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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MAF 2013] <프리즈마>: 신체와 결부된 카메라, 그리고 매체가 되는 신체
    카테고리 없음 2013. 10. 22. 19:19

    <프리즈마>(임철민 감독)

    <프리즈마>는 어떤 내용을 담은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 내지 매체의 지각 방식 자체에 대한 것에 가깝다. 우선 카메라는 부유하며 이는 어떤 대상이 아닌, 대상과 세계가 뒤섞여 유동하는 판과 그어지는 일시적 선분으로만 구성된 하나의 유동하는 혼합적 공간을 창출하고, 이는 계속해서 어떤 앞으로 걸어가는 행위의 리듬과 결부된다.

    인트로에 해당하는 이 영상은 나의 시선을 대신한 카메라의 시선이 걸어가는 행위와 결부된 곧 신체 자체를 매체화하며 그 걸음, 그리고 몸의 흔들림과 카메라와 몸 간의 유격을 통해 목적 없는, 지향 없는 시선을 만들어 낸다. 다만 하나의 그보다 큰 세계(몸)에 종속된, 그리고 그 둘이 속한 커다란 세계(현실 공간)를 향해 가는 가운데, 카메라는 자신의 앞에 놓인 것들을 신체라는 매체에 귀속된 채 그것의 영향을 안고 반영해 낸다.

    인트로 이후, 하나의 순일한 흐름이나 완성을 보여 주는 대신, 여러 컷으로 분절되며, 그 촬영하고 있음 자체를 보여준다. 먼저 카메라를 컴퓨터와 비슷한 조작 장치와 연결된 것으로 사료되는 가운데, 컴퓨터 자판으로 카메라를 통제해, 카메라의 다양한 시선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세계에 대한 시선, 세계의 나타남을 유희로써 가지고 나간다.

    이어 감독이 침대에 오르고, 배우가 되는데, 감독은 자신의 연기에 손수 “컷”을 외치기도 한다. 곧 보이지 않는 카메라는 찍고 있음의 존재, 그리고 계산되고 있음의 사고 속에 상호적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와 배우로서 감독과의 상호 간 교류가 발생하며, 이는 연기를 보고 있음의 관객의 의식을 지정하는 것보다 연기를 보고 있는 자의 의식을 나타내며, 그 보고 있는 자가 동시에 연기를 하고 있는 자가 되는 상호 결속의 시간이 형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앞선 ‘부유하는 시선’에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감독)을 보여 주는 것으로 넘어가는 화면은 저녁에서 아침으로, 또 꿈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자연스런 상황을 유추케 하는 최소한의 서사로 기능하는데, 실은 이마저도 곧 촬영하고 있음 자체에 방점을 찍게 된다.

    이후 수많은 다른 시공간의 영상들이 분절되며 더해 나가는데, 이는 그 ‘종합의 방만함’ 속에 ‘다양함의 지루함’을 발견하며 기억의 눈부신 순간보다 흔들리거나 제대로 화면에 인물이 잡히지 않거나 화면의 구성 비율이 달라지는 등으로 이 영화의 디지털적인 (편집) 속성(의 자유로움)을 확인하거나 신체와 결부된 카메라, 카메라의 기동성을 오히려 확인하게 하는 측면이 강하다.

    한편, 이는 앞선 첫 촬영의 무대가 된 침대가 있는 방 공간을 은폐한 채, 거기에 픽셀 공간과 그것이 휘저어지며 새롭게 레이어가 부상하는 ‘무한한 픽셀의 유동 공간’, ‘생성-회화’적인 공간이 만들어진다. 각각의 픽셀은 각각의 모나드로서 자율적인 운동을 하는 듯하다,

    곧 일정 영역의 흐름이 밀려오며 숨겨져 있던 레이어 층이 부상한다거나 전복한다거나 하며 복잡한 운동 양태를 띠게 되는데, 이는 마치 복잡다단한 구조로 이뤄진 유화로 그린 것에 가까운 회화 연작의 무한 생성, 끝이 없음을 보여 주는 것에 가깝다.

    이는 다시 전체가 되는 하나의 색채 공간에 ‘색채-형태’의 측면에서 변별되는 커다란 움직임이 이 전체의 색채 공간을 뒤바꾸던 인트로 장면을 연상해 보면, 어떤 존재로부터 출현하는 움직임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일어나고 있음을 추측하게끔 한다. 이는 흥미로우면서도 어지럽고, 기이한 생명체(들)의 자기-생성적 구조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침대 위에 감독을 비롯한 두 사람의 움직임이 바꾸는 전체의 지형과 컴퓨터로 인한 편집된 이차 레이어로서 비로소 드러난 그런 공간임이 나중에 증명된다.

    <프리즈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처음 내레이션의 영화의 어둠에 가까운 속성의 파악되지 않음의 시작에서, 끝에는 영화를 보았고, 내가 그 안에 있었다고 전한다. 영화 속에서 내가 나를 보는 영화 속의 나를 마주한다는 식의 명제는 앞서 촬영하고 있음을 보여 준 장면에 의해 어느 정도 설명 가능할 것이다.

    오직 완성이 아닌 촬영 중인 영화 그 자체만을 보일 때 이는 가능한 것일까. 카메라의 찍고 있음, 이어 카메라가 향하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음의 시차적 교차의 발생으로 인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카메라와 촬영 기사가 아닌, 또한 분리된 세계 안에서의 연기가 아닌, 그것들이 결합되며 나뉘지 않는 차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는 어쩌면 필름을 중심으로 두고, 그것이 우주의 한 중심임을 설파하는 어쩌면 과한 낭만/신비주의의 내레이션이 사실 이 필름과 함께 엮이는 신체의 경험으로 영화를 환원할 때 그리 과도한 것만이 아니지 않을까.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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