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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설국열차>: '친숙하면서도 낯선 봉준호의 영화'
    카테고리 없음 2013. 7. 27. 01:50
    지옥도 닮은 다양한 알레고리의 중첩들

    '실재의 사막'



    ▲  <설국열차> 스틸 ⓒ 모호필름, 오퍼스픽쳐스

    <설국열차>를 관통하는 알레고리들은 꽤나 서구적이다. 이것이 봉준호 감독의 기존 영화들과의 가장 큰, 그리고 단순한 차이일 것이다.


    끝없이 달려 나가는 기차는 금속으로 완전히 쌓여 있고, 어떤 시선도 없다. 이는 마치 눈 먼 상태로 끊임없이 전진하는, 그러나 그 끝이 없는(죽음이 없는) 무한 동력의 괴물을 은유한다. 뱀파이어는 죽지 않기에 역설적으로 삶이 없는 존재이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죽기에 유한한 생명은 소중하다. 


    오존층 파괴로 인해 뜨거워진 지구를 식히기 위해 대거 CW7이라는 물질을 살포하여 발생한 지구의 빙하기는, 그 기차에서는 단지 창문을 통해서만 보는 게 가능하다. 이는 지젝이 말한 “실재의 사막”의 꽁꽁 얼은 버전, ‘실재의 설원’와 같다. 테러 집단 알카에다의 9·11 테러의 폭파 광경과 그 이후는 뉴욕 시민들에게 있어 ‘실재의 사막’과 직결되는 부분이다. 여기 설국의 풍경에는 어떤 생명도 관계도 의미도 더 이상 없다. 


    반면 단 하나의 삶이 존재하는 ‘설국열차’ 안은 지옥과도 같다. 영화의 트레일러를 보면 “애초부터 나는 앞쪽 칸, 당신들은 꼬리 칸”이라는 명제에서, 열차 꼬리 칸에 탄 이들에게는 적어도 그렇다.


    '지옥도'의 유비


    ▲  <설국열차> 스틸 ⓒ 모호필름, 오퍼스픽쳐스

    실제 영화는 미래 인류의 삶을 상정하지만, 이 지옥과 같은 열차 안 풍광은 사실 산업혁명과 맞물려 겪는 끔찍한 도시의 빈민층의 노동 현실과 정확히 같다. 또한 이 끝없이 달려가는 열차는 삶의 의미 따위는 상관없이 컨베이어 벨트에의 예속과 기계의 규칙을 따르는 노동자의 노동과 결부되어, 끝없는 생산이라는 산업화의 유비를 형성한다.


    ‘머리 칸’, ‘꼬리 칸’은 정확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 차이에 대한 마르크스적 은유이며 이어 후자가 전자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는 투쟁으로 이어짐을 상정한다. 이는 마치 ‘스파르타쿠스’ 시리즈와도 비주얼적 유사성을 띠는데, 진보(進步)를 축자적으로 풀면, ‘나아가는 발걸음’이듯 열차 칸들을 뚫고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를 기축으로 한 집단이 앞을 향해 뛰어감은 진보에 대한 적절한 형상화이기도 하다. 가령 <레미제라블>에서 진보가 깃발을 흔들며 멈춰 서 그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비유됐다면.


    한편 이 ‘머리 칸’, ‘꼬리 칸’을 말하는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의 메이슨으로의 변신은 우선 그녀인지 인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꽤나 놀라운데, 그녀의 외양은 자연스레 나치의 잔영에 가깝다. 기계처럼 일하는 산업화 노동자이자,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이자, 마치 인종 차별을 당하는 피식민지인으로서 등등, 여러모로 영화 속 이 투쟁과 진보는 유의미한 것이다.


    '남궁민수 이전의 송강호'


    ▲  <설국열차> 스틸 ⓒ 모호필름, 오퍼스픽쳐스


    이 열차를 뚫고 가기 위해서는 막힌 문을 여는 공학적 지식이 필요한데 이 열차를 설계한 사람은 바로 남궁민수(송강호)로, 송강호의 등장은 여러 모로 숨죽이는 장면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영어로 말할까’ 등등의 생각이 교차하는 순간은 그의 입을 떼는 순간이 그만큼 길기 때문에 기인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투쟁의 절박한 얼굴에 대비되는 송강호의 여유로운 연기는 남궁민수라는 역할 이전에 송강호란 배우 자체로 드러나는 것에 가까운데, 이런 부분은 봉준호 감독이 송강호의 특이성(singularity)을 오히려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케 하는 부분이다.


    '동굴의 비유'


    산업화의 산물인 동시에 인류 최고의 과학적 진보의 결과물인 끝없이 달리는 열차, 동시에 뚜렷한 계급 차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 속에 끔찍한 삶을 살아온 노동자들은 이 지옥, 그리고 한편으로 이 지옥 너머로 침묵하는 절대적인 순백색의 죽음의 풍경은 꽤나 복잡다단한 알레고리들이 중첩되어 있는 형국이다.


    영화 <매트릭스>를 관통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여기서도 유의미할 것 같다. 곧 동굴 속 허상을 믿으며 자족할 것인가, 아니면 실재의 삶으로 나갈 것이냐의 판단의 문제, 그리고 이는 영화의 유의미한 결말에 닿아 있는 부분이다.


    영화 속 액션의 하이라이트라 볼 수 있는 테러 집단의 외양을 띤 지배 집단의 수하들과 자유를 위해 진보하는 집단 사이의 싸움은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인간의 몸과 몸이 실제 부딪히는 느낌’으로 촬영되었는데, 이는 끔찍하기보다 죽고 죽이는 자들의 뒤엉킨 신체들을 강조하며 또 다른 지옥의 광경을 연상시킨다. 한편으론 그것들이 중첩된 선들의 잔상으로 남으며 마치 애니메이션과 같은 표현을 띤다.


    '친숙한', 그러나 '낯선'



    이 영화가 해외에서 성공을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은 애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맞닿는 부분임에도 차마 부정하긴 힘든 부분이지 않을까. 서구적 알레고리들, 그리고 헐리우드 배우들 가운데 송강호와 고아성이 갖는 특이한 마스크와 캐릭터, 눈부신 설국 속 혈혈단신의 열차라는 비주얼 등이 인상적인 부분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이 영화를 한편으로 봉준호의 <괴물> 이후의 영화의 연장선상에서, 곧 한국 영화라는 틀 안에 겹쳐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괴물>과 <설국열차>의 간극에서부터 ‘낯선’(봉준호 감독의 작품으로서는), 그러나 ‘친숙한’(서구적 시각으로는), 이 영화를 그저 봉준호를 넘어 한 편의 영화로서 감상하는 게 중요할 것임은 물론일 것이다. 


    김민관 기자 mikw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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