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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혜, 〈The Skills of Dust〉: ‘퍼포먼스의 비가시성’
    REVIEW/Dance 2023. 12. 12. 02:06

    정지혜, 〈The Skills of Dust〉 비디오( 박영광, 윤성준) 캡처(이하 상동). (사진 왼쪽부터) 전보람, 정지혜.

    정지혜의 〈The Skills of Dust〉는 퍼포먼스의 비가시적인 산출을 지향한다. 그것은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의도치 않은 관객을 요청하고 용인하는 행동이며, 이는 극장이 아닌 거리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지만, 그보다는 이를 사전에 매개하지 않는 차원에서 결정적이다. ‘비가시적인 것’으로서 먼지(dust)의 기술(skill)은 관객을 재정의하는 것에서부터 가능해진다. 

    〈The Skills of Dust〉에는 크게 세 개의 움직임 스코어가 두 사람 간의 교차로써 수행된다. 팔을 사선으로 위로 펼쳐내는 것, 마주한 채 방향을 달리해서 스텝을 옆으로 이동한 후 다시 돌아와서 교차한 후 처음부터 계속 반복하는 것, 등을 맞댄 채 천천히 앉은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 이들은 전단을 한 손에 든 상태로 이것들을 수행하고, 이 움직임 이후에 전단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반복한다. 판교역은 IT와 같은 첨단 산업의 거대한 빌딩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고, 지하철로는 4개의 출구가 자리하며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오가는 교통의 결절점이자 수많은 직장 인구가 포화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예술의 행위는 쉽게 묻히거나 미미한 영향으로 묻어난다. 
    제목도 시간도 통지되지 않은 퍼포먼스라는 점, 이것이 예술이라고 명명되지 않고 진행되는 점은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주체의 변경을 의미한다. 실제 퍼포먼스 역시 예술을 인지하는 특정 관객의 인지를 가져가려는 의도를 지워 내면서 여러모로 비가시적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짧은 스코어라는 시간의 차원, 공간의 끊임없는 변경이라는 장소의 차원에서 관객을 갱신한다. 무대는 순식간에 열리고 다시 다른 곳에서 부상하고 사라진다. 수많은 대중은 그 각각의 곳들을 극장으로 선택하지 않았으며, 그곳들을 극장으로 인지하지 않는다. 여기서 행위 주체의 새로운 무대의 가설은 필연적으로 다른 대중을 관객으로 포함할 가능성을 획득한다. 
    이들의 행위는 실상 사람들 대부분은 방향만이 있고 정주는 없다는 점―노상을 하거나 또 다른 전단을 나눠주는 이들은 그 예외적 존재다.―에서, 일종의 좌표를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극장이 없는 곳에서 최소한의 멈춰 있음으로써 극장을 가설하는 것이 행위의 시작과 함께 발생했던 것이다. 곧 극장은 어떤 행위인지보다는 어떤 숨과 멈춰 있음, 그것에 집중하고 있음에서 형성된다는 것이 인지된다. 극장은 인공적 구성물이며, 제도적, 인지적 관점에 따라 수용 가능해진다. 

    퍼포먼스가 진행됨에도 이를 특정한 것으로 인지하거나 붙잡아 두려는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퍼포먼스는 이화된다, 그것 모두를 보는 사람에 의해서. 곧 퍼포먼스를 일상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이를 무언가로 인지하지만 퍼포먼스로 개념화할 수 없는 사람 모두의 바깥에서 이를 퍼포먼스로 인지하고 있는 이의 시선은, 퍼포먼스 자체를 보기보다 나아가 볼 수 있기보다, 퍼포먼스의 작동 여부, 퍼포먼스 바깥의 환경에 대한 미세한 변화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작동’이란 퍼포먼스의 수행과는 상관이 없다. 퍼포먼스는 제4의 벽을 갖고 발화한다. 일상 환경과 무대의 경계는 무대보다 우선한다. 무대는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구성한다. 어쩌면 무대는 그 경계를 위해 작동한다. 퍼포먼스는 퍼포먼스와 퍼포먼스가 아닌 것 사이에 놓인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를 퍼포먼스로 알고 온 이와 그렇지 않은 이의 차이는 결정적인 차이가 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또 하나의 작동은 바깥의 시선이 아닌, 안의 체험을 통해 작동한다. 이는 〈The Skills of Dust〉의 또 다른 감각의 경로, 작동의 다른 채널을 구성하는 것과 연관된다. 

    전단을 돌릴 때 그전까지 시각적 양식을 산출하던 두 퍼포머의 관계는 해체되고 동시에 두 사람의 상태 역시 급변한다. 중심은 풀어지고 방향은 흩어진다. “안녕하세요, 저의 일부를 나눠 드립니다.”로 시작하는 멘트는 관객 대부분에게 유효하지 않다. 전단은 쓰레기로 치환되는 형식이며 매체이다. 이 매체를 전유 가능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 그다음 멘트로 가능할까. “전단을 해가 잘 드는 곳에 며칠 동안 놔두세요. 놓인 바로 이 자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전단에는 QR코드가 있고, 마침내 공연 정보가 이를 통해 부상한다. ‘공연’은 역순으로 완성된다. 곧 신체를 매개하고 경유하지 않으면 이 퍼포먼스는 공연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순간이며 이해할 수 없는 또는 이해 불가능한 것으로 수렴할 어떤 장면에 가깝다. 

    정지혜 안무가.

    〈The Skills of Dust〉에서 전단은 “먼지”와 등치된다. 먼지는 파편이나 부수적인 차원이 아니라, 곧 내용의 질적 가치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경계에서의 작동을 의미할 것이다. 전단은 무대를 짓는 퍼포먼스의 오브제에서 대상을 물색하고 대화에 이르는 행위에서 선물로 변화한다. 전단은 과잉된 생산양식이자 욕망이다. 또는 도착하지 않는 편지이거나 내용 없는 형식이며 불시착한 효과이다. 반면, 〈The Skills of Dust〉에서 전단은 상기와 접촉의 매체이며 이는 폐기가 아닌 소유의 권리를 주장하는 가운데 그것을 수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전단은 따라서 두 번의 변이를 겪는다. 전단 자체를 홍보하는 몸짓에서 퍼포머의 손에 들린 오브제에서 전단을 나눠줄 때 대화의 매체로, 다시 관객이 수행할 추후의 스코어로 자리한다. 여기서 전단은 홍보가 가리키는 별도의 물리적 거점을 갖지 않으며, 그 자신으로 수렴한다. QR코드가 공연에 관한 정보이자 설명이라면, 곧 메타 정보라면, 전단은 이미 그 실천 양식이 들어가 있는 자족적인 하나의 플랫폼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지’로서 전단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군중 속의 작은 몸짓―그것이 첫 번째 먼지라면―에 대한 기억을 지지하는, 닿으면 색이 바래는 검은색 종이가 덧대어 있어 접촉과 온도의 변화를 통해 달라지며―그 보이지 않는 관객의 수행이 두 번째 먼지일 것이다.―, 결국 시간에 의해 바래질 물리적 매체―그것이 세 번째 먼지일 것이다.―로 전단은 자리한다. 

    〈The Skills of Dust〉는 보통 거리예술에서 관객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메타적으로 탐문한다. 곧 공연임을 알고 보는 이와 그저 지나가거나 스쳐 가는 이의 차이는 통제 불가능한 거리의 조건을 상기시키는 명제를 구성해왔다. 〈The Skills of Dust〉는 그 차이를 발화한다. 다음으로 전단은 부가 정보로서 극장과의 절연 이후에 부상할 수 있는 존재 양식이라면, 〈The Skills of Dust〉에서 전단은 비로소 부가 정보로서의 공연이 완성되는 존재 양식으로 구상되었다. 여기서 전단은 공연의 전후, 선후 관계를 사후적으로 재정비한다. 그렇게 〈The Skills of Dust〉는 공연의 기이한 유출, 그리고 공연의 기괴한 살아남기의 여정을 보여준다. 

    [공연 개요]
    초연: 2023년 10월 20일 12:00-13:30 16:00-18:00 경기도 판교역

    안무: 정지혜
    출연: 전보람, 정지혜
    사운드: 심준보
    아웃사이드 아이: 권령은
    그래픽 디자인: 유나킴씨
    프로젝트 매니저: 최혜원

    주최: 정지혜 
    후원: 성남문화재단, The Place London, CSC Centro Per la Scena Contemporanea/ Casa della Danza Bassano del Gr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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