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2.05 00:28

▲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신지우, 우정원, 신사랑, 노기용, 황은후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연극의 시작과 함께 튀어나오는 ‘삶의 의미는 없다’는 말은 신은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제목이 수렴하는 지점은 당신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알지 못하는 것이 하필 ‘당신’이라는 것이다. 이는 당신‘이’에서 주격 조사의 차이에 기인한다). 사실 이는 신의 존재를 의심하며 신의 부재를 차라리 믿겠다는 유신론자의 좌절로 읽힌다. 삶의 커다란 고통, 죽음의 멍에를 짊어진 인물들, 특히 언니 해언이 돌연 살해된 이후 그 부재를 희미한 기억들로 채우고자 하는 애도 불능의 시기를 겪으며 삶의 의미를 논하는 다언(신사랑 배우)의 물음에서 이는 의존할 데 없는, 긍정할 수 없는 삶의 피폐함을 드러낸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업은 어떻게 소설을 각색했는가?’ 이러한 질문은 ‘이 작업이 연극을 구성하는 방식은 무엇인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곧 ‘소설은 어떻게 의심되고 해체되며 사라지는가?’ 이러한 질문은 ‘연극은 어떻게 믿음으로 나타나고 실체를 생성하며 사유의 가장자리에 닿는가’라는 본원적 질문으로 다시 환원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은 연극에 대한 메타포로 기능할 뿐이(어야 한)다.

▲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배우 신사랑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결과적으로 이 연극이 연극을 구성하는 방식은 ‘소설적’이다. 인물은 현실에 있지 않고 기억에 있다. 인물‘들’이 현실을 경유함은 약간의 소음과 함께하는 드문 장면에만 있다. 인물들의 말은 교차한다. 하나에 대한 다른 응답의 형식이다. 곧 말은 ‘절취’되어 부분만 말해진다, 세계는 온전히 메워질 수 없다. 파편화된 기억의 부분들이 이전을 대체할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연극’이란 배우의 말들로써 이뤄진 세계를 지시한다. 모든 말은 독백이다, 아니 방백이다. 아니 방백 같은 독백이다. ‘인물의 곁에는 혼자가 아니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 그러나 모든 말은 홀로 된 말이다. 단지 말일 뿐이다. 그러나 관객을 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은 그저 말일 뿐이다. 기억을 증언하는 현재에서 떨어져 나온 말이다. 결국 배우는 말을 전달하는 이다(이것은 여전히 소설의 그림자를 가정한다)!

분명 내레이션을 하는 전지적 작가 혹은 관찰자 시점으로서의 화자 역시 배우의 말로 옮겨 가는데, 이는 마치 앞선 이의 말을 배경으로 두고, 현재를 해설하는 명료한 화자를 설정하는 부분이다. 곧 이야기를, 소설을 재현하는 부분이겠다. 아니 소설만큼 명확한 줄거리를 압축적으로(=효율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부분일 것이다. 말이 교차하는 것으로부터 다성부를 이루는 소수의 순간이 있다. ‘레몬과자를 파는 베티번 씨’라는 자신의 시를 홀로 읽는 상희(황은후 배우)의 시구절에 교차하는, 어둠에서 어슴푸레 섞여드는 다언의 목소리에 있다. 그것은 목소리만 불쑥 끼어드는 유일한 장면이다.

▲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황은후, 신사랑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곧 모든 부분에서 말은 다른 이를 향하고 있다. 아니 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배우는 우리의 시선을 두는 곳에 있다! 우리는 말이 향하는 다른 이를 그로 수용하고 또 그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다. 이와 같은 오인을 거치는 판단은, 또는 판단을 거스르는 오인은 배우의 연기로부터가 아니라 연극이 갖는 어떤 실질에서 기인한다. 곧 문학의 말을 파편적으로 옮기면서 일종의 맥거핀처럼 놓인, 전달되지 않는 말의 반대편에서 말하지도 듣지도 않는 존재들이 가끔씩 연극의 형식에서 마이너스된 채 존재한다. 그것이 곧 플러스를 만든다. 말에게, 아니 말이 향하는 배우에게 우리는 시선을 향한다. 그것이 곧 우리가 따르던 연극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텅 빈 배우의 형식은 이 원작이 보여주는 부재의 존재를 충만하게 현상한다, 재현의 형식이 아니라 비재현의 형식으로, 존재에 대한 믿음/오인에 기대.

▲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권여선 원작, 박해성 각색/연출), (사진 좌측부터) 배우 노기용, 신지우, 신사랑 [사진 제공=남산예술센터]

죽음이 경계를 갈라놓는 행위라는 대사는 죽음이 경계로써 분명해진다기보다는 죽음이 경계를 비집고 등장하며 그러한 죽음을 임시적으로만, 반쯤 정도만 정의할 수 있음을 말한다고 보는 게 ‘더 나은’ 해석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따라서 없다. 말 그대로 죽음이라는 말이 존재를 대신하므로, 부재는 존재를 현상하므로. 삶에 의미란 없다는 말은 삶의 불가해한 사건에 대한 해소할 수 없는 물음이 잔존함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 부조리한 물음, 삶에의 곤궁한 물음은 의미의 강박을 초래하며 유일한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삶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은 그치지 않는다. 동시에 삶은 유예된다.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는 ‘당신도 알지 못하나이다’로 바꿔 써야 할 것이다, 마지막에 자신의 언니를 죽인 것으로 오해가 쌓여 가던 만우(노기용 배우)에게 따지던 가운데 그의 동생(신지우 배우)으로부터 달걀 프라이 두 개를 얻어먹고 마침내 춤을 출 수 있었던 다언을 본다면. 여기서 둘은 강력한 상징으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하나가 아닌 둘, 언니 아니면 나, 이런 구도를 벗어나 같이 있는 둘을 상정할 수 있는 것, 둘을 누릴 수 있는 것, 둘과 함께 셋이 될 수 있는 것. 삶의 의미는 급작스럽게, 우연히 찾아진다. 삶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알고 있나이다’라는 신학적 유비로 다시 도약해야 할 것인가.

p.s. 그럼에도 신학적 유비의 (불)가능성을 타진하는 가운데, 문학을 연극으로 정리하고 변환하는 가운데, 존재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존재를 착각하고 존재에 의존하게 만드는 가운데 이 연극은 아무래도 형이상학적 내용에 다가서는 데, 수수께끼 같은 내용의 정리 차원에, 대사의 전달에, 중극장의 크기를 타진하는 데 그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들)을 남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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