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준 2017.12.05 00:05

 

<나의 한 가지 요구>, 2015,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45분 Patrica Marcoccia and Oscar Tosso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나의 한 가지 요구(My One Demand)>(2015)는 연속되는 하나의 쇼트 안에 한 명씩 연결해 도시를 걷는 일곱 명의 사람을 다룬다. 동시에 이는 온라인과 극장에 실시간 스트리밍되었었다. “당신이 바꾸었으면 하지만 바꿀 수 없는 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일곱 명을 관통하고, 일곱 명을 향한 질문은 다른 답을 도출한다, 아니 질문은 다른 세계로의 접속을 요청하는 질문으로 환원된다.

<율리케와 아이몬의 타협>, 2009,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5분 Anne Brassier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율리케와 아이몬의 타협(Ulrike and Eamon Compliant)>(2009)에서 전화를 받은 관객이 율리케와 아이몬 중 한 명을 선택하고 도시 곳곳을 걷고 이동하며 받는 질문에 대한 답을, 영상으로 찍고 상영하면서는 음악을 입혀 지우고 관객의 대답의 자리로 바꾸는 것처럼, 일관되게 관객의 몫으로서 질문 이후의 공백을 상정한다. 율리케 마인호프는 1960년대 서독에서 폭력적인 테러를 이끌었던 적군파의 핵심 인물이고, 아이몬 콜린스는 아일랜드 공화국군에서 동료들을 밀고하고 살해당한 인물로, 역사 속에서 개인을 선택의 주체로서 재점화하는 퍼포먼스는, 5분의 영상으로 짧게 편집돼 단지 관객이 대답하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장면 사이의 간극을 강조하게 된다.

▲ 블라스트 씨어리(Blast Theory, 1991~), (사진 왼쪽부터) 닉 탄다바니치Nick Tandavanitj, 주 로 파Ju Row Farr, 매트 애덤스Matt Adams) ⓒAndrew Testa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추상적인, 그러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질문이라는 말의 장치가 곧 블라스트 씨어리(Blast Theory, 1991~, 닉 탄다바니치Nick Tandavanitj, 주 로 파Ju Row Farr, 매트 애덤스Matt Adams)의 작업의 중핵을 차지하는데, 이는 개별자를 개별자로 식별하(고 주장하)는 데 이들의 작업이 온전하게 자리하기 때문이다. <나의 한 가지 요구>에서 매기 허큘락(Maggie Huculak)의 내레이션이 사람마다의 이야기에 덧붙여지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의 역량이다. 여기서 진리는 주장되거나 인계되기보다 사람들에게서 끌어오는 것으로 바뀐다. 곧 진리의 입구를 그들의 입으로부터 여는 것이, 스스로의 대답을 포기하는 것이 비가시적인 블라스트 씨어리의 역할이다.

<나의 한 가지 요구>, 2015,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시간 45분 Patrica Marcoccia and Oscar Tosso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사람들은 저마다 인생의 진리를 산출한다, 답을 저마다 알고 있는 듯하다. 단지 길이라는 흘러가는 물리적 운동으로 사유의 촉발과 함께 사회와 결부된 개인을 드러내는데, “당신 앞에 펼쳐진 길이 유일한 길이라 믿어요.”라는 내레이션을 통한 개입은 곧 그의 관점이 갖는 진리성과 그 스스로가 개방성을, 곧 끝없는 미래와 접촉하면서 진행된다는 것에 대한 거의 유일한 교훈적 지침이자 걷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만나는 것을 선택한 이 퍼포먼스에 대한 해석적 지침이 된다.

<앞을 향한 나의 관점>, 2017, 미디어 설치 Blast Theory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앞을 향한 나의 관점(My Point Foward)>(2017)은 360도로 돌아가는 영상으로 런던의 여러 장소들을 보여주면서 거기에 관객의 내레이션을 입힌 작업을, 서울로 연장해 장소를 오가며 분배하는 식으로 새롭게, 만들고 또 (기존의 작업을) 보여준다. 녹음 가능한 장소를 스크린 뒤에 둠으로써 관객의 목소리가 계속 아카이브되어 영상과 병치되게 되어 있다(질문은 “당신의 조용한 곳을 찾기 위해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이다). 장소를 보고 촉발되는 사유는 사실 (현재의) 장소를 직접 지시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어떤 사유의 목소리와 계속 접합될 수 있다는 것이 이 작업 방식이 가리키고 구성하는 바다.

▲<내가 평생 동안 할 일>, 2013,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1분 YAMAGUCHI Takayuki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내가 평생 동안 할 일(The Thing I’ll Be Doing For The Rest Of My Life)>(2013)은 물에 잠겨 있던 폐선을 한 공원으로 옮기는 집단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으로, 2011년 일본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취지에서 시도되었다. 여기에는 ‘어부가 되는 법’이라는 내러티브가 병치되는데, 어부는 이 퍼포먼스 앞에서 메가폰을 들고 진두지휘하는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표상된다. 재난의 극복은 물리적 노력과 일시적인 끈끈한 공동체를 통한 “유토피아적 끈”을 발견하게 하는데, 수면 위로 건져진 배는 육지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는 환상을 제공한다.

<앞을 향한 나의 관점>, 2017, 미디어 설치 Blast Theory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영상 작업들은 개별적 아카이브의 ‘참여’ 공간으로 연장되는데, 가령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에서 사이트 주소의 본문은 영문 제목을 띄어쓰기 없이 일렬로 세운 것이고, 이는 다른 프로젝트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이 되고는 하는데, 특히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에서는 그 시간이 한층 더 오래 지속되며 참여의 요청을 더 강조한다. 너의 생각을 듣고 싶다는 것, 또는 네가 행동하라는 것(“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행위자”)은 변화의 주체를 ‘지금 여기’에 둔다는 것으로, 사회 속의 개인의 관계를 만들면서, 개인으로부터 사회라는 (전위적 주체에서) 주체의 전위를 꾀하는 ‘개인과 사회’의 패러다임의 변화된 위상을 주장한다.

<조그 셔틀러>, 2013, VHS 테이프, VHS 플레이어, 사운드 믹서 RULER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참여적 위상’은 <조그 셔틀러>(2013)라는 작업에서, 아카이브의 반아카이브적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둔 작업으로, 매체 조작에 의한 관객의 유희적 놀이로써 구현된다. 1994년부터 2003년까지의 200여 개가 넘는 비디오테이프로 구성된 VHS 아카이브는, 블라스트 씨어리의 지난 퍼포먼스와 리허설 및 언론에 보도된 자료에서 가져온 푸티지들이다. 전체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온 짧게 편집된 ‘오작동되는 현재’, ‘지연되(며 반복되)는 현재’는 사운드 믹서를 통해 똑같은 크기의 화면을 시청각적으로 확장 가능하다.

제 앞에 놓인 테이프를 자유롭게 골라서 플레이어에 넣어 장면까지를 만들 수 있으나, 실제 거기까지 참여를 시도하(려)는 관객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작업은 아카이브의 새로운 활용 가능성을 타진하기보다, 질식되는 아카이브를 휘발시키며 소실되는 주체의 무의미한 승리를, 역사와 미디어 권력의 불가침의 권리 위에 두는 것에 만족하는 작업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는 한편으로 미디어의 접근/조작 능력에서 기인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고도 하겠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정치적인 변화를 만든다’는 매트 아담스의 말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제하고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 그는 나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나와 같이 행동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전제 역시 개별자의 자리를 지시하고 주장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별적 존재의 탄생을 통해 “다른 미래”가 가능할 것인가. 무엇보다 (너로부터의, 따라서 다른) “시작”이 있어야 시간이 흘러간다는 측면에서 블라스트 씨어리의 전망은 지극히 낙관적인 것으로 보인다.

<2097: 우리는 스스로를 끝냈다>, 2017, 5개의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총 18분 Blast Theory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실제 “다른 미래”는 <2097: 우리는 스스로를 끝냈다>(2017)라는 영상에서 가상의 세계에 대한 가정으로 나타난다. 80년 후의 미래에 인류를 책임질 운명을 결정하는 개체들로부터의 사유를 유도하는 일종의 영화인데, 그 내용은 5개의 단편들을 통해 분절되는 가운데 그다지 정교하거나 충분하지 않다. 시각적 장면들에 조금 더 비중이 있는 가운데 캐릭터들이 가진 집중도와 매력이 떨어지고, 미약한 개인들은 인류의 몫을 분명히 떠안는 가운데, 이들은 블라스트 씨어리가 지시하는 관객의 모습, 곧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개인을 가정하게 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류의 미래 반향적 사고와 대안적인 현재를 논하기보다는 공동체로서 인류(적 개체)를 수렴시키는 데 더 가깝다. 블라스트 씨어리의 참여는 다양한 매체와 방식을 통해 작동/구현되는데, 다소 아쉬움을 남기는 이 작업은, 인류라는 거대한 부분을 주장하기보다 가정하는 가운데, 시각적 질서가 개체(에)의 사유를 가리는 누를 범하는 것처럼 보인다. 공동체 속 개인의 역량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최근 작업들에 비해, <율리케와 아이몬의 타협>에서의 참여, 곧 역사의 변증법적 주체로서의 사유/선택을 강제당하는 참여, 나아가 퍼포먼스라는 실재로부터 연유된 후차적 기록은, 가장 전위적으로 참여의 역량 자체를 시험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내가 평생 동안 할 일>, 2013,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1분 YAMAGUCHI Takayuki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한편 <율리케와 아이몬의 타협>, 그리고 <내가 평생 동안 할 일>에 비해 다른 작업에 있어 참여는 어떤 사건으로서의 형질 변환을 일으킨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니까 말하고 행동하는, 곧 스스로 시작할 수 있는 주체의 상정은 관객이라는 존재를 가시화하고 예술가의 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나아가지만, 진리를 매체와 형식으로 육화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앞을 향한 나의 관점>은 <나의 한 가지 요구>에 비해 개별자는 단지 목소리만으로 또한 다듬어지지 않는 발화들로 거칠게 드러나는 듯 보인다. 그리고 이는 잘 전달되기보다 수없는 축적 그 자체의 엔트로피적 발산으로 나아가는 듯 보인다.

▲<내가 평생 동안 할 일>, 2013,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1분 YAMAGUCHI Takayuki [사진 제공=백남준아트센터]

여기서 작업은 공공미술적 참여와 외형상의 구별을 하기 힘든데, 장소가 사유를 촉발시킨다는 전제 아래 장소에 말을 비어둠으로써 개별자의 자리를 육화하려는 영상은, 사실상 (장소가) 개별자의 저마다의 사유를 가질 수 있음의 이념 이외에 다른 것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작업은) 관객은 각자 다른 사유의 가능성을 얻고 발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으로 환원된다. 작업은 텅 빈 장소를 놓아둔다. 다른 이의 말들을 거기에 ‘자의적으로’ 놓아둔다. 장소와 말은 자의적으로 결속한다. 예술가는 이 텅 빈 장소에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그치는 텅 빈 존재가 된다. 곧 블라스트 씨어리는 관객의 역할을 상정함으로써 스스로의 강제된 메시지 발신의 역할을 포기하는 예술가의 역할을 이야기한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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