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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전히 안무다: 윤자영 <금박의 춤>
    REVIEW/Dance 2016. 6. 28. 21:59

    텍스트와 등가하는 몸!, 너머 텍스트-감응?


    윤자영 <금박의 춤>[사진 제공=국립현대무용단](이하 상동)

    경마로 8,000만 원으로 빚은 진 중년 남자가 영웅의 동상이 된다라는 짤막한 인물에 대한 배경 및 그들의 수행적 변환의 예측을 담은 텍스트 제시 이후, 덥수룩한 수염에 배불뚝이와 벗겨진 머리 두 남자의 팬츠만 입은 몸은 하나의 포즈와 그 변환에 따라 순차적으로 제시된다. 앞을 응시하는 전자의 남자의 시선이 뒤늦게 무대에 들어오는 후자의 남자 몸에 닿으며 시선이 몸에 인계된다. 시선의 안/바깥을 교차하는 식의 시선'의'/'과' 배치는 헐벗은 몸을 대하는, 마주하는 하나의 방법론쯤으로 자리한다. '여기 몸이 있다!' 그러한 시선, 특히 전자의 시선-그리고 후자의 몸이 가진 헐벗음 역시 그 매개를 통해 과장되게 드러난다-은 몸에 대한 수치를 전도, 아니 전복하는 셈이라 극장은 몸의 살색 향연으로 아연해진다. 


    인어공주 포즈를 취하는 전자의 남자가 차지하는 좁다란 구역과 잘 펴지지도 않은 반짝이 접이 막대기는 채 펴지지도 않은 채 놓인다. 그것은 곧 몸과 같이, 몸처럼 응축된다. 중간에 두 남자를 매개하는 건, 괴물 탈을 쓴 캐릭터인데, 주름(살)과 더듬이와 어찌할 수 없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곧 수치를 전면화하는 부끄러운 괴물은 둘에게 어떤 지령들을 선사한다. 일종의 트릭스터로서 그는 마른 남자의 팔이란 신체의 구부러뜨림을 내기로 걸고 한 발 한 발 구부러지는 선분을 따라 삶의 노정을 이어가게끔 한다. 


    "통계와 소문에 의해 지배되는 미래"는 곧 지표-가상 실재적 파생 경제쯤이라 할까-의 호돌로지적 길에의 육화로 환유되고, 앞선 구부러진 몸의 주름처럼 몸에 각인된 삶의 목표가 체현되며 동시적으로 이뤄진다. 지표라는 몸에 아로놓이는 기표와 몸이라는 표면의 중첩은 곧 텍스트를 실재에 쓰는 윤자영의 독특한 방식인 셈인데, 이러한 지표가 바닥에서 평면으로 반영돼 펼쳐지고 그 지표의 구불거림이 표현하는 각종 경제 지표의 그래프(라는 우김!)는 마치 키의 대별됨으로 구분되는 우스꽝스러운 사진 장면쯤으로 육화된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몸에 욱여넣는 텍스트는 곧 앞선 텍스트가 전혀 배경 텍스트가 아닌 잉여 없는 몸의 전령이었음을, 그에 대한 텍스트 잣기를 온몸으로 하고 있었음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여기에 더해지는 텍스트(-노래), 후반에 튀어나오는 오페라 잔니 스키키의 '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O mio babbino caro)가 뜬금없이 느껴지는데, 여기서 아버지에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딸과 같은 상징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그의 부재가 실은 무대에서 현시될 수 있음을 생각할 때 딸의 메시지와는 별개로 존재하는 단지 이별에 대한 허락의 권력으로서 텅 빈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 (무)의미로 현상되는 아버지를 생각해 볼 때, 일종의 극도의 농담의 완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노래를 몸에 미치는 감각의 차원으로 쓰는 윤자영의 지난 작품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작품의 의도를 연관지어 유추해 볼 때, 클라이막스를 치고 나오는 노래가 그만큼의 힘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래가 아득하게 울려 나오며 갖는 정동이 우스꽝스러운 텍스트의 결을 따르면서도 여전히 강력하게 불려 나오는 것과 같은 장면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까. 한편으로 이는 '괴물'의 역할의 애매모호함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 있는데, 가령 그는 외모적으로 상반되는 아버지 둘이 그 흐물거리는 탈-가죽에 손가락을 넣어 탈과 살의 틈을 만들 때 그 우스꽝스러운 아버지의 면모를 그 두 아버지를 대신하며 (그 둘의 손가락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 딸의 신체와 접합한다. 이러한 탈 사이의 틈을 내는 행위는, 흐물거리는 또 다른 아버지, (처음부터 시선을 양도한 이후) 시선을 도려낸 아버지의 거죽과 같은 무엇, 찰랑거리는 뱃살과 말라 비틀어진 뼈의 접합적 상징물로서 그의 신체가 육화되게끔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몸을 대하는 전자의 남자의 시선을 제시하지만, 그 시선이 사실 몸에 빼앗긴 시선이라는 것을 관객이 인식할 틈 없이 몸에 영도된 인식의 부재, 혼미한 의식에 단순한 놀이와 몸의 전시가 어떤 해독/해석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 점보다는, 강한 클라이맥스로 그 모든 것을 뚫고 나오는 하나의 흐름이 명시하지 못한 감응이 아쉬운데, 이는 윤자영의 첫 번째 작업 <기로극>에서 보았던 부분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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