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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립창극단 <메디아>: 복수의 비극적 주체의 탄생
    REVIEW/Theater 2013. 5. 29. 09:50

    코러스: 서술의 형식



    야광 빛으로 덮인 암석의 표면을 확대한 영상에 호롱불을 들고 언덕을 올라 그 주변을 포위하며 오는 코러스의 노래는 단조와 같이 핀트를 벗어난 듯한 음조의 곧은 직선으로 퍼져 나간다.


     “이게 무슨 소리”, 등장인물의 물음에 코러스는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음성으로 내레이션을 부여한다. 이와 같은 ‘서술’의 측면은 이 작품이 일종의 극적 층위에 메타 양식이 덧붙여 있음을 의미한다. 


    왜 신음이 아닌 “신음 소리”라는 명확한 기표의 직접적인 지정으로 내세우는 것일까. 왜 이리 작품은 친절한 것일까. 이는 서구 극을 우리의 것으로 구현하기 위함이다. 곧 ‘이야기의 시작’을 지정하는데, 이것 자체가 하나의 사실 그 자체의 현시가 아닌 ‘몰입 가능한 이야기’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대사의 전달은 매우 명확하고 무대는 온전히 그 질감과 형태를 드러낸다. 이 ‘명확성’의 지표들의 합산은 뚜렷한 우리만의 이야기 양식인 셈이다.


     이 당당한 코러스가 첫 무대로 등장할 때 주변에서 비로소 벗어나서 무대를 점유할 때는 흰 옷의 도창장의 인도 아래 굳건한 신체의 조직들로 드러났을 때인데, 이 커다란 파국의 코러스는 무대 전체를 뒤덮고 심지어 주인공의 목소리를 압도하며, ‘연약한 삶의 주인공’을 만드는 효과를 낸다.


     코러스를 따라 노래 속 이야기들이 명확하게 전달된다. 이는 속도감 있고 율동감을 더해 심리의 제시를 예비하며 극에 쉬이 휩쓸러 가게끔 한다.


    멀티미디어는 비가시적인 영토를 가시화한다. 시대의 지형이 뒤바뀌었을 때 푸른 대양을 환유한 태양이 떠오르는 때부터 삼면(세로 기둥x2+가로 지붕 1)까지 번져오며 이 공간 전체를 환유적으로 점유한다.


    성스러움과 더러움 사이



     이아손에게 메디아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는 크레우사의 모습은 꽤나 갑갑한데 불안은 상징적인 것에 대한 강박에서 온다. 곧 미래 자체의 조금의 뒤틀림도 사유하지 않으려 함과 동시에 메디아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것이다.


    메디아는 크레우사의 “‘신성한’ 약혼식을 ‘더럽힌’ 여자”를 표상하게 되는데, 이 신성함과 더러움은 대립되는 어떤 하나의 양가적 측면에 다름 아니다. 너무 혐오스러워 멀리하고자 하는 그만큼 부정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메디아는 이런 성스러움과 더러움을 동시에 가진 언캐니한 기표가 된다.


     그를 제물로 바칠 때에 더러움은 청산되고 신성함은 보존될 것이다. 오직 그녀를 통해서만 이 거미줄의 연쇄가 파생되는 것이다. ‘불길한 기운을 몰고 오는’ 존재로 표상되는 셈인데 메디아에게는 단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소임을 다하고자 하는 것뿐인데 그 책임에 내재적인 소망 자체로만 표상되고 이는 외부에 관철되지 못한다.


     반면 그녀는 끝없는 침범의 위험이 있는 외부성의 기호로 그녀와는 상관없는 의미망에 귀속되는데, 이는 파악 불가능한 미래로 표상되는 현재를 몰아내는 예단적 미래를 의식 없이 수용한 결과다. 


    ‘외설’의 지점



    코러스는 모든 죄의 발단은 남자들에게서 비롯되며 모든 죄의 대가는 거꾸로 여성이 안고 가는 것을 목 놓아 부르짖는데 마치 그들이 모두 여자이기에 이러한 사실의 적시를 하는 당사자가 스스로라는 데서, 동시에 이를 단지 성을 떠나 코러스라는 매개 역할이라는 보편성을 띠는 가운데 이 공고한 질서를 균열 내려는 어떤 ‘외설’의 과잉적 지점으로 보인다.


     마치 여성이라는 한계 자체에 항거하며 또 그 한계에 직면해 부딪치고 있는 메타 언설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로고스 주의의 일방적인 우위와 대표적으로 이아손에게 낙인이 되는, 남편을 위한 시숙부의 살인을 저질렀던 메디아의 과거는 이아손의 배신과 이아손의 크레온 왕의 딸인 크레우사와의 결혼 이후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외설이 되는 지점에서 그녀는 마치 손에 닿지 않은 듯 깨끗하게 죽어야 한다.


     곧 왕국의 이방인 자체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가지 않으려는, 머물러 있으려 하는 메디아의 목소리가 곧 외설임을 드러낸다.



     남녀의 대척적인 지점에서 남성 우위의 일원적 주체와 그 외의 대상의 지배‧피지배 관계는 자신의 아버지 없이 남편 이아손의 빈자리를 어머니로, 아버지가 아닌 상태에서 채우며 이중으로 아버지의 자리를 메디아가 대신하게 됐을 때 어떤 처치 불가능한 잉여의 자리로 남고, 이것을 허락할 자리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없는 것이다.


     현재는 곧 메디아는 비극을 몰고 오는 직접적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남성) 기표만 있고 하나의 (여성) 기표가 실은 부재하고 침묵하는 것 대신에 단지 망각되고 은폐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스스로에게 주어진 삶 자체를 어떤 경계도 없이 헤쳐 나가고자 하는, 곧 정해진 ‘역할’을 벗어나며 메디아는 이방인으로서 ‘의지의 삶 주체’가 되는데 실은 크레우사로부터 감지된 이 ‘불안의 파국’을 의연하게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외설의 지점은 그것을 재전유하는 지점에서 곧 기존의 의미 질서를 수용하기보다 다른 시각에서 근원적으로 새롭게 재정초함으로써 달성된다.


    복수의 비극적 주체의 탄생



     메디아는 상징적 기호를 영속케 하려는 사람들의 그 경계 너머에서 상정되는 불안과 혐오의 감정들을 도입하는 기호가 되며 그 경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게 되는데 비극은 그녀가 그런 의미 질서를 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의미 질서에 틈입하는 우발적 사건들에 휘말림 자체가 ‘잉여적으로’ 부과되기 때문에 있다.


     여기서 오이디푸스의 다른 전형을 보게 되는데, 의지와 의도와 상관없이 비극은 불안의 예측과 같이 사전에 마치 정해져 있는 듯한 것이다.


     그의 가족의 파괴는 그녀가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가운데 찾아온 것인데, 이러한 한순간 스스로의 상징 질서를 고의 아니게 파열시키고 ‘사랑의 진정한 비극적 주체’로 거듭난 메디아는 ‘사랑의 숭고한 이름’을 보전하기 위한 의지에서 그 악이 그녀에게 모든 ‘죽음의 숨통’을 조일 때 ‘복수의 비극적 주체’로 본의 아니게 거듭나는 것이다. 


    이아손의 ‘치졸한 악’에 결국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함은 “죄를 짓는 것은 남자”, “벌을 받는 것은 여자”라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진리”라는 이분법적 남자‧여자의 대립, 그리고 그 이전에 일원론적 기표의 수립이 전제되는 것이다.


     곧 여기서부터 메디아는 탄생한다. 메디아에게 이 ‘부조리한 진리’는 그녀가 전도시키고 균열 내어야 할 의지의 출발 지점을 제공하는데, ‘오늘이 오라’는 ‘현재’를 ‘두려움’으로 채우며 ‘오지 않는 미래’를 이야기하는 크레우사의 태도와는 정반대의 지점이다.


     상징적 질서에 사로잡힌 여자와 그것을 깨부수는 데서부터 결연히 일어나는 여자의 커다란 차이 곧 ‘법의 부인’에서 메디아의 ‘복수 주체’가 시작됐기에 이 법을 전도시키는 ‘새로운 법의 주체’는 곧 ‘법(말)’으로서 말한다. 


     ‘화염 지옥’의 법이 크레온 왕과 크레우사를 지배한다. 여기 진정한 ‘외설’의 미소가 메디아에게서 나타난다. 메디아는 또 다른 권력 주체 곧 법이 된 셈인데, 이는 말이 곧 수행적 효과를 지닌 불안 너머 실재를 변용시킬 힘 자체로 거듭난 것이다.


      “‘인간’보다 더 무서운 건 ‘여자의 복수’”라는 말, 또 다른 ‘진리’는 이제 인간 너머로 ‘복수’를 가진 ‘여자’로 또 다시 상징 질서를 비껴난 존재로 여자의 위치를 정초한다.


     앞서 ‘여자’가 상징적 질서를 은폐된 영역으로 상정했다면, 이제 여자는 상징적 영역 너머 실재적 영역으로 상정되는 것이다.


     왜 이 그녀의 두 아이는 죽어야 했던 것일까. 불행의 과거가 각인된 두 아이, 그리고 행복으로 이끌 마지막 희망이기도 한 두 아이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코러스는 여기서 철저히 외부에 위치하여 곧 신과 여자의 자리 바깥에 있는데 이 불행의, 죄악의 운명을 의지로써 현시되는 광경에 속수무책의 모습을 띠는 것이다.


     앞서 ‘복수 주체’는 ‘인간 너머’라고 했던가. 곧 신의 심판과 잘못된 비극의 운명을 막을 수 있는 여지는 없다. 비극은 이렇게 선택되고 있고 운명에 앞서 운명을 스스로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비극은 운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 운명에 뒤따르는 이름이 된다.


    상징계 너머



     마지막으로 ‘인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식’의 또 다른 세 번째 진리가 언급되는데, 이는 실상 실패한 진리이다.


     우리가 믿는 신의 의지가 실패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다. 어떤 구원의 요소도 없고, 구원도 용납하지 않는 운명 그 자체의 새로운 길을 만드는 메디아에게는 이 복수를 이아손을 죽이지 않는 것으로 끝내는데, 이후는 비극의 현실을 끝없이 상기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메디아의 아이들을 죽일 때 철컹하는 스산함은 타악 악기의 물질 자체가 갖는 속성에 의한 것인데, 북으로 잔뜩 고조되다 이 철컹거리는 스산함이 소름끼치는 공포의 감응을 주는 것이다.


     왜 마지막에 죄를 짓기 전, 지옥에 들어가기 전 메디아의 ‘평범한 여자’의 ‘순수한 자리’였음을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메디아라는 새로운 법을 재정초하는 복수 주체의 탄생이 ‘메디아’라는 특수한 존재의 몸에 한정되지 않음을, 곧 메디아를 만든 것은 이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상징적 법의 결여의 틈이 잠재되어 있는 가운데, 그것의 전도된 자리에 그 ‘주체’가 탄생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이 법의 전도를 낳는 법 자체의 수행적 효과가 주체를 탄생시키고 ‘메디아’라는 보편적 복수 주체를 만드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애초에 이것이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했던 것을 기억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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