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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 코러스:오이디푸스>: '생생한 원작'의 구현...
    REVIEW/Theater 2013. 10. 18. 15:13


    ▲ <더 코러스:오이디푸스> [사진 제공=LG아트센터] (이하 상동)


    <더 코러스:오이디푸스>는 더 코러스란 수식어가 붙지만, 당연하게도 소포클레스의 원작 『오이디푸스』의 2차 텍스트이자 동시에 수많은 2차 텍스트의 해석적 담론들에 대한 참조와 변형, 궁극에는 자유로운 해석의 귀결로 나아가는 헝클어진 내지는 또 다른 텍스트들과 달리 오히려 2차 텍스트로서 원전에 충실한 편이다.


    한편, 그리스 연극에서의 주인공과 코러스의 위계적 분리 이전에 코러스가 갖는 높은 비중으로서의 역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합창으로서 갖는 말의 울림으로써 또 무대의 입체적인 재편의 지속으로써 극을 풍부하고도 다른 모습으로 표현하게끔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주어진 벌에 대한 죄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찾고자 하고, 이는 원인과 결과의 인과론적 전제를 전제하며 또한 상황을 목격한 증인을 찾는 노력으로 이어지는데, 그 원인이 스스로에게 소급되며 겪는 혼란과 풀리지 않는 부분들이 계속해서 튀어나오며 불안과 두려움을 겪으며 광기를 띠며 미쳐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진실의 파악이 아닌 광기와 싸우는 것이며 사실 차원에서 죄인이었음을 인지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죄인이 되는 결단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그를 진정한 주체로, 비극적 주체로 만든다. 


    그 결단은 신의 판단에 스스로를 맡기는 대신 자신의 눈을 지르는 과감한 용단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단순히 참혹한 현실(의 결말)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닌, 눈 뜨고도 보지 못한 이성(=눈)에 대한 반성이며, 현재에 무언가를 봄으로써 하기보다는 과거의 죄에서 한 치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상정한다.



     다리를 절게 된 것, 곧 빠져 나올 수 없는 운명에 대한 우의와 함께 눈 먼 이성을 상징하는 눈은 두 신체적 알레고리를 형성한다. 동시에 비극을 정초한다. 이와 연관해서 처음부터 무대에 설치된, 위에서부터 내려와 있던, 붉은 망으로 감싼 전구들은 눈(알)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인다. 이는 마지막에 이르러 오이디푸스의 붉은 피와 절망을 환유하는 조명과 붉은 천과 함께 그의 것을 상징하지만, 극 전반으로는 그만 모르는 순진한 무지의 죄인을 지켜보는 무수한 눈, 코러스의 그것이기도 할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죄를 추적‧인지해 나가는 과정은 주어진 답을 미궁으로 빠뜨리며 최종적으로 주어지는‧수용되는 결론‧선택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일견 서스펜스의 정서로 빚어진다. 차갑고 파편적인 단조의 튀어 나감으로서 피아노에 의해.


    테베에 재앙이 떠도는 처음에 코러스는 흰색 무대 바닥을 점유‧점령하며 마치 현실로부터 쫓겨나 있는, 또 진실을 모르고 있는 오이디푸스의 처지를 드러낸다. 여기서 이를 단순히 ‘코러스의 비중이 높다.’ 내지는 ‘코러스를 주체로 내세우며 표현적인 층위를 앞세우고 있다.;의 해석으로 귀결함은 무지한 내지는 오해의 일면에 불과할 것이다(하지만 대부분의 평은 원작에 대한 비교 검토 대신 이러한 새롭지 않은 새로움에 대한 이야기만을 꺼내기 마련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이 극은 원작이 구현되던 당대 그리스의 원형으로서의 연극을 되찾고자 하는 데서 출발하고 있지, 원작과 전혀 다른, 원작의 깊이를 다양한 표현의 현란함으로 치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러한 코러스의 점령, 오이디푸스와 시차를 벌리며 소문을 전하고, 불길한 기운을 안기는 코러스는 오이디푸스라는 영웅의 비극적 정념을 고양시키며 또한 외부로 공명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코러스는 곧 하나의 사회이자 그것의 목소리이며, 내레이션을 대신하는 목소리이며, 오이디푸스 그 자체로 위치한다. 


    이의 무대와 분리 불가능함은 가령 그 자체의 유기적인 배치에 근원적으로 있기보다 극 그 중심에 일종의 공명 장치이자 정서의 외화적 측면으로 극을 구성하고 있음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부분에 대한 오해가 곧 앞선 이 극에 대한 대부분의 평을 낳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오이디푸스를 영웅이라는 우리와 다른 신분‧계급적 측면에서 달리 두는 것과 달리 비극을 우리의 것으로 전유케 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부분은 신에게 버림 받은 인간으로 스스로를 부각시키는 대사를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선택적 대사의 (반복적) 취함은 인간으로서의 처지를 강조하며 지극히 인간적인 것, 불쌍한 인간의 초상을 그리며 관객이 그것을 스스로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또 동정 받아야 할 것으로 만드는 차원이라는 인위적 효과의 생산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다.


     어쩌면 이는 비극의 원형을 제시하되 신과 인간, 영웅과 평민의 문화/종교적 계급적 측면의 이해를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비극의 차원에서 공명할 수 있게 만드(려)는 의도가 배인 결과가 아닐까. 



    이오카스테 역, 말하자면 여자 주인공의 연기는 다소 과잉이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들게 하는데, 사실상 극의 전반적인 정서가 인물의 표정과 대사에도 체현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것을 어느 정도 더는 게 중요했으리라 보인다. 


    반면 이는 그녀가 끔찍한 진실, 가령 자신의 남편을 죽인 아들과 통해 아들을 가진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일그러진 얼굴이 세월의 경과를 느끼게 하는 주름이 드리워진 얼굴 그 자체로 드러나는, ‘할머니-되기’라고도 이를 수 있는 순간을 맞으면서 마치 이를 위한 과정의 일면에서 그 과잉-표현을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으로 바뀌는 순간이 있지만, 그럼에도 역 간의 평형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비극이 여전히 과잉 그 자체보다는 극의 정서와 극에서 말 자체가 갖는 짜임의 측면에서 자연스레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역설적으로 스스로 죄인이 되는 오이디푸스는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주체로 사라져 간다. 이로써 처음 무대로 진입하기 전에 잠깐 살펴볼 수 있었던 빈 객석들을 유유하게 지나쳐 가는데, 이는 또 다른 문/입구의 상정이다. 


    곧 이야기는 다른 세계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며, 이는 우리의 눈에서는 어차피 보이지 않는 세계일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 그 보이지 않는 운명, 과거로 끊임없이 소구되며 죄를 다시 봄에 의해 살아가는 오이디푸스의 운명을 아는 차원에서 동어 반복의 측면이 있는 동시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소구하는 측면을 낳는다.


     내레이션은 외화면 목소리로 낮아지며 앞선 인생의 갈림길의 알레고리를 반복하며 극의 주제와 메시지를 출현시킨다. 이는 오이디푸스의 내면의 울림에서 다큐멘터리적 삽입으로 그에 대한 재현적 서술이 된다. 이는 극에서 거의 유일하게 비물질적 차원에서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적 장치의 삽입이 아닐까. 



    오이디푸스는 끊임없이 현실로부터 멀어지며 진정한 동시에 쓸쓸한 영웅이 된다. 그리고 그가 진 운명의 무게는 역설적으로 흩어진다. 마치 위로받을 수 없는 영웅에게 갈채의 흔적을 선사하는 이러한 끝은 인상적이지만 반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지 못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더듬음의 행위를 포함하지 않으며 일직선으로 사라진다는 점에서 대단히 환영적이다. 한편 극장의 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는 가운데.


    이는 결국 극을 보고 있는 우리 자신의 환영적인 현존에 대한 인식을 부르고, 극은 끝나지 않은 ‘끝’을 지정해야 한다는 극에 대한 메타적 진실을 극 너머에 부여한다. 그런 차원에서 모호한 듯하나 명확한 차원의 잉여 차원의 귀결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소 <더 코러스:오이디푸스>는 ‘생생한 원작'의 구현’(원작의 생생한 구현이 아닌)인 동시에 과잉의 제스처를 띠고 있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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