전시를 세대의 이름으로 근거 지으며 전시의 또 다른 존재 근거를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전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잉여로서의 매체 기술


    ▲ 강정석<Simulation Surface B> [사진 제공=인사미술공간]


    마지막으로, 내용적 측면이 아닌 매체적 측면에서, 인터넷의 곁가지 광고들의 하이퍼링크 같이 그것을 전유하여 실제 화면에 부착되는 그래픽 도상들을 잉여로 띄우는 방식은 우리가 보는 인터넷 화면들을 보는 것과 같이 느끼도록 편집점을 가져가는 부분이다. <Simulation Surface A>의 경우에 연보랏빛 화면으로 친구와의 만남 이후 화면 전환에서 바뀜은 이것이 시뮬레이팅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물론 열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쿨러가 돌아가는 잠재된 물리 현상의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Simulation Surface B>에서는 본 게임 전의 코인을 넣기 전 게임 준비 영상의 분위기를 체현한다. 기괴한 3D 모델링 도상들과 파편들이 떠돌아다닌다. 잉여의 이미지들-주석들은 세상에 대한 풍자의 행위보다 그 구조의 흉내·모방의 유지·편집의 어떤 ‘짓’에 가깝다. 그리고 물론 이는 매체를 다루는 세대의 전략(기술)으로 수렴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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