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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자하, 〈한국 연극의 역사 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 슬픈 한국(연극)인의 초상
    REVIEW/Theater 2023. 11. 15. 16:21


    구자하, 〈한국 연극의 역사 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2023 SPAF ⓒ Sang Hoon Ok(이하 상동).

    〈한국 연극의 역사〉는 제목 “한국 연극의 역사”를 재현하기보다는 지시한다. 서구 연극을 차용하고 모방하며 형성된 표층과 근저의 욕망으로 점철된 ‘한국 연극의 역사’로부터 그 바깥의 전통의 형식을 소환한다. 곧 구자하는 우선 “한국 연극의 역사”와 ‘한국 연극의 쓰이지 않은 역사’ 또는 ‘진짜 한국 연극(이어야 할 것)’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을 세운다. 그리고 그 둘을 모두 지나친다, 각각 배제하고 아득한 것으로 두며. 

    ‘진짜’라 함은 가치 판단의 범주가 아닌, 연극의 말미에서 제시되듯 ‘역사가 다르게 쓰였더라면’, ‘역사가 다르게 시작되었더라면’의 전제에서 출현하는 자연스러움의 범주이다. 곧 자연스럽지 않음의 현재가 아닌, 그 이전의 역사가 계승되어왔었을 시의 자연스러움이 ‘진짜’에 속한다. 물론 역사는 우연이 개입하며,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 역시 단지 가정법의 영역에 머문다. 반면, 잊힌 또는 잃어버린 한국 연극은 단절의 역사로 인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구자하는 아마도 그 전통의 원형이 개인의 무의식에 남아 있고, 남아 있는 존재들 간의 ‘신비한’ 영적 교류를 통해 체현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수많은 푸티지 이미지가 합성되는 영상 기호 층위에서 ‘한국 (연극의) 역사’와 뒤섞이면서 과잉된 스펙터클, 떠돌거나 휘발되는 이미지들처럼 비치는 전통의 형식은, 영상의 컨트라스트를 극단적으로 올려 홀로그램 같은 이미지들로 전유됨을 통해 기괴하고 현재 재현될 수 없는 기호로 바뀌면서 일종의 부재하는 기호로 자리한다. 그리하여 그 실질을 채울 것이, 온전한 이미지로 재현할 것이 요청된다. 유의할 것은 한국의 역사와 한국 연극의 역사는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 곧 한국 연극의 역사 아래 현상되지 않은 한국의 어떤 역사는 중첩된 시기임에도 한국 연극의 역사 바깥으로 연장된다. 결과적으로, 구자하는 어떤 하나의 역사를 지우고 그 자리를 부재로 현상하면서 다른 역사가 새겨질 수 있으리라 내기를 건다. 전통이 낯선 것,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 되었으며, 그것은 그러한 역사를 단절한 100여 년의 역사, 1908년 이인직의 『은세계』를 기점으로 한 역사의 과잉 현전으로 인한 것임을 밝히는 것으로써, 그 둘 다의 역사를 재현하지 않으면서 두 개의 역사를 모두 지시한다. 

    한국 연극의 역사도 아니면서 공식적인 한국의 역사도 아닌, 한국 연극의 역사 바깥의 어떤 한국의 역사는, 바로 구자하의 할머니의 역사가 된다. 곧 구자하는 일방적인 역사를 철회하는 가운데, 거시사적인 관점까지를 소거하고 미시사적인 개인의 역사에 집중한다. 어쩌면 구자하는 서구의 정전들과 익숙한 주인공들, 그리고 프로시니엄 아치라는 무대 양식이 만드는 드라마 연극 레퍼토리라는 하나의 자리를 더 파고들지 않으며―한국 연극의 역사를 나열하지 않는 것과 함께―, 단지 개인의 고유성에서 출발한 그 사람의 현존이 뒷받침된 단 하나의 서사(=내용)를 자리시키는 것으로 한국 연극의 역사 바깥의 ‘(어떤 다른) 한국 연극의 역사’라는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데서 논쟁을 그친다. 곧 한국 연극의 역사에 대한 부분이나 한국 연극의 특징에 대한 부분 모두 사실 부정의 형식 아래 잘 매개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국 연극의 역사〉는 단락과 단락의 많은 간격과 공백, 도약으로 쓰이는 극이다. 

    애초에 한국 연극의 역사는 얄팍한 것이며 단조로운 것이며 의미 없음을 역설되었지만, 역설적으로 포스트 드라마틱 씨어터의 계열 안에 드라마 연극이 지양되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연극의 역사의 자장 아래 물론 구자하의 연극 역시 자리한다. 그러니까 비판은 이미 시작되었다. 구자하의 작업을 첫 번째로 매개한 것―〈쿠쿠〉(2017)―이 유럽의 작업들을 대거 들여온 페스티벌 봄―전신은 스프링 웨이브 페스티벌―의 김성희 디렉터라는 점은 현실 제도적인 비평으로 갈음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애초에 그리고 현재에도 한국의 작업이 아니라 유럽의 작업으로 초청받은 셈이다. 포스트 드라마의 범주 아래 있다고 하더라도, 구자하의 다른 지점 또는 특별한 지점은 그 한국 연극에 관한 비판 속에 서구에 대한 무분별한 선민의식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짚었다는 데 있다 .

    더 중요한 건 유럽에서 아시아인이라는 경계인으로서 존재하는 구자하가 아시아,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자리를 획득하게 된다는 점이다. 유럽 중심의 역사와 사유 체계의 맞물림이 그 바깥의 타자를 요청할 때 유럽과 비유럽의 경계에 대한 성찰은 가장 손쉬운 접근이자 합리화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물어야 할 건 왜 구자하의 서사는 한국 연극에서 충분히 할 법한 이야기임에도 부정의 출발이 되지 못했는가일 것이다. 곧 ‘한국 연극’에 대한 메타적 사유는 불만과 같은 형태로 무의식이나 SNS의 단문 형태로 있었고, 무대로 직접 진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 구자하 역시 이인직을 제외한 모든 한국 연극의 작업을 에둘러 가지만―홀로그램적 이미지는 이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한국 연극’에 대한 메타 언설을 위해서는 결국 유럽에서 살고 활동하며 그 정체성 자체를 발화의 초점으로 삼은 주체에게서만 나올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곧 한국 연극이 아닌, ‘한국인’에 대한 메타 인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한국을 이야기하는 한국인이 국제 플랫폼에서 다시 국제적 아티스트의 일환으로 한국을 찾게 됐을 때 비로소 ‘한국 연극’이 정의될 수 있게 되었다.

    구자하가 할머니에게 느끼는 정서는 명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애도와 강렬한 현존의 기억, 유대 의식 등은 연극의 언어 너머에 있다. 이러한 신비한 의식과 무대 바깥의 존재는 한국 연극의 역사 바깥의 한 사례가 된다. 거기에는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의식, 신화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매개된다. 이러한 전통은 어떤 구조의 힘 아래 개인의 내재적인 영역에 흥미진진하게 개입된다. 구자하는 각각 “비비새”라는 설화 속 비인간 존재와 “고풀이”라는 수행의 형식을 도입하는데, 전자에서는 무엇이든 다 삼켜 소화해 버리는 비비새가 일종의 망각-기계로서 구자하가 할머니를 애도하는 부분마저도 역사의 진공이 되어야 함을 이야기한다면, 후자에서는 제의의 형식으로써 그것을 마감하며 삶을 진동시키는 어떤 놀이로서의 전통을 보여주며, 실제 무대를 그것으로써 가동시킨다. 곧 고(=매듭)를 보내며 망자에게 가닿는 의식을 수행한다. 

    해킹한 밥솥인 쿠쿠와 접어서 만든 두꺼비인 오리가미(=종이접기)는 배우를 대체하며, 구자하에게 말을 건다. 곧 타자(의 역사)에 닿기 위한 노력의 반대편에서는 일종의 내 안의 타자로서 사물들이 존재화됨을 보여준다. 영상 전면을 점유하는 비비새가 전통이라는 대타자로서 힘을 가지고 있음으로 설정한 건 영상의 푸티지에서 단서를 얻을 수 있듯 샤머니즘이든 애니미즘이든 간에 어떤 전통적인 의식, 인식, 인지의 방식을 연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부분은 동시대에 왜 필요한 것일까, 또는 어떤 대안으로 자리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유효한가의 질문은 한국과 유럽의 이분법적인 도식 아래 애매하게 자리하게 된다. 근현대사의 특수한 역사의 지형 바깥을 들여다보려는 시도에서 〈한국 연극의 역사〉는 끝나기 때문이다, 또는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자하의 시도는 사실상 슬프고도 아득한 한국(연극)인의 초상을 증명한다. 그리고 〈한국 연극의 역사〉는 하나의 명제로 집약된다. ‘한국 연극의 역사라고 하는 건 사실 잘못되었다.’라는 것.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공연 개요]
    공연명: 한국 연극의 역사, The History of Korean Western Theatre
    공연 일정: 10.13. FRI 7:30pm / 10.14.SAT 3pm
    공연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접근성:(전 회차) 안내보행, 한국어, 영어 자막
    장르: 다원 ●●●●●, 연극 ●●●●, 영상 ●●●●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중학생 이상)
    소요시간: 60분

    콘셉트·텍스트·연출·음악·영상: 구자하
    퍼포먼스: 구자하, 세리, 두꺼비
    쿠쿠 해킹: 드리스 두이비
    시노그라피·영상 오퍼레이션: 정은경
    제작 자문: 폴 헤이바트
    기술: 코닐 코센스, 바트 허이브레흐트, 쿤 구센스, 요나스 카스텔라인, 안느 미우센, 필립 디그니피, 얀 베르크만스
    제작 관리: 빔 클랩도르프
    하드웨어 해킹: 이델라 크라독
    리서시 어시스턴트: 김상옥
    인터뷰: 고주영, 김기란, 이경미
    도움주신 분들: 김남건, 김미도, 김방옥, 김요안, 김윤정, 나희경, 블라디미르 티코노프, 안느 브루어
    제작: 캄포(벨기에)
    공동제작: 쿤스텐페스티벌(벨기에), 뮌헨 캄머슈필레(독일), 프라스카티(네덜란드) 뷤하우스(네덜란드), 스프링 공연예술제(네덜란드), 취르커 시어터 스펙타켈(스위스), 블랙 박스 시어터(노르웨이), 캄프나겔 국제 여름 축제(독일), 탄츠 콰르티에(오스트리아), 비피짐머(벨기에), 바스티유 극장(프랑스), 파리 가을 축제(프랑스)
    레지던시 지원: 아트센터 부다(벨기에), 아트센터 부다(벨기에), 비피짐머(벨기에), 데코아뜰리에 요제프 바우터스(벨기에), 두산아트센터(한국)
    제작지원: 벌스카우버그(벨기에), 벨기에 플랑드르 정부, 암스테르담 예술 기금(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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