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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 '숨 쉴 구멍이 없다'
    REVIEW/Theater 2016. 4. 29. 16:20


    작품의 제목에서 방점이 찍히는 건 '모든'이다. 거기에는 군인이라는 특정 계급/신분에 따른 명명만 있을 뿐, 결국 그것을 말하는 이까지 불분명하게 흐트리며 포함한다. 다만 피해자(에 대한 탄식과 연민)만이 존재할 뿐이다. 극 속에서 유일하게 아들과 같이 자리하는 (탈영병의) 아버지는, 탈영을 한 아들과의 대면에도 태연하다. 


    아들이 어디에도 설 자리가 없다는 것, 코너에 몰렸다는 것, 그가 잠시 사회로부터 이탈된 채 공기처럼 부유하고 있다는 것에 맞서 어떤 초조함도 없다는 것은 어떤 사회의 외부도 상정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듯하다. 자신이 하나의 매체로서 전화를 받고 그것을 매개하는 것, 층간소음이 발생했을 때 으레 그에 대한 불만이 접수되고 나서 그것을 다시 전달했음을 알리는 것으로 사건을 종식하는, 결코 끝나지 않을 일상의 파국을 태연하게 넘어가는 행위로부터 그러한 행위들이 겹겹이 쌓이는 곳에서, 그가 가진 삶과 주거의 비제한적 가능성이 그를 감싸안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포기일까. 간신히 자신의 작은 터전으로서 또 다른 (그의/그의 아들의) '어머니'에 기생하며 운신한다는 점에서 그는 바깥으로도 나오지 못한 상태와 같다. 그런 그에게 나타나는 어떤 침착함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는 것에 가깝다. 


    이 극을 분석할 때 '가해자'가 없다는 것, 어떤 폭력 자체를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 단지 그러한 일이 벌여졌음만을 인식하게 하는 데 그치거나, 폭력이 닿는 순간에서 멈추는 것은 '불쌍한' 우리 자신을 비추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 역시나 (삶의 조건이라는 다른 차원에서) 불쌍한 아버지가 묵인, 담담하게 임하는 그 태도가 오히려 그의 아들을 쉬게 하며 운신의 여지를 만드는 가운데, 그 삶 구멍으로, 그리고 다시 그러한 불가능한 삶의 조건을 되비추는 것으로 이 극은 수렴하는 것 아닐까. 


    아버지가 없는 어머니의 군대 가기 전, 차린 마지막 밥상은 아들의 몫으로 제대로 수렴되지 않는다. 담담하게 모든 사태를 받아들이는 아버지와의 만남과 마찬가지로, 헤어짐과 죽음 이전의 마지막 식사가 어떤 안위도 주지 못할 정도로 그 아들은 처절하게 불쌍하며, 그 마지막 쉼의 자리로 상정된 곳은 버려진 노숙자의 자리이다. 이는 차라리 어떤 연대에 가까울 것이다. 그는 쉬이 그의 어머니가 되고 그의 자리를 비로소 용인하고, 아버지와는 달리 시선을 그에게 연다. 그리고 곧 그 '아들'은 영원한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만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건너가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원으로 동원된 마사키 히데오미군기지에 취업했지만 이라크 무장단체에 의해 미군의 동조자로서의 낙인과 그 상징적 지위를 시험당하며 참수당하는 서동철, 백령도 해상에서 침몰한 초계함 병사들, 무장 탈영한 병사로 이어지는 인물들은 현실에서 모두 차용한 것들이고,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명제를 충만하게 만족시킨다. 그것들의 점진적이고도 병렬적인 진행은 차라리 현대의 비극적 아이러니의 우화에 가깝다. 곧 죽음(직전)으로 완성되는 이야기는 우리를 죽음으로, 아니 죽음으로부터 숨을 곳이 없음의 상황으로 몰아세운다. 


    거기에 결국 반쪽의 부모, 그에게 온전한 삶의 자리를 선사할 권능이 없는 부모 역시 미약하게 자리한다. 곧 이 죽음의 서사는, 아니 죽음의 소진을 통한 서사는 숨 쉴 구멍 없이 모든 군인이 직면한 죽음의 가로 우리를 위치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냉소로 그치지 않는 그러나 끊임없이 반복됨으로 인해 얻어지는 '불쌍함'을 자각하고 공유하며 획득하는 어떤 비루한 쾌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냉소도 체념도 아닌 비극적 아들의 처지를 담담하게 대처하는 아버지의 미소라는 결정으로 환원/소급되는 것일 것이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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