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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형제다> 무엇에 대한 테러인가?
    REVIEW/Theater 2015. 9. 13. 03:08

     

    사건의 재현 아닌 허구적 재생 장치의 내파

     

    ▲ <나는 형제다> [사진 제공=세종문화회관] (이하 상돌)

     

    '나는 형제다', 곧 '나'를 일부 나와 유전자를 공유하는 혈연 공동체의 일부로 정의하는 이 말은, 나와 너의 공속 불가능성에 대한 가능성을 유예한다. 운동과 공부라는 스테레오타입의 구별로써, 또한 성격과 외모로써 그 차이를 선명하게 하는 형제의 모습은, 따로 또 같은 ‘더블’로 대칭 쌍을 이룬다. 그리고 이들은 실제 어둠보다는 사막에서의 생존의 은유가 더 분명해 보이는 고독한 방랑자로서, ‘살아남기의 방식’을 ‘함께 살아가기의 이상’으로 확장해 나간다. 곧 ‘형제에의 숙명’을 ‘형제로의 사명’으로 전치시킨다. 이 과정에서 적대적인 세상과의 관계로부터 나아가, 모두가 형제가 되(어야 하)는 넓은 범주의 ‘형제’ 개념을 파생시킨다. 이는 적당히 살아남기라는 비루함의 미학이 부모를 통해 형제에게 전파된 이후, 그와 같은 층위에서 주체의 훼손됨에 대한 동생의 회의(와 이미 그것을 거치고 난 후의 형)에서 인류 공동의 운명적 자각으로 옮겨 가는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사고의 전환을 낳는다.

     

    결정적으로 선인과 악인의 분별에 사로잡힌 이들에 대한 회의를 품는 동생과 그것을 뛰어넘는 강자의 도덕관을 동생에게 설파하는 형, 두 사람의 대화는 세상이라는 스크린의 재생 앞에서 이뤄지는데, 이러한 스크린은 세상에 대한 비유이자 그것을 보는 하나의 관점이기도 함을 나타낸다. 이는 어둠 속에 환영이 비치는 가운데 그것을 실제로 믿음으로써 사실상 그 바깥을 가정하지 못하는 상상력의 빈곤과 수동적인 삶에 대한 비유인 것이기도 하다. 이는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이라는 오래되고 낡은 비유를 재생시키는데, 사실상 미디어에 의한 중개로써 이들 형제의 삶을 단지 지켜볼 수만 있는 수동적인 관객에 대한 풍자, 또는 그것의 참여를 무의지적으로 동조하거나 어쨌든 그렇지 않으려면 비판적인 견지 아래 저항적 의식을 선택해야만 하는(‘우리는 카메라가 아니다, 오히려 그 카메라 바깥에 있다!’) 무대 바깥의 카메라라는 존재로써 인한, 실제 삶의 실재가 아니라 단지 재생으로서만 그것을 지켜본다는 이상한 실재, 곧 기묘하게 흘러가는 현실, 그러니까 (대다수 사람들이 잘못된 오류의 논리로써 종합하고 마는) 깔끔하게 잘 신scene들을 연출이 처리했다고 보이는 것이라기보다 정말 이상하게 영화처럼 현실이 분절되어 여러 시퀀스 단위들로 종합되는 이 연극 자체의 미학이 그러한 현실 자체에 대한 거리두기와 또 다른 능산적인 종합의 측면을 요구하고 있음이 선행되어 있다고 보이는 것이다.

     

     

    마지막 이 영화관의 폭파는 이상하게도 단 둘만 존재하고 있는 듯한(사실 다른 존재 자체를 확인할 수 없는데, 이것 역시 또 다른 영화이면서 편집된 또 다른 시각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은 정확치 않다.) 비어 있는(?) 영화관을 폭파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니 이는 무지에 대한 저항이 불가능한 허구의 재생 장치를 파괴하거나 미디어에 의한 중계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면이 강하다. 사실상 실제 사고에 대한 또 다른 미디어의 기록들이 극의 뒤를 따라 오지 않음으로써 그러하며(원래부터 이는 미디어가 아님을 의미할 수 있다.), 다만 형의 독백이 인류가 아닌 단지 그 자신에게 수렴되고 마는 것이 그러하다. 형은 동생의 목을 졸라 죽일 때 동생은 인류적 타자, 곧 폭탄으로 인해 죽어나갈 이 운명을 예감하지 못하는 그래서 무지한 자들의 잠깐의 유예된 생명이며, 나아가 그들의 대표이기도 한데, 그 연약한 생명으로서의 타자의 등에 마치 업힌 채 그 역시 죽음을 맞는다. 이는 정확히 눈을 감는 식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유일하게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폭탄의 소리가 무대 바깥으로 조금 연장되어 들리게 된다. 곧 이는 이 극장 자체가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연장, 확장시키며 ‘형제’의 의미를 집단 운명 공동체로 수렴시키는 사고에는, 또 다른 역사에 대한 희미한 희망과 갈구가 더해지며 비약되고 있다. 가령, 선과 악은 상대적인 기울기에 의해 맞물려 증감되는 것일 뿐이라는 전제하에 인류라는 하나의 연결된 세계 자체, 그리고 이른바 폐허 속에 피어나는 그 하나로 연결된 인류의 세상에 대한 전언을 스스로의 독백으로 곧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지정한다. 그 뒤의 눈 감음은, 또는 눈감기는 완전한 어둠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는 유일하게 카메라가 닫히고 그 재생이 유예되거나 혹은 과거의 시간 개념이 꺼지는 순간이다.

     

    이들이 어둠 속 터널을 걸어가는 파편화된 개인의 비극적 삶, 멈출 수 없는 재생 장치의 비주체들의 양상 등을 끊임없이 기술하며 오직 주체적인 삶의 영도를 꿈꾸었던 것과 같이 극은 형의 죽음을 통해 시선을 유예하며 즉각 그 시선으로부터 펼쳐지는 세계를 우리에게 양도한다. 이는 곧 보지만 보지 못하는 (비)주체의 비유를 극 속에 끊임없이 숨겨놓았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늘 사람들과 달랐던 비범한 주체의 여정은, 실은 비극적 현실에 적응 못 하는 비극의 영웅적 주체를 소환한다.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그토록 이 극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처럼 비치는 까닭이다.

     

    어떻게 보면 이 극이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작가 스스로도 생각지 못하게) 끌어오며 그에 대한 오마주를 하게 되었던 것 아닐까? 곧 눈 먼 자가 되는 오이디푸스의 숙명이 이뤄지는 것. 곧 테러 주체를 온전히 주체나 타자로 그리지 못한 채, 또는 결코 우리여서는 안 되는 존재이거나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그리는 사이에서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던 그 외양을 그런 식으로 옮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곧 하나의 숙명론, 어떤 위험한 곧 종교적인 형상과 만나는 ‘형제’라는 담론을, 이상하게 결합된 더블로서의 형제로 시작하고, 늘 남들과 다름으로 번민하거나 갈등하는 형제의 (영웅적 주체로서의) 고단한 모습에서 ‘모두가 형제’라는 이상을 갖게 되는 급진적 전환들이 매끄럽지 않은 어떤 변환에 의해 그러한 구조적인 측면에서의 비극의 완성을 이루며, 곧 테러에 대한 책임(에 대한 판단)이 유예되는 차원에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는 실재를 지향하지만, 그 충격은 어쩌면 이 극장의 파괴가 아닌 극장이었음(또는 극장이라는 것에 불과했음)을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에서 매우 약소하며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면이 있다. 작가의 언어는 (빛과) 어둠의 알레고리들을 통해 이런 여러 차원들의 비유가 중첩되어 있으며, 곧 관계의 측면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전언을 전하는 측면의 이념적 언어들로 점철되어 있어 꽤나 복잡하게 뒤얽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것은 집중을 요한다. 테러라는 현실적 사건의 결과를 인계하는 이 극이 그것의 구조를 현실적으로 탐색하기보다, 인류 전체의 역사적 궤적과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주체의 형상을 띄우는 자각적인 측면에서 인류의 시작과 역사를 다시 쓰는 윤리적 차원으로 극의 범위를 넓힘으로써 ‘테러’라는 것은 오히려 정의되지 않고 이상하게 극 언저리에 머물게 된다. 그럼으로써 극장은 역사의 사건의 장소에서 재생 장치의 파기 혹은 내파를 종용하는 장치의 장으로 이념적 의미만을 띠게 된다. 거기에는 눈 먼 오이디푸스의 낡은/늙은 끝 없는 유예된 결과가 전제되어 있는 듯하다.

     

    김민관 편집장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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