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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평가>: ‘비평과 창작’에 대한 알레고리
    REVIEW/Theater 2017. 11. 28. 22:44

    ▲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 작/김재선 역, 이영석 연출, <비평가> 포스터, (사진 왼쪽부터) 김승언, 이종무 배우 [사진 제공=K아트플래닛]

    어느 날 한 극장에 오른 작품이 기립박수를 받는다. 그 희곡을 쓴 작가가 자신의 작업에 대해 꾸준히 비평을 해온 비평가의 집을 찾는다, 와인을 들고. 이런 설정은 이후 두 사람의 강력한 설전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며, 작가와 관계 맺는 비평가의 역할, 나아가 연극의 기능과 정의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나아간다. 작업이 재미있는 부분은 각자의 날 선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주로 ‘대비’되는 층위에서 비평과 창작에 대한 관점이 지금에 있어서도 유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인데, 거기서 체현되는 건 인물이라기보다 수사의 설득력과 그 자체의 매력, 곧 말일 것이다.

    사실 비평가의 삶과 작가의 삶의 이상한 접속의 구문을 형성하는 작업은, 비평가를 냉정하며 공고한 진리의 수호자 대신 캐릭터로 위치시킨다(그리고 여기서부터 작품은 해독 불가능한 사태에 직면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작가의 손에 결론을 주어주며 ‘시작과 끝’을 비평이 아닌 창작의 층위로 수렴시키는데, 비평가의 ‘진정하고 순수하며 유일한 하나의’ 사랑은, 비평가가 그날 보고 비판의 초점을 맞춘 부분인 여자 캐릭터의 비진정성과 그의 내면으로부터, 그의 비평의 기준으로부터 철저하게 대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곧 그 사실을 알게 되며 그는 뛰쳐나가고, 말들이 탈락하고 부재하는 세계에서 작가는 비평가의 위치에서 비평을 재현하(는 창작을 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창작자의 위치에서 비평은 흉내 낼 수 있는 것으로 전환된다.

    이 연극은 작품에서도 강조되듯 “거짓”과 “진실”의 이분법으로서 사회, 그로부터 연장된 연극의 이념을 전제한다. 연극은 진실을 보여줘야 하며, 그 방식은 물론 ‘진실’해야 한다. 비평가가 지적한 진실한 연기를 가능하게 하지 않는 희곡의 한 부분은, 리얼리즘 드라마를 토대로 하며, 배우의 연기는 역할 그 자체가 되는 스타니슬랍스키의 메소드 연기로 수렴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이 작업이 말하는 연극은 지금에 있어서는 매우 제한된 연극의 이념과 형태에 부합된다.

    작가의 “태어나지 않은 평론가”를 위한 작업, 거꾸로 비평가의 ‘하나의 작가를 위한 평론가’는 뛰어난 작업이 극단적으로 소수의 비평가에게‘만’ 읽힐 수 있음을 의미하며, 둘을 밀접하게 상응하는 관계로 엮는다. 작가는 대중의 찬사보다 인정받지 못했던 비평가의 해명이 더욱 필요했었다. 비평가는 부정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작은 조각이 빛을 발하는 작업의 탄생을 기다렸다. 작가는 비평가에 대한 인정투쟁의 차원에서 작업을 해나갔다면, 비평가는 하나의 작가로부터 나온 작업들을 작가의 성장과 연관시켜 나가며 결코 ‘거리’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던 사실들이 드러난다.

    둘의 미래는 곧 서로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고유한 빛(‘천재성’)을 읽어주기 바라며 그러한 존재를 상정하며 작가는 미래로 현재를 유예시키며 찬사를 안은 현재로부터 끊임없이 좌절했었다면, 비평가는 그런 하나의 씨앗이 온전한 가능성을 발현하기를 바라며 현재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간직했던 것이다. 비평가의 완고한 태도는 그런 미래에 대한 확신이었고 작가에 대한 믿음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비평으로 수렴되는 것으로 보이는 작업은 상대적으로 작가에게 불리한 것이었다. 그는 현재의 비평(가)이 아닌 ‘다른’ 비평(가)을 갈망했다. 따라서 둘의 만남은 비평가의 완고한 입에서 나오지 않던 내면을, 찬사에 가려져 있던 작가의 욕망을 드러내며 서로를 비추기 시작한다.

    비평가가 나가버린 상황은 연극의 완전한 블랙아웃이 앞서 당도한 바다. 작가는 어떻게 자신의 작업을 다시 쓸 것인가? 작가는 비평가의 자리에서부터 작가의 자리를 시작한다. 결국 ‘비평가는 작가의 작업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후차적인 반응자로서의 비평가의 상정을 통해, 현실과 거리를 두며 한편으로 그 거리만큼을 타협하며 나아가야 하는 비평가의 반-현실, 반-현재적인 존재는 이상적이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에게 더 다가가지 못한 지점에서. 반면 작가는 매혹적인 현실을 좇아 나간다.

    그의 말은 곧 그의 말의 중핵은 미래에 올 자신의 가치를 인정할 비평가가 필요하기보다는 현재 오지 않은 비평가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작업을 도출하는, 낳는 존재이기 때문이다(비평가는 최선의 창작자가 되지 못해 비평가를 선택한 것이라는 시쳇말이 떠돌곤 했다). 그의 작업은 그의 삶에서 최선이다. 하지만 비평가의 삶에서 최선은 그의 글이 아닌 최선의 비평을 낳는 작업이 아닐까. 이런 도치된 상황은 공고한 비평가의 삶에 균열을 내는 작가로부터 드러나는데, 이 작품은 곧 비평가의 패배와 작가의 승리를 말하는 것일까. 하지만 결국 작가의 주요 소재가 된 것이 비평가의 삶이었다는 것은 둘의 기이한 공생관계를 이 작품이 제시했음을 의미한다.

    비평가의 엄정한 ‘기준’이 작가에게 필요했다면, 작가의 최선의 ‘작업’이 비평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서로는 이로써 공생하는 듯 보이지만, 서로가 갖지 못한 조건들을 서로로부터 찾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한 번 더 둘의 관계를 연결시키면서 해체시키는 인위적인 사건을 작품은 도입하고, 둘의 위치를 전위시키기에 이르지만, 실은 기존 작가와 비평가의 새로운 위치를 도입하는 데까지 이른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이 작업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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