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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MODAFE] 박근태, <Man's Diary> '기억에 종속되는 신체'REVIEW/Dance 2014. 6. 4. 01:37
▲ 박근태 안무작 [사진제공=모다페]
단독자와 그와의 등가물들 격인 세 쌍의 무용수가 나온다. 그리고 존재의 기억이 펼쳐진다. 한 명의 존재는 지난날 자신과 연인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내레이션으로 무대 뒤에서 목소리로 체현하고 세 쌍의 커플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재현하고 표현하는 일종의 부속물에 가까운 무용수들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럼에도 이 작품이 목소리와 움직임이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하나의 공간감적인 시가 아니며, 이천 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하나의 담론과 이슈가 된 다원예술적 움직임이라는 특징을 지닌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다. 움직임(표현)이 목소리(텍스트)를 앞서기 때문이다.
물론 화자인 존재가 본격적인 춤이 펼쳐지는 동안 등장하지 않으며 시작과 끝에만 나와 실시간적으로 무대에 목소리를 입히고, 춤추는 이들은 그것을 조금 더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더해 현장에 웃음을 더하며 기억을 철저히 현장에서 감응되는 순수한 몸짓의 측면에서 생생함을 주지만, 그럼에도 ‘기억이라는 변형된 재현의 매체’ 특성은 만남과 이별 사이의 일기 식의 날짜별로 단절되는 기계적인 막의 구분과 그것들 곧 기억의 단편들을 섞고 흐트러뜨리는 대신 변화의 한 부분으로, 단순히 쌓아나가는 전개에서 사실들을 표현하는 대신 사실을 모사한다는 점에 더 가닿게 된다.
곧 목소리는 하나의 시로 음악화되거나 떠도는 단편들로 하나의 물질이 되는 대신 흘러가는 기억들의 재현-기계가 되며 마치 실시간 라이브로 외삽되는 외화면의 목소리에 가깝게 들리고 그것은 하나의 재현-움직임을 하달 받은 마리오네트들의 모사적 움직임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곧 목소리와 움직임은 분명히 미세한 시차를 두고(목소리가 조금 빠르다) 철저하게 조응하지만 그것이 부딪치거나 동등한 입장에서 대면 또는 혼합(의 실패로 인한 어떤 결과)의 과정을 가져가는 것은 아닌 것이다(그렇다면 소위 다원예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기억의 재현으로서 목소리, 그 목소리의 내용을 재현하는 움직임은 이중적인 환원의 재현이 된다. (춤은 무엇보다 ‘표현’의 매체가 아닌가)한편으로, 이 극의 음악은 초반이 조금 지나 등장하는 ‘볼레로’다. 볼레로는 반복과 차이의 끝없는 변주이자 그럼에도 묘연한 충적이 결코 수렴되지 않고 어떤 황홀한 광경에 빠져들게 하는 춤에 있어 매우 희귀하고 또 훌륭하며 그러나 결코 그것을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 그런 곡인 것이다.
일상의 움직임이 그 일상을 붙잡고 포착하는 데 그것을 최소한 사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을 정도에 머물러야 하는 어떤 모사의 제약이 있다. 하면, 이 음악의 황홀한 흐름에 어떤 리듬, 순수한 표현-기계가 되는 대신(사실 그렇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일상의 움직임을 그 음악의 리듬이 아닌 박자에 맞추느라 부단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곧 이 음악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감각되는 것이다.
사실상 각각 다르게 또 한 연인의 기억을 재현하는 무용수들은 나중에 일렬종대로 서 동시적으로 어떤 차이를 벌려 간다. 하지만 이 (소수로 남는) 표현들은 여전히 어떤 음악의 리듬 자체에 다가가거나 하지 않고 무용수들 각자의 어떤 애드리브, 그리고 그들의 몸의 다른 무늬 정도로 생각될 뿐이다. 그것은 차라리 각기 다른 기억들의 중첩되며 벌어지는 이 사랑스런 슬픈 기억의 배치들로서 기억의 혼란스런 지점을 체현하는 것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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